287화
제55장 제압(2)
준후의 야무진 처치에 현아는 입을 떡 벌렸다.
일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사가 간호사보다 주사를 더 잘 놓는다거나, 의사가 간호사보다 정맥 라인을 잘 잡는다는 착각이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일반 채혈을 하거나 환자의 정맥을 잡는 일은 간호사의 업무였다.
간호사는 이런 일들을 하루에 수십 번씩 했다.
그러니 정맥 라인을 잡는 숙련도는 간호사가 월등하게 높을 수밖에 없었다.
유나가 준후를 호출했을 때 현아가 짜증을 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만약 정맥 라인 문제로 SOS 호출을 한다면 다른 병동 간호사에게 전화 했어야 한다고, 현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현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신이 세 번에 걸쳐 라인을 잡지 못했던 환자의 혈관을 준후는 단번에 찾아냈다.
혈관이 그나마 도드라진 왼팔도 아닌 오른팔에!
두 눈으로 지켜보고도 믿기 힘든 결과였다.
“어때요? 참 쉽죠?”
환자의 라인을 잡은 준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 네.”
현아도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패자는 할 말이 없었다.
유나가 수액줄을 고정 및 정리하면서 한 바탕 소동이 끝났다.
현아는 드레싱 카트를 끌고 스테이션으로 복귀했다.
“서 선생님, 얼굴만 번지르르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능력도 있네?”
“그걸 이제 아셨어요? 준후 쌤 일 잘한다는 거 벌써 소문이 파다해요.”
유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day, 오전) 근무자하고 이브닝 근무자한테 들었는데요.”
“들었는데?”
“준후 쌤 일 처리 속도가 스포츠카 같대요. 병동 콜 받자마자 5초 내에 오더 내려주고요. 환자 술기도 5분 이상 밀리지 않는데요.”
“단순히 빠르기만 한 거 아니야?”
“그럼 당연히 좋은 소리가 안 나왔겠죠. 빠른데 정확하대요.”
“그래? 진짜 일 잘하나 보네.”
현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유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견 온 레지던트 쌤이 일 잘하면 좋은 거 아니에요? 근데 왜 그렇게 표정이 뚱하세요?”
“서진 쌤이 생각나서.”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이름을, 현아는 입에 올렸다.
구서진.
로봇처럼 무뚝뚝하면서 로봇처럼 깔끔하게 일 처리를 했던 신경외과 레지던트 2년 차.
예전의 에이스 서진은 이제 신경외과에 없었다.
혁재와 담당 교수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2달 전 쫓겨나듯 병원을 떠났다.
준후도 곧 서진의 뒤를 따르지 않을까.
대전 분원 신경외과 의국은 일을 너무 잘해도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다.
강한 자는 그만큼 더 많은 짐을 짊어져야 했으므로.
“선생님이 서진 쌤 이야기하니까 진짜 서진 쌤 보고 싶네요. 준후 쌤하고 서진 쌤이 같이 있으면 병동은 완전 천국일 텐데.”
“그걸 이제 알았니?”
“뭐를요?”
“천국은 상상 속에 있다는 거.”
현아는 검지로 본인의 머리를 가리키고 쓰게 웃었다.
나이트 업무를 하는 동안.
수다쟁이 유나는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혼자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것 같았다.
나름 잠 깨는 효과가 있어서 딱히 막지는 않았다.
오늘 유나의 화제는 준후였다.
이야기를 자꾸 듣다 보니 괜히 준후에게 관심이 생겨서, 현아는 준후가 운영한다는 뉴튜브를 찾아갔다.
“미…… 미친 구독자 101만?”
혼자 간직하기로 했던 마음의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현아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상에 100만 뉴튜버라니…….
유명 연예인이나 배우들도 달성하기 힘든 그 성과를 의사인 준후가 해냈단 말인가.
“거봐요. 제가 준후 쌤 보통 아니라고 했죠?”
드르르륵.
현아는 대답 대신 마우스 휠을 쭉 내렸다.
최초 영상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준후는 인턴 때부터 지금까지 의술과 뉴튜브를 병행한 것이다.
몸이 두 개라도 되는 것처럼.
“영상도 이것저것 많이 찍었네? 스터디 영상도 있고. 아이돌 춤 따라 하는 영상도 있고. 동전 구부리는 차력 같은 영상도 있고.”
“네. 기본은 스터디 영상하고 아이돌 안무 커버인데. 틈틈이 다른 영상도 찍더라고요.”
“조회수도 알짜배기야. 가장 최근 올린 영상도 60만이 넘어가.”
현아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을 비볐다. 그리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야. 너 궁금하지 않니?”
“뭐가요?”
“뉴튜브가 이렇게 잘 되는데 서 선생님은 왜 의사를 하지? 이 정도 인기면 전업 뉴튜버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돈이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돈으로도 해결 못 하는 일이 있거든요.”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아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준후가 현아를 보며 씽긋 웃고 있었다.
* * *
“아. 선생님. 죄송해요. 뒷담화 같은 걸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준후를 발견한 현아가 당황했다.
두 손을 황급하게 좌우로 저었다.
“괜찮아요. 귀가 간지럽지 않았던 걸 보면 욕은 안 하신 것 같더라고요.”
준후가 익살맞게 말을 받았다.
이에 유나가 입을 가리고 꺄르르 웃었다.
“준후 쌤은 입담도 좋으시네요.”
“병동 일하면서 즐거울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입이라도 즐거워야죠.”
준후의 말이 이어졌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도 될까요? 외과의를 왜 계속하냐는 이야기요.”
“네. 듣고 싶어요.”
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국 재벌 임원이라고 할게요. 그럼 돈이 엄청 많겠죠?”
“최소 몇백억은 있겠죠.”
“설령 돈이 그렇게 많다고 해도 응급 수술은 못 받을 수도 있어요. 수술 가능한 서전이 없으면.”
준후는 얼마 전 있었던 빅5병원 간호사의 뇌출혈 건을 예로 들었다.
사실 그 간호사의 자리에는 그 누가 들어가도 상관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빅5병원조차 자체적으로 응급 외과 수술을 할 형편이 안 돼서, 환자를 다른 빅5병원에 보내야 한다는 처참한 현실이었다.
“돈이 중요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죠. 사람들은 그 부분을 너무 자주 잊는 것 같습니다.”
“으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그럼 선생님이 외과의를 계속하는 데는 사명감 같은 게 있는 건가요?”
“사명감도 있고, 책임감도 있고, 트라우마를 떨치고 싶은 마음도 있죠.”
대답을 마친 준후는 왼손에 착용한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뇌사 후 장기기증으로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의대 동기 성호형이 남긴 유품이었다.
성호는 세상을 떠났지만 준후는 성호를 보내지 않았다.
“아까 선생님이 정맥 라인 잡을 때, 툴툴거린 거 사과드릴게요.”
현아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솔직히 선생님이 그렇게 잘할 줄 몰랐어요.”
“뭐, 살다 보면 오해할 수도 있죠.”
“그나저나 준후 쌤은 어쩐 일로 스테이션까지 행차하셨어요?”
잠자코 있던 유나가 화제를 돌렸다.
“잠깐 여유가 생겨서 선생님들 하고 대화나 할까 해서요.”
준후의 말은 절반 정도 진실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병동과 의국의 정보를 파악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간호사는 병동의 눈과 귀였다.
차트에 없는 환자와 보호자의 정보.
의국이 돌아가는 상황.
레지던트와 교수들의 성격 및 인간관계 등등.
병동 내 다양한 정보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는 훌륭한 정보통이었다.
무림으로 치면…….
개방이나 하오문이라고 할까?
어쨌거나 의국의 정보를 미리 파악해두면, 의국에 적응하는 시간을 5배 이상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오늘 파견 첫날이잖아요. 병동과 의국에 궁금한 게 많아요.”
“…….”
“몇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좋아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두 분이 봤을 때 과장님은 어떤 분인가요?”
준후는 의국의 우두머리인 과장의 성향부터 물었다.
“과장님은……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일도 깔끔하게 잘하시는 분이에요.”
“과장으로 승진한 지 3달밖에 안 돼서 고생이 많기도 하시고요.”
“무슨 고생이요?”
“홍훈식 부교수님하고 사이가 안 좋아요. 한 마디로 원수죠.”
준후는 귀를 쫑긋 세우고 현아와 유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어 리액션을 했고.
때때로 추가 질문도 던졌다.
그렇게 파악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1) 과장은 대외적으로 평판이 좋은 편이다.
2) 과장과 홍훈식 부교수는 개와 원숭이처럼 사이가 나쁘다.
3) 홍훈식 부교수는 의국의 적폐이자 고인물이다. 간호사들도 홍훈식이라면 바득바득 이를 간다.
4) 의국 레지던트들의 상태는 개판이다. 3년 차 혁재가 후배들을 폭행하고 4년 차 치프는 이를 손 놓고 지켜보는 것 같다 등등.
두 사람의 이야기 중 좋은 이야기는 귀를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만큼 대전 분원 신경외과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눈을 뜨면 어둠이고 발을 디디는 곳마다 낭떠러지였다.
총체적 난국이라 준후가 대체 어디부터 손 봐야 할지 곤란할 지경이었다.
“누가 오는데요?”
준후가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에이, 이 시간에 누가 병동을 오겠어요.”
“아무도 없는데요? 대체 뭘 보신 거예요? 혹시 기력이 너무 허해서 무언가를 잘못 본 게 아닐까요?
유나가 텅 빈 복도를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상황이 뒤집히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복도 먼 끝에 있던 실루엣이 차차 선명하고 커졌다. 발소리도 가까워졌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잠시 의국을 떠났던 탕아이자 레지던트 1년 차인 대휘였다.
* * *
신경외과 당직실.
준후와 대휘는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준후는 대휘에게 오늘 하루가 어땠냐고 물었다.
대휘는 황홀했다고 대답했다.
사우나 욕탕에 몸을 지지고.
평소에 못 먹던 음식도 먹고.
한가롭게 공원을 산책했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일상인 일들이 대휘에게는 크나큰 사치였던 것이다.
준후는 대휘가 무너지는 멘탈을 일으켜 세운 것 같아서 기뻤고 한편으로는 대휘가 불쌍했다.
대휘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들을 줄곧 누리지 못했다.
외과에 근본적인 개혁이 없는 한.
대휘의 처지도, 준후 처지도 앞으로 나아질 일은 없으리라.
“근데 선배…… 저 무서워요.”
“응? 뭐가?”
“잘 쉬고 왔긴 했는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나 싶더라고요. 혁재 선배랑 치프가 지금 칼을 갈고 있을 텐데.”
대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걱정 마. 내가 다 수습해 주기로 약속했잖아.”
“그건 알지만…… 혁재 선배 성격이 워낙 지랄 맞아서요. 말로는 안 끝날 것 같은데.”
대휘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 오늘 선배랑 당직실에 있으면 안 돼요? 숙직실은 도저히 못 들어가겠어요.”
대휘가 지레 겁을 먹었다.
그 모습이 꼭 공포 영화 살인마의 희생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았다.
애를 얼마나 잡았길래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이는지.
준후는 새삼 혁재를 향해 뜨거운 분노를 느꼈다.
드르르륵.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때마침 혁재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배를 살살 문지르는 걸 보면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서 당직실을 찾은 듯했다.
아니면 당직을 서는 준후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인지도 모를 일이었고.
“김대휘?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대휘를 발견하자마자 혁재가 도끼눈을 떴다.
“X만한 새끼가 근무를 째고 튀어? 돌았어? 네 일을 우리 보고 대신 하라는 거냐?”
“아뇨. 선배. 그런 게 아니에요. 준후 선배가 하루는 쉬어도 된다고 하길래…….”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네? 내 말을 들어야지, 왜 오늘 갓 파견 나온 새끼 말을 듣냐? 내가 졸라 우스운가 보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대휘가 의자에서 일어나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준후는 대휘의 앞을 방패처럼 가로 막고 섰다.
혁재의 미간에 지렁이 주름이 잡혔다.
“넌 또 왜 나대? 제3자는 빠져!”
“혁재야. 귀청 떨어지겠다. 좀 조용히 말해라. 응?”
“하…… 낮부터 계속 반말로 씨부리네. 어이없는 새끼가. 응급실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서 참았던 거거든? 너 오늘 어디 해 뜰 때까지 맞아보자.”
혁재는 쿵쿵거리며 냉장고로 이동해, 냉장고 밑에 숨겨 두었던 야구 방망이를 꺼냈다.
알루미늄 방망이가 은갈치의 비늘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