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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88화 (287/424)

288화

제55장 제압(3)

혁재는 오른손에 야구 방망이를 쥐고 손목으로 원을 그렸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묵직하고 위협적인 소리가 당직실에 퍼져 나갔다.

그런데 대휘의 낯빛이 파랗게 질린 반면 준후는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하는 중이었다.

‘이 새끼, 네가 아직 나를 모르는구나. 크크크.’

혁재는 준후가 야구 배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 준후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에이, 위협용으로 배트를 들었겠지. 설마 진짜로 사람한테 휘두르겠어?

하지만 준후의 생각은 물러터진 복숭아와 다를 바 없었다.

혁재는 ‘척’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속담을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 혁재는 타자였고 타자라면 공을 헛치더라도 반드시 배트를 휘둘러야 했다.

“서준후. 마지막으로 딱 한 번 기회를 줄게.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용서한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 싫으면 까불지 말지?”

“서…… 선배. 우리 그냥 혁재 선배 말 들어요. 혁재 선배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요.”

대휘가 준후 곁에 서서 애걸복걸했는데 혁재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제야 의국이 제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괜찮으니까 멀리 떨어져 있어. 잘못하면 네가 다친다.”

“준후 선배. 정말 안 된다니…….”

준후가 살벌한 눈빛을 보내자 대휘가 말끝을 삼켰다.

창가 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어휴. 삼류 드라마가 따로 없네. 눈꼴시린다. 눈꼴이. 됐고 서준후 줘팬 다음은 김대휘 네 차례니까 기대해.”

혁재가 준후에게 다가갔다.

두 손으로 움켜쥔 야구 방망이를 가로로 휘둘렀다.

그리고 방망이가 준후의 팔과 허리를 강타…….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

준후가 뒤로 성큼 물러나며 배트를 피했던 것이다.

‘이놈 봐라? 감히 피해?’

약이 잔뜩 올라 혁재는 마구잡이로 배트를 휘둘렀다.

전후 좌우할 것이 없었다.

준후의 온몸을 골고루 찜질해 주겠다는 듯 닥치는 대로 팔을 움직였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하지만 배트는 이렇다 할 시원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준후 대신 애꿎은 공기만 때릴 뿐이었다.

허어어억.

허어어억.

1분이 지난 후 혁재의 벌어진 입에서 거친 숨이 토해졌다.

피부에 땀이 맺히면서 입고 있던 수술복이 살갗에 달라붙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는데?’

혁재는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분노가 의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잠시 가출했던 이성이 복귀 선언을 하고 있었다.

10평 남짓한, 그리 넓지도 않은 당직실에서(책상이나 책장이 차지한 공간을 차지하면 실제 공간은 더 좁다).

자신의 배트를 모조리 회피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우연일까.

준후의 표정은 왜 시종일관 여유롭단 말인가.

생각이 그쯤 미치자 의심은 불안이 되었다.

응급실에서 자신의 주먹을 잡아냈던 준후의 경이로운 반사 신경도 떠올랐다.

“다 놀았어? 재미있었니?”

준후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울렸다.

혁재를 하룻강아지로 얕잡아보는 비웃음이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심상치 않은 기운은 감지했나 보네. 하지만 늦었어. 난 전부 세고 있었거든.”

“셌다고? 뭘?”

“지금까지 배트를 총 24번 휘둘렀더라? 난 고리대금업자는 아니니까…… 이자는 딱 10퍼센트만 받을게.”

“…….”

“쉽게 말하면 배트를 26번 얻어맞은 것 같은 고통을 네게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준후의 발언이 무시무시했다.

꼭 포식자가 피식자를 향해 으르렁 포효하는 듯했다.

혁재는 이제 준후가 두려웠다.

따라서 손에 쥔 배트의 용도 또한 180도 바뀌었다.

이전까지 배트가 사냥도구였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호신 도구였다.

저벅. 저벅.

준후가 거리를 좁혀 왔다.

혁재는 속절없이 뒷걸음질 쳤다.

덩치도 자신이 크고 배트도 손에 들려 있었지만 준후의 기백을 감당할 수 없었다.

“김대휘! 이 미친놈아, 가만히 있을래?”

혁재가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서 소리쳤다.

“네?”

“빨리 뒤에서 준후 새끼 덮쳐. 그러면 네가 오늘 한 짓 전부 용서해 준다.”

“…….”

“짱구 잘 굴려 봐. 나랑 있는 시간이 긴지, 아니면 준후 새끼랑 있는 시간이 더 긴지.”

“…….”

“준후 새끼는 파견 기간 끝나면 떠나. 그리고 그날부로 넌 X되는 거야.”

혁재의 발언이 당직실에 파문을 몰고 왔다.

거리를 좁히던 준후의 발걸음이 뚝 그쳤다.

준후는 몸과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 등 뒤에 있는 대휘를 응시했다.

대휘는 달달달 다리를 떨었다.

손톱을 입으로 가져가 잘근잘근 씹어댔다.

“김대휘. 딱 셋만 센다. 하나, 둘…….”

“싫…… 싫어요!”

“뭐라고?”

예상치 못했던 대휘의 거절에 혁재가 눈을 치켜떴다.

저 새끼가 쥐약이라도 처먹었나, 감히 하늘 같은 선배의 제안을 내동댕이쳐?

꺼졌던 가슴에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더 이상 혁재 선배 말 듣기 싫다고요. 비록 오늘 처음 봤지만 저는 준후 선배가 더 좋습니다. 준후 선배는 제가 고생하는 걸 알아주고 다독여줬어요.”

“…….”

“혁재 선배는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는 걸 해줬다고요. 어차피 불행할 거면 준후 선배가 파견 나온 시간이라도 행복할래요.”

“저…… 저 병X새끼가 뭐라는 거야?”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과 동시에.

혁재의 눈빛은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빛났다.

준후는 여전히 몸을 반쯤 뒤로 돌리고 있었다.

즉, 무방비 상태였다.

기회는 바로 지금!

후우우웅.

알루미늄 배트가 준후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수직낙하했다.

* * *

턱!

준후는 혁재를 바라보지 않고도 손바닥을 뻗어 알루미늄 배트를 받아냈다.

배트가 주는 충격이 묵직했지만 피해는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없었다.

내공으로 팔과 손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걸로 25번 휘둘렀네? 이자 10퍼센트 추가해서 28번이다?”

“이 미친 새끼, 넌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그럴지도?”

준후는 배트를 쥐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의 손날을 휘둘렀다.

준후의 손날이 배트를 쥐고 있던 혁재의 손목을 강타했다.

“으으으윽!”

혁재가 신음을 흘리며 배트를 떨어트렸다.

머저리 같은 놈.

시비를 걸 사람이 따로 있지.

혁재를 한심해 하며 준후는 혁재에게 다가갔다.

혁재의 얼굴에 본인의 손바닥을 얹었다.

척!

적당히 힘 조절을 하며 준후는 혁재의 머리통을 당직실 바닥에 내리꽂았다.

수법(手法) 중의 하나인 청낙수(靑落水)였다.

킹 오브 파이터의 이오리와 어떤 국회의원이 사용한 바로 그 기술이었다.

쿵!

바닥이 요란하게 울렸다.

준후가 손바닥을 떼자 드러난 혁재의 눈동자는 흰자위만 보였다. 벌어진 입술에서 게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하지만 혁재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억지로라도 할 수 없었다.

준후는 악인에게 자비가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준후의 기본적인 정의관이었다.

“대휘야.”

“…….”

“대휘야?”

“아. 네 선배.”

준후가 두 번을 부르고 나서야 넋이 나갔던 대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아주 잘했어. 좀 멋있었다?”

“그보다 손은 괜찮으세요? 배트에 제대로 맞았던 것 같은데요?”

“멀쩡해. 제대로 힘이 실리기 전에 막았거든.”

준후는 괜찮다는 의미로 배트를 받아냈던 손의 손목을 빙빙 돌렸다.

“혁재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파견 끝나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단단히 교육시킬 거니까.”

“그…… 그게 가능할까요?”

“개를 사람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개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는 것쯤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

“미안한데 2시간 정도만 당직실 지켜주라.”

“네. 선배.”

준후는 기절한 혁재를 두 팔로 안아 들어 아무도 없는 숙직실로 데려가 1층 침대에 눕혔다.

찰싹! 찰싹!

준후가 혁재의 뺨을 몇 대 쳤다.

혁재가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파르르 몸을 떨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정산 시간이자 속죄의 시간이지.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했어?”

“아냐. 이건 꿈일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리 없어.”

혁재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꿈속에 있든, 현실에 있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준후는 혁재를 노려보았다.

혁재는 대전 신경외과 의국에 암 조직이었다.

암 조직은 자기밖에 모르고 주변에도 악영향만 끼치니까.

그렇다면 이 기회에 확실히 절제할 필요가 있었다.

파바바밧.

준후의 손가락이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준후는 순식간에 말하기와 관련된 아혈, 움직임과 관련된 천산혈을 제압했다.

혁재를 살아 있는 인형으로 만든 것이다.

갑자기 말도 할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당황한 걸까.

혁재의 눈동자가 공포에 물들었다.

“앞으로 의국 생활은 혁재, 네 마음먹기에 달렸어. 처신 잘하는 게 좋을 거야.”

“…….”

“나중에 내 파견 기간이 끝났다고 해도 방심하지 마. 네가 망나니짓 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쉬는 날 찾아와서 괴롭힐 거니까.”

뚜두두둑.

준후는 가볍게 목을 풀며 준비했다.

사파인들에게 배운 고문 수법을.

근 몇 개월 만에 사용하는 분근착곡술로 오늘은 모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을 잔뜩 들을 것 같다.

* * *

다음 날 오전.

컨퍼런스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회의실에 하나둘 빈자리가 채워졌다.

“좋은 아침.”

치프 동원이 먼저 와 있던 혁재에게 아는 체를 했다. 그런데 혁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히에에엑!”

“너 왜 그래? 내가 귀신이라도 되냐?”

“아…… 아뇨. 그냥.”

“그냥이 아니잖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당직 선 것도 아니면서?”

동원이 봤을 때 혁재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평소의 혁재라면 자신을 먼저 알아보고 괄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야 했다.

캔 커피를 마시며 후배와 인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어야 했다.

하지만 웬걸?

오늘의 혁재는 잔뜩 주눅 든 모습이었다.

주인에게 크게 혼이 나서 의기소침한 강아지 같았다.

“자…… 잘 모르겠어요.”

“싱겁기는. 어제 대휘는 잘 들어왔냐? 얼굴은 봤고?”

“네.”

“뭐라고 했어?”

“앞으로 잘하라고 했죠.”

“그게 끝?”

“네.”

“와! 말 한마디로 퉁쳤다고? 천하의 김혁재가 성질 많이 죽였네? 최소한 원산폭격은 시켰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런 거 안 하려고요.”

할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혁재는 말을 아꼈다.

어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쪽팔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꿈만 같기도 해서 말이다.

“너 오늘따라 너무 낯설다? 내가 아는 김혁재 맞아?”

“맞을 거예요. 아마.”

드르르륵.

때마침 컨퍼런스 룸 문이 열리고 준후가 안으로 들어왔다.

준후를 발견한 순간 혁재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서늘한 공포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재빨리 준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은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호환, 마마, 전쟁.

아니,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보다 준후가 더 무서운 혁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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