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제55장 제압(4)
대전 분원의 컨퍼런스 분위기는 생기가 없었다.
레지던트며, 교수할 것 없이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졸린 닭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이 많았고, 질문 또한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품이 전염병으로 퍼지면서.
의국 스태프들 중 3분의 1이 동시다발적으로 하품하는 진풍경도 펼쳤다.
하지만 준후는 의욕이 없어 보이는 스태프들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단지 피곤할 뿐이었다.
서울 본원보다 T.O가 부족함에도 서울 본원만큼 환자를 봐서 지쳤을 뿐이었다.
이럴 때면 준후는 종종 발칙한 상상을 하곤 했다.
만약 자신이 무림 출신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판타지 대륙 출신이라서 의국 스태프들에게 힐 마법을 써줄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다치고 죽어가는 환자를 지켜보는 것만큼 피로에 찌든 동료들을 지켜보는 것도 준후는 고통스러웠다.
“잠깐.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
치프가 입원 환자 브리핑을 하던 도중이었다.
중년 교수가 치프의 말을 끊었다.
교수는 이마가 좁았으며 눈이 옆으로 찢어져 있어 인상이 날카로웠다.
교수의 이름은 홍훈식.
준후가 간호사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대전 분원의 최강 빌런이었다.
“서준후.”
훈식이 대놓고 반말을 했다.
보통 컨퍼런스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레지던트나 인턴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게 불문율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네. 교수님.”
“방금 설명한 T.A(교통사고) 환자 말이야. 왜 수술을 안 했지?”
훈식이 따지듯이 물었다.
이에 풀 죽었던 혁재가 바짝 고개를 들었다.
혁재는 훈식과 의견이 같았다.
환자에게 수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두개골 골절, 뇌척수액 루, 지주막하 출혈이면 충분히 수술을 고려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증상을 합쳐 놓고 보면 위중해 보일 수 있는 환자입니다. 하지만 각 증상의 중등도를 따지면 수술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준후는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두개골 골절은 선상골절.
그러니까 실금이 간 경미한 골절이었고.
지주막하 출혈은 혈종의 크기가 25CC로 자연 흡수를 기대할 만했으며.
뇌척수액 루의 양도 많지 않았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환자가 GCS(의식 수준을 평가하는 검사) 스코어에서 만점을 받을 만큼 상태가 좋았다고 덧붙였다.
준후의 주장과 근거가 톱니바퀴처럼 단단하게 맞물려 있었다.
“쯧쯧쯧.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 눈치가 없는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수술을 해야 우리 과가 단 몇 푼이라도 벌 거 아니야. 수술을 해야.”
“…….”
“약물 투여하고 경과를 지켜보면 껌값도 안 나올걸?”
훈식이 이마를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훈식의 막돼먹은 발언에 준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약물로 치료 가능한 환자에게 굳이 수술을 하라고?
전신 마취하고 머리통을 열라고?
훈식의 사고방식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훈식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훈식은 사람을 ATM으로 보고 있었다.
준후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였다.
“서준후. 수술이 필요한 환자와 수술이 가능한 환자를 잘 구분해. 그리고 가능하면 수술이 가능한 환자에게도 수술 스케줄을 잡으라고. 알았어?”
“…….”
“어쭈? 대답 안 하나?”
준후가 입을 다물고 버티는데 과장 시덕이 대화에 껴들었다.
“홍 교수님, 그만하시죠.”
“뭘 그만합니까? 네가 틀린 말 했어요? 우리 과가 돈을 못 벌어주니까 병원에서 맨날 우리 과만 쪼아대는 거 아닙니까?”
“…….”
“수술이 돈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처치보단 돈이 돼요. 할 수 있을 때 해야죠.”
말을 마친 훈식이 팔짱을 꼈다.
시덕이 곧장 반격에 나섰다.
“억지로 수술하다간 오히려 병이 악화될 수 있어요. 마구잡이로 수술하기엔 스태프들 머릿수도 부족하고요.”
“…….”
“무엇보다 우리가 돈만 벌자고 신경외과를 선택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럴 거면 아예 다른 전공을 선택했어야죠.”
“허…… 과장님이 그렇게 무르니까 우리 과가 항상 이 모양 이 꼴인 겁니다.”
“이 모양 이 꼴이라니요?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
“그러는 홍 교수님은 그렇게 잘나서 과장 시절에 징계 먹고 부교수로 강등당하셨습니까?”
“이 사람이 왜 가슴 아픈 옛날이야기를 꺼내고 난리야!”
두 사람의 대화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두 사람은 박 터지게 서로를 물고 뜯었다.
이는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었다.
두 마리의 맹수가 서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영역 다툼이었다.
근래에 과장이 된 시덕.
전(前) 과장으로 의국을 장악했던 훈식.
어느 한쪽이 물러서지 않는 한.
어느 한쪽이 피를 보지 않는 한.
이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
* * *
의국 일인자와 이인자가 정면충돌하면서 컨퍼런스와 회진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 마무리되었다.
흩어지는 스태프들을 응시하며 준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스태프들끼리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국에 내부에서 총질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편 가르기를 한다면 준후는 과장 시덕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시덕은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의사의 본분을 잊지 않은 사람이었다.
“첫 컨퍼런스부터 겁나게 어수선하네. 왠지 내 얼굴이 다 빨개진다.”
준후 곁에 선 치프 동원이 한마디 했다.
“원래 두 분이 자주 싸우세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과장님 입장에서는 전 과장이었던 홍 교수님이 과장 노릇을 하니까 꼴 보기 싫을 테고.”
“…….”
“홍 교수님 입장에서는 자기 밑에 있던 사람이 상관이 됐으니까 속이 뒤틀렸을 테고.”
“저희는 고래 싸움에 낀 새우네요.”
“뭐 비슷한 느낌이지.”
치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넌 당직 근무 선 것 치고는 멀쩡해 보인다?”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준후에게는 영양제와 운기조식이라는 희대의 사기 조합이 있었다.
영양제를 먹고.
30분만 운기조식을 하면.
남들이 반나절 꿀잠을 잔 것처럼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오늘부터 수술 스케줄 있지?”
“네. 1시간 있다가 경추 척수증 환자 수술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도의가…… 홍 교수님이네요.”
“하긴 매도 빨리 맞는 편이 낫지. 잘 됐다.”
“홍 교수님은 집도할 때 어때요?”
“어…… 그냥 모르는 게 좋겠다.”
치프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 숨겨진 의미를 준후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설령 성격이 지랄 맞더라도.
수술을 잘하면 괜찮을 텐데…….
훈식은 수술도 개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치프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3년 차 혁재가 준후와 치프를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혁재, 쟤 오늘 아침부터 많이 이상하더라. 준후 네가 찍찍 반말을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제 얼굴에 주먹을 꽂으려고 했잖아요. 죽었다 깨어나도 선배 대접해 줄 순 없죠.”
“그래도 의국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다. 네가 먼저 사과해라.”
“못하겠습니다.”
“내가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대화가 순식간에 수평적인 분위기에서 수직적인 분위기로 변했다.
치프는 직위로 준후를 찍어 누르려고 하고 있었다.
“사과가 명령을 받아서 해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사과받을 사람은 혁재 선배가 아니라 저라고 생각하는데요.”
“하…… 너도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근데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기어오르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너 여기서 아무것도 안 배우고 갈 거야?”
“……혁재 선배한테 사과를 안 하면 술기도 안 가르쳐 주겠다고 협박하는 거죠?”
준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혁재도 제정신이 아닌데, 치프도 제정신이 아닌 건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과를 해야 한단 말인가.
하긴 혁재가 깽판 치는 것을 방관했다는 점에서 치프에게도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었다.
“협박이라기보다는 조언이랄까.”
“그 조언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약주를 두고 굳이 벌주를 택하시겠다? 좋아.”
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30분 있다가 2층에 있는 3번 CT실로 와. 척수 조영술 좀 하는 것 좀 구경해 보자.”
“그러시죠.”
볼일이 끝났으므로 준후는 당직실로 돌아갔다.
치프의 시선 때문인지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 * *
“치프 호출 있어서 CT실 갔다 올게. 곧바로 수술 어시스트도 있어서 자리 오래 비울 거다.”
당직실에 업무를 보던 준후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1년 차 대휘에게 말했다.
“선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저 사실…… 아까 선배랑 치프가 하는 이야기 엿들었거든요. 치프가 선배 기강 잡으려고 단단히 벼른 것 같던데.”
대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혁재 선배는 그렇다 쳐도 치프와도 사이가 뒤틀리면…… 선배가 많이 힘들지 않을까요?”
“대휘야.”
“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뭔지 알아?”
“그…… 글쎄요.”
“바로 내 걱정을 하는 거야. 괜히 나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집이나 잘 보고 있어.”
준후는 대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당직실을 떠나 2층 CT실로 이동했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준후는 단지 레지던트 2년 차라는 탈을 썼을 뿐.
그 속에는 펠로우, 아니 웬만한 신임 교수만 한 실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준후는 각종 무공에 통달했으며 선배와 교수들의 처치 및 수술들을 ‘초식’으로 저장해 두었다.
언제든지 펼쳐 볼 수 있게.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후의 머릿속에는 스승 재현의 액기스가 담긴 다양한 논문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솔직히 치프에게 배울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차라리 잘 됐어.
이 기회에 의국을 내 입맛대로 뜯어 고쳐주지.
……라고 준후는 각오했다.
“왔냐?”
준후가 CT실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치프가 아는 체를 했다.
말투가 겨울바람처럼 냉랭했다.
“조금 있으면 환자 들어올 건데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네.”
“MRI가 필요한 환자에게 왜 굳이 척수 조영술을 실시할까? 이유를 말해봐.”
“폐소 공포증이 있거나 기존에 허리 수술을 받아서 내부 고정물이 있기 때문이죠.”
“…….”
“지금 조영술 하는 환자는 후자입니다.”
“꼬투리 잡히긴 죽어도 싫었나봐? 공부 좀 하고 왔다?”
“원래 알고 있던 거였어요.”
준후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까불기는. 서울 본원에서 조영술 해본 적 있어?”
“아뇨. 없습니다.”
“그럼 오늘 직접 해보면 되겠네. 잘나신 분이니까 내가 안 가르쳐줘도 알아서 잘하겠지?”
“아뇨. 못하겠습니다.”
“엥? 이제 와서? 싱겁게?”
준후의 대답에 치프가 희죽희죽 웃었다.
준후가 백기를 들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척수 조영술.
이는 환자의 허리에 주삿바늘을 꼽은 뒤, 조영제를 투여하고, 방사선 촬영을 하는 검사였다.
과정 자체는 단순했지만 많은 레지던트가 두려움에 떠는 술기였다.
첫째로, 바늘을 정확한 부위에 천자하기 어려워서 한두 번의 실패는 기본적으로 깔고 갔다.
둘째로, 바늘을 잘못 찔렀다간 혈관이나 신경을 손상시킬 위험이 존재했다.
척수 조영술은…….
쉽게 말해 어렵고 위험한 시술이었다.
건방진 놈.
진작 꼬리를 내릴 것이지.
네가 아무리 잘 났어도 말이다.
한 번도 안 해본 척수 조영술을, 선배 도움도 없이 어떻게 성공하겠어? 크크크.
치프는 속으로 지금 상황을 고소하게 느꼈다.
“흠흠. 그럼 이 몸이 직접 시범을 보여줄까? 역시 혼자서는 무리겠지?”
“저기 치프…… 뭔가 단단히 착각하신 모양인데요.”
“응? 뭐가?”
이어지는 준후의 대답이 치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지금 들어오는 환자에게 척수 조영술 하면 안 된다고요. 생사람 잡을 일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