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제55장 제압(5)
준후의 지적에 치프는 코웃음을 쳤다.
이게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고 있어?
척수 조영술이 무서우면 무섭다고 할 것이지, 뜬금없이 환자 핑계를 대?
치프는 준후의 태도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야.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알고는 있어?”
“네.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낯짝에 철판을 까시겠다? 이 환자 말이다. 홍 교수님이 척수 조영술 오더 냈거든? 그럼 교수님이 틀렸다는 거냐?”
치프가 준후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준후가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말이 고울 수가 없었다.
“교수님도 사람입니다. 실수하실 수 있죠.”
“실수? 무슨 실수?”
“차트 한번 확인해 보시죠.”
준후가 CT실 한 켠에 놓인 업무용 컴퓨터로 이동했다.
척수 조영술 대기 중인 환자의 차트를 모니터에 띄웠다.
환자의 이름은 서용만.
나이는 56세.
1년 전 공사 현장에서 추락한 후 허리를 다쳐 척추 고정술을 받은 이력이 있었다.
“차트가 뭐가 어때서?”
“이 부분을 보세요.”
준후의 검지가 환자의 외래 기록지에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열흘 전 척수염이 의심되어서 긴급으로 요추천자를 실시했다는 기록이었다.
순간 하얗게 질리는 치프의 얼굴.
준후의 말이 옳았다.
-최근 2주 내에 요추 천자를 받은 환자에게 척수 조영술을 금지한다. 조영제로 인해 척수 내 염증 또는 압력이 상승할 수 있다.
이는 신경외과 교재에 적힌 내용이었다.
젠장!
이런 초보 같은 실수를!
치프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환자의 이력을 좀 더 자세히 살폈어야 했거늘…….
교수가 내린 오더라서 의심 없이 믿어버렸다.
만약 준후의 지적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환자의 허리는 더욱 악화되었을 테고 그 무거운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짊어졌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제가 조영술을 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치프는 고개를 돌려 준후의 패기 넘치는 눈빛을 흘려냈다.
치프의 얼굴은 어느새 수치심으로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이런 그림을 바란 건 결코 아니었다.
“너 제법 꼼꼼하다? 시술 전에 환자 외래 기록지까지 확인하고? 교수님이 내린 오더면 보통 그냥 따를 텐데.”
“환자를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한 번 더 보게 되니까요.”
“얼씨구. 명의 나셨네. 명의 나셨어.”
드르르륵.
때마침 환자복을 입은 환자가 CT실로 입장했다.
“거 참.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사람은 더럽게 오래 기다리게 하네. 이봐요. 검사고 뭐고 빨리빨리 좀 합시다. 당신들 시간만 중요하고 내 시간은 안 중요해?”
투덜거리는 환자를 보며 치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의 성질이 괄괄해 보였다.
우선 입담이 솔직하면서 걸쭉했다. 체구는 씨름선수처럼 우람했고 코끝이 빨갰다.
쉽게 말해서 힘 좋고 술 잘 마시는 다혈질로 보인달까.
문제는 저 환자에게 병원 쪽에 실수가 있었다고,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 한다고 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설명을 할 때 벌어질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치프는 벌써 끔찍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준후가 살갑게 웃으며 환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글쎄. 난 안녕 못하겠는데?”
“검사 기다리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일단 앉으시겠어요?”
“그럴까? 요새는 서 있는 것도 힘들어서 말이야.”
환자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고 준후는 환자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목하고 어깨 근육이 많이 뭉쳐계신 것 같네요.”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
“의사니까 알죠.”
“그게 그렇게 되나?”
“검사 전에 간단하게 마사지부터 해드릴게요.”
“엥? 웬 마사지? 빨리 검사나 합시다. 나도 바쁜 몸이야.”
“잠깐이면 됩니다. 속는 셈 치고 받아보세요.”
준후가 야무진 손길로 마사지를 시작했다.
환자의 목과 어깨를 주무르고 뭉친 근육을 손가락으로 둥글게 문지르고.
중지를 접자 튀어나온 손가락뼈로 환자를 쿡쿡 지압하기도 했다.
환자를 맨입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나름 서비스(?)를 펼치는 모습이었다.
어휴. 한심한 놈.
저런 허접한 마사지로 환자 화가 풀리겠어?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치프는 속으로 혀를 잤다.
그런데 놀랍게도 준후의 마사지는 효과가 굉장했다.
“환자분,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죄송하게도 저희 쪽 실수가 있었거든요.”
“…….”
“오늘 받기로 한 검사는 사실 일주일 뒤에 받으셔야 했어요.”
“그래서?”
“일주일 뒤 병원에 다시 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도 제가 책임지고 마사지해드리겠습니다.”
준후의 말에 치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본론을 꺼냈으니 환자가 활화산처럼 폭발한 일만 남았으니까.
그런데 웬걸?
동네 건달처럼 소란스럽게 굴 줄 알았던 환자는 의외로 성인군자처럼 굴었다.
치프로서는 상상도 못 할 반응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지.”
환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으로 원을 그렸다.
팔도 360도로 빙빙 돌렸다.
“젊은 친구가 마사지 한 번 끝내주네. 내가 유명하다는 마사지 샵은 다 가봤는데 자네만큼 마사지를 잘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
“몸이 한결 유연하고 쌩쌩한 게 회춘이라도 한 기분인걸?”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다음번에 왔을 때 마사지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오늘은 조용히 가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됐어.”
환자가 수액 걸이를 끌고 CT실을 떠났다.
시한폭탄이 해체된 것처럼, 치프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긴장해서 꼿꼿했던 팔다리가 부드럽게 풀렸다.
“서준후, 이제 보니 환자 구워삶는 솜씨가 일품이다? 아주 특급 요리사인데.”
“병원 생활 잘하려면 필살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죠.”
“근데 마사지를 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저 괄괄한 환자가 순순히 물러났냐?”
“조영술 끝나면 알려드릴게요.”
준후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10분이 지난 후.
두 번째 환자가 CT실에 도착했다.
환자가 검사대에 누워서 새우처럼 허리를 구부렸다.
준후는 환자의 허리를 소독한 후, 그 위에 방포를 덮고 카테터를 손에 쥐었다.
“근데 조영술 진짜 안 가르쳐도 되겠어?”
치프가 준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준후를 향한 반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치프는 본능으로 느꼈다.
준후가 프로 일잘러(일 잘하는 사람)고 준후를 적으로 돌리면 오히려 자신이 피곤해질 것임을.
“네. 필요 없어요.”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면서 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건데?”
“더 어려운 처치도 해봤으니까요. 조영술 시작할게요.”
준후의 손놀림은 전광석화였다.
푸우우욱!
주삿바늘이 환자의 4-5번 요추 사이를 찌르고 들어갔다.
바늘의 각도는 천자하는 면과 정확하게 수직을 이루었다.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준후의 손은 떨림이 없었다.
피부를 꿰뚫고 들어가는 바늘의 길이 또한 5센티미터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신경과 혈관을 건드리지 않는 절묘한 거리 조절.
치프 본인이 조영술을 한다고 해도 준후만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준후의 조영술은 완벽했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교재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환자분 이제 엎드리세요. 조영제 투여하면 허리가 화끈거릴 텐데요.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니까 걱정마시고요.”
준후가 환자 허리에 놓여 있던 방포를 치웠다.
허리 촬영은 방사선사의 몫이었기에, 두 사람은 촬영실 바깥으로 나왔다.
“준후야.”
치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준후를 불렀다.
“네. 치프.”
“앞으로 계속 혁재한테 반말해도 좋다. 하긴 혁재 새끼는 욕먹어도 싼 놈이지.”
치프는 준후에게 붙어먹기로 결심했다.
* * *
저벅. 저벅.
조영술을 마친 준후가 3층 복도를 걷고 있었다.
대전으로 파견 나온 후.
처음으로 수술 어시스트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최고의 정치는 역시 실력이지.’
혼잣말을 되뇌며 준후는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치프는 자신의 군기를 잡고 싶었던 모양인데 어림도 없었다.
군기를 잡으려면 치프가 준후보다 아는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아야 한다.
하지만 준후는 까마득하게 오래전에 치프의 레벨을 뛰어넘었다.
심지어 지금은 펠로우와 신임 교수의 수준을 넘보고 있었다.
둘의 싸움은 시작부터 성립이 되지 않았다.
격투기로 따지면 체급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레지던트 쪽은 대충 서열 정리가 된 것 같은데. 이제 남은 건 교수 쪽인가?
준후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대전 의국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과장 시덕과 부교수인 훈식의 문제부터 시급하게 정리해야 했다.
아랫물이 맑아진다고 해도.
윗물이 더러우면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수술실로 향하는 동안 준후는 이번 수술의 집도의인 훈식을 떠올렸다.
어제 간호사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도 그렇고.
오전 컨퍼런스 때 수술비 운운하는 태도도 그렇고.
척수 조영술을 하면 안 되는 환자에게 척수 조영술 오더를 내린 것 등등.
훈식은 썩은 우물 같았다.
퍼내고 퍼내도 더러운 소식만 들려왔다.
그러니 손 봐야 할 사람은 과장이 아니라 훈식이었다.
다만 문제는…….
준후의 신분이 아직 레지던트라는 점이었다.
레지던트에게 교수는 하늘이었다.
그 누구도 하늘과 싸워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고민해 보자.
방법이 없지는 않을 거야.
뒤가 구린 인간일 테니까 반드시 약점이 있겠지.
수술실에 도착한 준후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계수대였다.
벅. 벅. 벅.
소독액을 묻힌 솔로 손과 손가락, 팔뚝을 문지르면서 준후는 환자의 질환을 상기했다.
환자는 경추(목뼈) 척수증을 앓고 있었다.
이는 디스크와 헷갈리기 쉬운 질환인데.
목 디스크가 말초 신경을 압박한다면, 경추 척수증은 중추신경을 압박했다.
특히 환자의 근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는 특징이 있었다.
디스크는 약물과 휴식으로 치료되는 경우가 많지만, 경추 척수증은 수술로 치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추·요추 수술은 상대적으로 어시스트 경험이 부족했기에 준후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3번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수술방 공기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늘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알싸한 알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환자 감시 장치가 규칙적인 기계음을 흘려댔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무영등 불빛 아래, 환자는 수술대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뒷목을 열어야 해서 prone position(복와위, 엎드려 누운 자세) 체위를 하고 있었다.
“수술 준비는 다 끝났어? 도와줄 건 없니?”
물품실에서 드레싱 카트를 끌고 나오는 신경외과 인턴에게 준후가 물었다.
“아뇨. 방금 막 물품 준비랑 전신 마취까지 끝났어요.”
“그래. 고생 많았다.”
“고생은 선생님이 더 하실 텐데요.”
인턴이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의미야?”
“모르는 게 약일 것 같아서 말씀 안 드릴게요. 하여간 그런 게 있어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인턴이 떠났다.
잠시 후 소독 간호사가 합류했다.
이제 집도의인 부교수 훈식만 오면 되거늘…….
훈식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오전 11시에 수술 시작인데 11시 20분이 되어도 코빼기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준후는 슬슬 마음이 급해졌다.
평소답지 않게 다리를 떨었다.
마음속의 심지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선생님. 교수님한테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전화라도 해봐야 하지 않나요?”
준후의 질문에 소독 간호사 혜연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선생님은 홍 교수님 수술이 처음이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