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제56장 진상(1)
“아…… 선생님은 홍 교수님 수술이 처음이시구나.”
혜연의 말에서 준후는 ‘처음’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준후에게는 처음이지만 혜연에게는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홍 교수님이 자주 지각하나 보죠?”
“대략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 확률하고 같죠.”
“절반이네요. 지각하시는 이유는 아세요?”
“그걸 알면 답답하지도 않죠. 확실한 건…….”
“확실한 건?”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지각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혜연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자포자기하는 듯한 제스처였다.
더 할 말이 없어서 준후는 침묵을 지켰다.
한 박자 늦게 황당함이 밀려왔다.
학교 수업이나 직장 생활도 아니고 환자의 목숨이 달린 수술에 지각을 하다니…….
훈식의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은 역시 대단한 곳이네요. 항상 제 예상을 뛰어넘어요.”
말을 하면서 준후는 벽시계를 응시했다.
현재 시각은 11시 30분.
수술 시작 시간이 벌써 30분이나 초과되었다.
30분.
사람 한 명을 살리기에 충분한 황금 같은 시간이 물처럼 버려지고 있었다.
준후는 슬슬 황당함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훈식은 외과의 자격이 없었다.
적어도 준후가 아는 사람 중에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연락 없이, 수술에 지각한 서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열 받은 준후의 머리 뚜껑이 열리기 직전.
지이이잉.
수술방 문이 열리고 훈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훈식은 산책 나온 동네 아저씨처럼 느릿하게 수술대 앞에 섰다.
“수술 준비는 다 끝났지?”
“네. 끝났습니다.”
혜연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후, 넌 왜 대답이 없어?”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
‘조만간 당신을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이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준후는 가까스로 참았다.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별거 아닙니다.”
“싱거운 자식. 그나저나 잘 몰랐는데 너 꽤 유명인사더라?”
훈식이 준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는 길에 서울 과장하고 통화했는데 전적이 화려하던걸?”
“…….”
“1년 차에 각성 수술 어시스트도 하고 루뻬만 쓰고 미세 혈관 수술을 하고 심지어 100만 뉴튜버라지?”
“네.”
“내 맘에 쏙 드는군. 앞으로 잘해보자고.”
훈식의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경추 수술 어시스트 경험은 있나?”
“많지는 않습니다.”
“없는 건 아니네? 그럼 네가 수술 부위까지 접근해 봐. 이런 기회, 흔치 않으니까 감사하라고.”
훈식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준후가 모를 리 없었다.
수술 부위에 접근하는 과정은 일종의 허드렛일이었다.
난이도가 낮으면서 손은 많이 갔다.
훈식은 준후에게 하기 싫은 처치를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준후는 흔쾌히 수락했다.
훈식의 의도와는 별개로 준후는 수술에서 자신의 지분을 많이 가져가고 싶었다.
수술 경험치를 쌓기 위해서였다.
“좋아. 시작해 보라고. 내가 꼼꼼하게 봐줄 테니까.”
“네. 교수님.”
스으으윽.
스으으윽.
준후는 환자의 목을 소독하고 그 위에 방포를 덮었다.
딸칵!
10번 블레이드를 칼대에 꽂았다.
절개할 부위를 내려다보는 준후의 눈빛이 비장했다.
훈식의 지각으로 잃어버린 30분.
그 황금 같은 시간을 준후는 자신의 솜씨로 되찾을 작정이었다.
무공을 사용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우선 만화공부터 펼쳤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되어 전신을 휘어 감았다.
동시에 시각, 미각, 청각, 촉각, 미각의 오감이 몇 배로 뻥튀기되었다.
준후의 감각은 순식간에 인간의 범주를 초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후는 속도와 관련된 무공을 머릿속으로 몇 가지 정리해두었다.
선풍검(仙風劍).
준후의 손속이 번개와 같았다.
훈식과 혜연은 준후의 손동작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공중에서 번쩍이는 메스의 궤적만 뒤늦게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준후의 일검(一劍)으로.
환자의 목에 3센티미터 길이의 절개창이 생겼다.
절개창은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일직선이었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스멀스멀 피가 흘러나왔다.
준후가 거즈로 피를 닦으며 말했다.
“정 선생님. 멍하니 있지 말고 절개창 벌려 주세요.”
“아. 네.”
혜연이 좌우로 벌린 절개창에 준후는 다시 한번 메스를 그었다.
반월참(半月斬).
번쩍!
반달 모양의 궤적이 허공을 수놓았다.
반월참은 쾌속의 세로 베기로 상대를 찌르듯이 베어내는 것이 특징이었다.
“야. 너 수술 너무 막 하는 거 아니야? 수술이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알아?”
준후를 지켜보던 훈식이 기어코 한마디 했다.
하도 평판이 좋아서 믿고 맡겼는데 준후의 절개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다가 신경하고 혈관까지 건드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직접 확인해 보시죠. 아무 이상 없습니다.”
“인마, 절개를 그따위로 하는데 이상이 없다고? 말도 안 되는…….”
훈식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투박해 보였던 손놀림과 달리 절개창은 깔끔, 그 자체였다.
메스는 정확하게 피하지방과 근막층까지만 갈라놓았다.
깊이 조절이 절묘했다.
보통은 신중하게.
최소한 메스를 서너 번은 움직여야 하거늘.
준후는 단숨에 목표를 이뤄냈다.
“제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아니. 없어 보이는군. 그래도 수술 속도가 너무 급해. 템포 조절은 해야 할 것 아니야.”
“왠지 수술 시간을 30분 정도 당기고 싶어서요.”
훈식의 지각을 은근히 꼬집으며 준후는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드레싱 카트에 놓여 있던 리트랙터(견인기)를 환자의 목에 설치했다.
좌로 4센티미터.
우로 4센티미터.
리트랙터로 절개창을 벌리고서 리트랙터 가장자리를 고정하기 위해 나사를 조였다.
끼이이익. 끼이이익.
작업하는 동안 준후의 양손은 날아다녔다.
손동작이 하도 빨라서 수술복 소맷자락이 펄럭펄럭 나부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수술대 위를 종횡무진 누비다 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허공을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준후가 쾌타수(快他手)의 묘미를 살린 덕분이었다.
쾌타수는 서씨세가에서 보유한 유일한 수법이었다.
거센 바람과 유유히 흐르는 물.
쾌타수는 이 두 가지의 이치를 함께 담고 있었다.
즉, 속도와 유연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무공이란 소리다.
덕분에 준후는 본래라면 3분은 걸렸을, 수술 전 처치를 10초 만에 끝냈다.
시야 확보가 끝나면서 하얀 목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손에 고속 모터라도 달았나?
어쩜 이렇게 빠를 수가 있지?
한편 준후의 압도적인 수술 속도에 혜연은 기겁하고 있었다.
수술 부위로 접근하는 과정이 본 수술보다 쉽다고는 해도 준후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소독 간호사로 일한 지 어언 4년.
날고 긴다고 하는 교수들조차 준후만큼 수술 전 처지가 빠르고 정확하지는 못했다.
준후는 속된 말로 인간이 아닌 듯 보였다.
“주…… 준후 선생님.”
혜연이 더듬거리며 준후를 불렀다.
준후의 양손에 벌써 다이아몬드 드릴이 들려 있었다.
“왜요?”
“선생님 혹시 양손잡이세요?”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리 양손잡이라도 주로 쓰는 손이 있고 보조하는 손이 있잖아요. 양손으로 후궁 절제술을 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지 않을까요?”
“전 양손 다 잘 씁니다. 주로 쓰는 손, 보조하는 손이 따로 있지 않아요.”
“보통은 안 그럴 텐데…….”
“전 보통이 아니니까요.”
준후의 대답이 자신만만했다.
그동안 준후가 보여준 활약이 있었기에 혜연은 뭐라고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다른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그게…….”
혜연은 부끄러워하며 진심을 털어놓았다.
“수술 속도, 조금만 더 늦춰주실 수 있어요? 제가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요.”
* * *
‘흐흐흐. 이거,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군.’
준후를 지켜보는 훈식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준후의 솜씨가 기대 이상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자신이 교육 중인 펠로우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앞으로 자신의 수술 어시스트에 준후를 말뚝으로 박아두면 좋을 듯했다.
힘든 처치를 알아서 척척하니 자신의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편했으니까 말이다.
훈식은 흐뭇한 표정으로 준후의 집도를 주시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다이아몬드 드릴이 굉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드릴은 척수를 감싸고 있는 평편한 후궁을 사정없이 깎아냈다.
슬러시처럼 고운 뼈 입자가 사방으로 튀었다.
준후가 양손으로 드릴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수술 진행은 2배로 빨랐다.
혜연도 덩달아 바빴다.
숨 쉴 틈이 없었다.
한 손으로는 썩션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생리식염수로 수술 부위를 irrigation(세척)했다.
건물 철거 현장에서 물을 뿌리듯 말이다.
“교수님. 후궁 절제술 끝났습니다.”
준후가 다이아몬드 드릴을 드레싱 카트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훈식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세 현미경에 눈을 가까이했다.
퍼펙트.
다른 단어는 필요 없었다.
예술품을 세공한 것처럼 후궁이 반듯하게 절제되어 있었다.
절제 범위는 정확했고 절제 부위의 단면은 깔끔했다.
두꺼워서 척수를 압박하던 황색인대도 최소한으로 제거해냈다.
경추 신경과 혈관의 손상?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늘 수술의 전반부는 의심할 나위 없는 대성공이었다.
“아주 훌륭해. 장갑만 안 끼고 있었으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군.”
“감사합니다.”
“양손을 아주 환상적으로 사용했어. 수술 속도가 너무 빨라서 걱정했는데 그렇다고 완성도가 떨어지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기대 많이 하지.”
훈식의 칭찬에 준후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신 선생도 수고했어.”
“네. 교수님.”
대답하는 혜연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팔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준후의 속도를 쫓아가느라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교수님. 집도 전에 수술포부터 교체하겠습니다. 뼛가루가 튄 부분이 있어서요.”
“그래. 그래. 눈치 한 번 빨라서 좋구만.”
수술포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던 준후의 눈이 이윽고 가자미처럼 가느다래졌다.
엎드려 누운 환자의 체위에서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던 것이다.
“교수님 집도 전에 환자 체위부터 살짝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훈식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혜연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수술 도중 문제가 생겼으면 모를까.
갑자기 체위를 바꾸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체위를 안 바꾸면 환자가 실명할 위험이 있습니다.”
“허…… 맹랑한 소리를 잘도 하는군. 목 수술에 실명을 운운하다니. 준후, 네가 안과의가 아니라 신경외과의라는 건 알고 있지?”
훈식이 빈정거렸다.
“준후 선생님. 교수님 앞에서 그런 소리 하시면 안 돼요. 빨리 사과드리세요.”
혜연까지 준후를 걱정하며 말했다.
하지만 준후는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옳은 말을 할 때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설령 상대가 교수라 할지라도.
“환자가 왜 실명할 수도 있는지…… 지금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