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제56장 진상(2)
“허튼소리라면 지금이라도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의국 생활이 편해질 테니까. 난 집도 중에 레지던트가 껴드는 건 딱 질색이거든?”
훈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준후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이제 막 자신이 수술을 하려던 찰나 준후가 얼토당토 않는 ‘실명’을 언급하며 수술의 맥을 끊어버렸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혜연은 준후와 훈식을 번갈아 바라보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고.
준후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뜨겁고, 차갑고, 미지근하고.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세 사람의 온도는 다 달랐다.
“두 분 다 이쪽을 봐주시겠습니까?”
준후가 환자의 머리맡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검지로 수술대의 머리 부분을 가리켰다.
“수술대가 뭐 어때서?”
“헤드 부분의 각도가 조금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답답한 녀석.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라고. 결론부터.”
“지금 환자의 왼쪽 눈이 머리 받침대에 깔려 있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환자 안구의 혈액순환이 정체되어 실명할 수 있습니다.”
준후의 설명에 훈식이 머리 받침대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과연 준후의 말대로였다.
수술대의 머리 부분이 정상 각도보다 살짝 낮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란 말인가.
“뭐야? 내 눈에는 별 이상 없어 보이는데?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환자 머리가 좌측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습니다. 고개도 살짝 앞으로 나와 있고요. 분명 고무 받침대에 눈이 압박받고 있을 겁니다.”
준후의 목소리는 여전히 확신에 차 있었고 그 점은 훈식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레지던트가 교수 앞에서 이만한 깡을 보이는 케이스는 극히 드물었다.
“신 간호사가 보기에는 어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괜찮다고 생각하고 보면 괜찮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보면 이상한 느낌이라서요.”
“으음…… 귀찮게스리.”
훈식이 한숨 섞인 혼잣말 내뱉었다.
준후의 말이 사실이라면 환자가 실명할 가능성은 분명 존재했다.
수술대 머리 부분에는 고무 받침대에 놓여 있었다.
마사지를 받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마사지 샵에서 엎드려 누울 때, 머리를 쏙 집어넣는 고무 틀을.
그 고무 틀은 경추 또는 요추 질환 환자의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서 수술장에서도 사용됐다.
그런데 만약 머리가 고무 틀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채 돌출부에 짓눌려 오랫동안 압박당한다면 충분히 실명이라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비록 훈식의 의사 생활에서.
그리고 다른 논문에서 그런 케이스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훈식이 준후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환자의 머리를 살짝 들어서 고무 받침대에 정상적으로 위치시키면 됩니다.”
“경추 수술 중에 환자 목을 들자고? 너 제정신이야? 가뜩이나 후궁이랑 황색인대를 절제해서 뼈와 근육이 약화된 상태인데…… 환자의 고개를 들자고?”
“그럼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준후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환자가 실명할 수도 있는 위기를 모른 척해야 합니까? 그러다 경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환자가 실명하면 말짱 헛수고입니다.”
“…….”
“욕은 욕대로 먹고 의료 소송까지 걸리겠죠.”
소송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훈식이 몸을 움찔거렸다.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근데 준후 쌤.”
잠자코 있던 혜연이 대화에 껴들었다.
“준후 쌤 말은 환자의 눈이 고무 받침대에 눌려 있다는 걸 전제하는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괜한 위험만 가지고 가는 거 아닌가요?”
“전제가 아니라 팩트입니다. 확인해 보면 알아요.”
“정말 선생님 믿어도 되죠? 환자 머리 들었다가 아무 밀 없으면 진짜 큰일 나요.”
혜연이 훈식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이번 사태를 수습 못 하면 준후가 훈식에게 된통 당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스태프들은 못 볼지언정 준후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환자의 머리 각도와 고무 받침대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간격 차이’를.
무림에서 준후의 목숨을 지켜낸 것은 어떻게 보면 검이 아니라 눈이었다.
즉, 동체 시력이었다.
상대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
검과 자신의 거리.
이를 눈으로 포착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야 했으니까.
덕분에 지금 준후의 눈은 선명하게 보고 있었다.
환자의 눈이 고무 받침대로부터 1센티미터 위에 위치해 있음을.
고무 받침대에 환자의 눈이 짓눌려 있음을.
“교수님. 제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환자의 머리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때 고무 받침대에 위치를 조정해 주십시오.”
“하아…… 빌어먹을. 아침부터 일진 한 번 더럽네. 만약 문제가 생겨도 네 탓이고. 문제가 없어도 네 탓인 건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해봐.”
마침내 훈식의 허락이 떨어졌다.
‘실명’이 주는 불안과 공포를 결국 떨쳐내지 못한 것이다.
준후는 양손으로 환자의 아래턱을 받쳤다.
거북이처럼 느릿한 속도로.
환자의 턱을 서서히 치켜들었다.
호월 십이수를 8성까지 익힌 덕분일까.
준후의 손은 떨림이 없었다.
팔은 마치 마네킹 같았다.
힘 조절이 섬세해서 환자의 턱을 급하게 치켜드는 실수를 범하지도 않았다.
환자의 경추를 손상시키지 않는.
그야말로 안전의 끝판왕 같은 견인술이었다.
“…….”
“…….”
준후의 행동 하나하나에 환자의 실명과 경추가 달린 만큼.
수술방 공기는 무겁고 고요했다.
훈식과 혜연은 침조차 삼키지 쉬이 삼키지 못했다.
삐이이. 삐이이.
환자 감시 장치만이 눈치 없이 기계음을 떠들어댈 뿐이었다.
준후와 느릿한 활약 속에.
환자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기 시작했다.
운동장처럼 훤한 이마가 먼저 드러났다.
그다음이 갈매기 눈썹이었고.
오늘의 주인공인 눈이 3번 타자로 등장했다.
“허…… 믿을 수가 없군.”
“정말 환자 눈이 눌려 있었네요. 대박이에요. 준후 쌤.”
훈식과 혜연이 동시에 감탄했다.
준후가 예언한 대로 환자의 왼쪽 눈은 고무 받침대에 눌려 있었다.
왼쪽 눈꺼풀에 무지개 형태의 눌린 자국이 도장처럼 선명하게 새겨졌던 것이다.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1) 수술대 머리 부분의 고정이 살짝 풀렸다.
2) 1의 원인으로 수술대의 머리 부분 각도가 낮아졌다.
3) 덩달아 환자의 고개 각도도 낮아졌다.
4) 각도 차이가 생긴 탓에, 환자의 머리가 잠깐 미세하게 들리면서 눈 부분이 고무 받침대 중 이마 부분에 깔리게 되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고무 받침대 위치부터 조종해 주세요. 빨리요.”
“네. 선생님.”
혜연이 고무 받침대의 위치를 기존보다 1센티미터가량 위로 올렸다.
이에 준후가 조심스럽게 환자의 고개를 고무 받침대 안으로 쏙 밀어 넣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 * *
“준후 쌤 눈썰미가 진짜 경이롭네요. 고개가 고작 몇 센티미터 내려간 걸 어떻게 알아차리셨어요?”
혜연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과 훈식은 미처 보지 못했던 환자의 변화를 준후는 완벽하게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훈식 앞에서도 당당히 본인의 의견을 주장했다.
레지던트 2년 차답지 않은 눈부신 활약이었다.
“다른 걸 몰라도 시력으로는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거든요.”
“흠흠. 그래. 아주 잘했다. 환자의 고개를 들어 올린 견인술도 아주 탁월했어.”
“별말씀을요. 칭찬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렇다고 너무 우쭐하진 말고. 넌 아직 어리고 배울 것도 많아.”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지만 훈식은 십 년 감수한 기분이었다.
준후가 지적하지 않았다면.
환자의 머리는 계속해서 같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은 환자의 실명이라는 비극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안 그래도 환자에게 소송 걸린 수술이 2건이나 있었는데, 또 한 번 골머리를 앓을 뻔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수술 준비는 누가 했지?”
“인턴이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턴 이름은?”
“형진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달이 난 건…… 그 형진이란 녀석이 수술대를 제대로 고정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겠네?”
훈식의 눈썹이 산처럼 솟구쳤다.
“일이 워낙 바빠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용서? 환자가 실명할 뻔했는데 용서라고?”
준후가 언급한 용서라는 단어에 훈식이 경기를 일으켰다.
“이번 수술 끝나면 인턴보고 최대한 빨리 나한테 튀어 오라고 해. 따끔하게 혼내야 하니까.”
“하지만 교수님, 형진이도…….”
“그 입 다물어. 네 의견은 물은 적 없으니까.”
훈식의 강경한 발언에 준후는 혀를 찼다.
훈식은 본인의 허물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수술 시간에 30분이나 지각한 사람은 누구인가.
본인이 집도해야 할 수술의 절반을 준후에게 떠넘긴 사람은 누구인가.
훈식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저질렀다면 형진은 숨 쉴 틈 없는 인턴 수련 중 잠깐 방심해서 실수한 것에 불과했다.
책임의 무게를 따지자면…….
훈식 쪽이 몇 십 배는 더 무거웠다.
그런데 본인의 행동은 흘려넘기고 형진만 탓한다라…….
훈식의 인성은 오물이나 다름없었다.
“수술, 계속하지. 아직 후방 경추 유합술과 고정술이 남았으니까.”
“네. 교수님.”
“네. 교수님.”
훈식의 지도하에 나머지 수술이 진행되었다.
현재 환자의 경추는 후궁과 황색인대를 제거해서 불안정성이 높은 상태였다.
그래서 금속판과 나사못으로 경추를 고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드릴.”
훈식의 손에 의료용 드릴이 들렸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드릴이 굉음을 내며 회전했다.
환자의 경추 4번의 좌측면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뼛조각이 슬러시처럼 고운 입자로 갈려 나갔고, 준후는 썩션기로 뼛조각을 빨아들였다.
잠시 후…….
경추 4-5번 자리에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생겨났다.
훈식이 직사각형 구멍에 금속판을 댔다.
금속판에 의료용 나사를 박았다.
드르르륵.
나사가 360도로 회전하면서 뼛속 깊숙한 곳에 박혔다.
말로만 들었을 때 경추 유합술과 고정술은 쉬워 보일 수 있었지만, 이 수술은 사실 난이도가 높았다.
경추 수술의 꽃과도 같은 수술이었으니까.
하지만 준후의 눈엔 훈식의 수술 솜씨가 영 못 미더웠다.
서울에서 어시스트했던 교수들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드릴을 사용할 때 손목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금속판에 삽입하는 나사의 각도가 삐뚤어져, 애써 삽입한 나사를 다시 빼내고 박는 헛수고를 하기 일쑤였다.
집도를 하는 훈식의 이마에는 어느새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땀을 잘 흘리는 체질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수술이 감당하기 힘들어서일까.
준후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써전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훈식은 단연 최악의 부류였다.
-인성이 고약하면서 수술도 잘 못하는 서전.
준후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듯 위태로운 마음으로 훈식을 어시스트했다.
솔직히 자신이 직접 경추 수술을 해도 훈식보다 잘할 것 같았다.
그만큼 훈식은 형편없었다.
교수로서의 권위만 있을 뿐.
교수로서의 실력은 실종된 상태였다.
훈식이 30분 지각해서 까먹은 집도 시간을 준후가 30분 앞당겨 복구했건만.
훈식은 다시 30분을 까먹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수술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지이이잉.
수술방을 나온 후 훈식이 친한 척 준후에게 어깨를 둘렀다.
“준후, 너 아주 마음에 든다. 앞으로 내 수술에 자주 들어오도록 해. 내가 경추·요추 수술의 전문가로 만들어 줄 테니까.”
준후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웃었다.
뭐래? X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