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93화 (292/424)

293화

제56장 진상(3)

신경외과 컨퍼런스 룸.

훈식은 팔짱을 낀 채 의사 가운을 걸친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 신경외과 인턴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으으으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본인의 정강이를 쓸어내리기 바빴다.

“일 똑바로 안 하냐? 수술 준비가 그렇게 만만해? 너 때문에 내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답답한 새끼. 죄송할 일은 처음부터 하지를 말아야지. 고형진.”

“네. 교수님.”

“또 이러면 그땐 너 죽는다. 인턴 평가도 낙제점이야.”

훈식의 서슬 퍼런 협박에 형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겁에 질린 형진은 대답 대신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훈식은 그제야 만족스레 웃었다.

컨퍼런스 룸을 나와 미닫이문을 힘껏 닫았다.

쾅!

훈식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지하 1층 중식집이었다. 교수들이 평소 자주 찾는 회식 자리였다.

오늘의 방문 목적이 회식은 아니었지만.

점심시간이 지난 중식당은 한산했다. 빈자리가 대다수였고 홀 직원은 멍하니 TV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약속한 사람의 얼굴을 찾는 일이 쉬웠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나를 다 찾고?”

훈식이 자리에 앉으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를 바라보았다.

이시덕.

현 신경외과 과장이자 훈식의 의대 후배였다.

사적인 자리에서 훈식은 시덕에게 반말을 했다.

“꼭 일이 있어야 사람을 봅니까? 그냥 이유 없이 보고 싶을 때도 있는 거지.”

“거짓말하지 마. 넌 용건 없이 사람을 만날 위인이 못 돼.”

“일단 주문부터 하죠.”

시덕의 제안에 따라 늦은 점심 메뉴부터 주문했다. 시덕은 볶음밥, 훈식은 짬뽕이었다.

쪼르르르.

시덕이 훈식의 컵에 물을 따라 훈식에게 내밀고 본인 컵에도 물을 따랐다.

“먼저 보자고 하더니. 서비스가 좋네.”

“선배. 이런 거 엄청 따지시잖아요. 위계질서 같은 거.”

“인간이 됐든, 동물이 됐든, 곤충이 됐든 원래 서열과 질서야 있어야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거야.”

“…….”

“가시 면류관을 쓴 소감이 어때?”

훈식이 빈정거리며 물었다.

가시 면류관이란 과장 자리를 비유하는 말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던데요? 이게 권력의 맛인가 싶습니다.”

“쯧쯧쯧. 달콤한 음식에 이가 썩는 줄도 모른다더니.”

“근데. 선배.”

시덕의 눈매가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분위기도 180도 바뀌었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어서 훈식은 느슨해진 의식의 끈을 바짝 조였다.

시덕은 신경외과라는 왕국의 현재 국왕이었고.

훈식은 왕위의 복귀를 노리는 전대 국왕이었다.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후배가 의국 관리하는 거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왜 사사건건 시비를 거십니까?”

“시비라니 말은 좀 가려서 하지? 애초에 네가 일을 잘하면 내가 왜 태클을 걸겠어?”

“태클을 거실 거면 제발 상대편에게 거세요. 같은 편에게 걸지 말고. 제가 진료부원장님께 건의한 의국 개편안 말이에요.”

시덕이 물을 한 잔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거 선배가 잘랐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뭔 소리야. 나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진료부원장님하고 친하잖아요.”

“부원장님이 내가 구워삶는다고 삶아질 양반이니? 착각 좀 작작해라. 응?”

반박하면서 훈식은 속으로 낄낄낄 웃었다.

시덕의 불행은 곧 훈식의 행복이었다.

시덕이 똥볼을 차야 훈식이 다시 과장 자리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생할 거면 왜 분수에 안 맞는 과장을 달았어? 지금이라도 반납하던가.”

“누구 좋으라고요?”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되는구나. 넌 과장할 깜냥이 안 돼.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너만 모르고 있어.”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누가 뒤에서 방해하고 있어서겠죠.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세요.”

“하…… 이 새끼 또 버르장머리 없이 나오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안 참습니다. 참을 인(忍)도 이번으로 딱 세 번째예요.”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파바박,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어느 쪽도 먼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기 싸움의 줄다리기가 막상막하였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테이블에 음식을 내놓았을 때야 비로소 냉전이 끝났다.

이후 두 사람은 단 한마디도 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각자 계산하고 각자 식당을 떠났다.

식당을 나오면서 훈식은 가운 속 휴대폰을 꺼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진료부원장님. 지금 통화 괜찮으시죠?”

-…….

“네. 네. 그건 그렇고 이번 주말에 골프 괜찮으시죠? 부원장님하고 골프를 못 쳤더니 입에 가시가 돋을 지경입니다.”

-…….

“하하하. 네. 그럼 주말에 뵙겠습니다. 충성!”

통화를 끝낸 훈식은 스무 걸음 정도 앞서가는 시덕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놈.

요령 없이 이리저리 뛰어봐야 다 무슨 소용이니?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 건 윗대가리인데.

윗대가리 비위를 맞춰주지 못하니까 네가 아직도 그 모양 그 꼴인 거다.

사회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모두 비위가 좋은 사람이라고 훈식은 굳게 믿고 있었다.

* * *

후루룩. 후루룩.

컵라면 먹는 소리가 요란했다.

경추 척수증 수술을 마친 준후는 당직실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병원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준후의 주식(晝食)은 어느새 컵라면으로 변해 있었다.

면이 술술 들어가고 국물을 마시면 속이 뜨뜻해서 좋았던 것이다.

준후는 허기를 채우고 빈 용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드르르륵.

때마침 1년 차 대휘가 당직실로 돌아왔다.

“선배. 오셨어요?”

“오냐.”

“홍 교수님 수술 어시스트는 어땠어요?”

“최악이던데? 수술에 지각하는 교수님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준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훈식이 최악의 서전인 이유는 지각 하나만이 아니었다.

일단 실력이 없었다.

평소 어시스트를 하면 교수들의 수술법을 초식으로 암기해 머릿속에 저장하는 준후였다.

그런데 훈식에게서는 배울 게 없었다.

오히려 돌이 얹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서 자신이 직접 수술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 본인이 실력 좋은 서전인 것처럼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으며 스태프들을 대하는 태도는 무례했다.

“아니꼽지만 적응하셔야 할 거예요. 과장님이 계시긴 하지만 사실 의국에 실세는 홍 교수님이라…….”

“내 눈에도 그래 보이더라. 오전 컨퍼런스 때를 보니까.”

“어디 맞지는 않으셨어요?”

“응? 맞는다고? 홍 교수님이 스태프들을 때리기도 해?”

“아뇨. 그냥 해본 소리예요.”

대휘의 어색한 웃음을 준후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추궁에 들어갔다.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똑바로 말해. 어차피 숨겨도 나중에 다 들통나게 되어 있으니까.”

“아…… 알겠어요.”

대휘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대휘의 설명에 따르면 훈식은 손버릇도 안 좋다고 했다.

레지던트가 일을 못 하면 정강이를 걷어차고 심하면 뺨도 때린다고 했다.

훈식에게 아직도 실망할 밑바닥이 남았다는 사실에 준후는 혀를 찼다.

“그래서 선배는 특히 더 조심하셔야 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선배가 홍 교수님한테 안 맞았다는 건 선배가 일을 잘했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지.”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준후는 후궁절제술을 본인 손으로 집도했고 수술 시간을 30분 가까이 앞당겼다.

“홍 교수님은 일 잘하는 레지던트를 발견하면 먹잇감으로 콕 찍어요. 그다음에 자기 할 일을 맘에 드는 레지던트에게 폭탄처럼 넘겨요.”

“…….”

“선배 오기 전에 탈주한 2년 차 우성균 선배라고 있었거든요? 그 선배도 홍 교수님한테 찍히고 혁재 선배한테 신물이 나서 탈주한 거예요.”

“으음…… 그렇단 말이지?”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전 의국의 메인 빌런은 훈식이었다.

훈식을 처치하지 않는 이상.

대전 의국의 평화는 절대 찾아오지 않을 듯했다.

문제는 레지던트 신분으로 교수에게 손대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는 건데…….

“그래도 참고 견뎌야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대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혁재는 어때? 너한테 해코지 안 하든?”

“어제 준후 선배한테 당하더니 얌전한 양이 됐던데요? 저한테도 되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더라고요. 혁재 선배의 그런 모습 처음 봤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지옥을 맛보고 싶지 않으면.”

“하여간 준후 선배가 짱이에요. 혁재 선배가 고분고분해진 것만으로도 전 대만족이에요.”

“그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되지. 조금만 더 참아 봐. 홍 교수님도 내가 찍어서 보내 버릴 테니까.”

“홍 교수님을요? 그게 가능해요?”

되묻는 대휘의 목소리가 커졌다.

“쉿! 조용. 이건 너랑 나만 알고 있어야 돼.”

“네! 입 꾹입니다.”

대휘가 손으로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대화를 마치고 대휘가 당직실을 떠났다.

병동 라운딩을 돌 테니 준후에게 잠깐 당직실을 봐달라고 했다.

업무 책상에 앉아 준후는 메일 한 통을 보냈다.

수신자는 스승 박재현이었다.

메일 내용은 경추·요추 파트를 공부하고 싶으니 스승의 비급을 보낼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뇌종양 파트 뇌혈관 파트에 이어서 준후는 경추·요추 파트를 공부해 보고 싶었다.

해당 전공인 훈식의 실력이 못 미덥고 못마땅해서 그랬다.

훈식이 실수할 때 그 실수를 알아차리고 바로 잡을 사람은 준후뿐이었다.

‘해보니까 의외로 매력 있는 파트기도 했고…….’

준후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까 끝낸 경추 척수증 수술을 복기했다.

뇌수술과 달리 경추·요추수술은 터프한 구석이 있었다.

사용하는 수술 도구들도 하나같이 무시무시했다.

의료용 드릴, 금속판, 망치, 나사못, 드라이버 등등.

대부분 목공예에서 쓸 법한 것들이었다.

경추·요추 수술은 완력과 체력 같은 피지컬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준후는 그런 요소들을 벌써 갖추고 있었다.

스승의 비급만 달달 외운다면.

다른 파트보다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대전에서는 경추·요추를 마스터하기로 했다.

“벌써 왔어?”

당직실 문이 열렸기에 준후는 고개를 돌렸다.

대휘가 복귀한 줄 알았건만 인턴 형진이 당직실로 들어왔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형진의 모습에 준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다리는 왜 저니?”

“어…… 그게…… 뛰다가 뭐에 부딪혔어요. 제가 좀 칠칠맞은 성격이라서요.”

“바지에 시꺼멓게 뭐가 묻었는데? 너 혹시 홍 교수님한테 차였니?”

짚이는 바가 있어서 준후가 캐물었다.

형진은 우물쭈물하며 말하지 못했다. 시선을 피하며 준후의 눈치만 살살 봤다.

“이리 와서 앉아 봐. 교수님한테 이야기 안 할 테니까 사실대로 널어놓고.”

“네…….”

맞은편 의자에 앉은 형진의 입에서 끔찍한 진실이 드러났다.

수술대를 부주의하게 세팅한 잘못 때문에 형진은 훈식에게 수차례 정강이를 걷어차였다고 했다.

폭언까지 들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준후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추악한 인간.

본인은 게으름 피우고 수술 시간에 지각하면서.

숨 쉴 틈이 없어 바빠서 실수를 한 인턴은 쥐 잡듯이 잡아?

“가만있어 봐.”

준후를 허리를 숙이고 형진의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형진의 정강이가 혹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파바바밧.

준후의 손가락이 쏜살같이 움직였다. 형진의 정강이 근처에 있는 혈과 신경을 순식간에 점했다.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던 ‘진통 점혈’이었다.

“선배. 뭐 하신 거예요?”

“알 필요 없고 일어나서 걸어 봐.”

준후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본 형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지금은 하나도 안 아픈데요? 신기해요.”

형진의 들뜬 목소리에 준후는 쓰게 웃었다.

지금은 통증을 신기해할 때가 아니라 훈식에게 분노를 해야 할 때였기에.

“홍 교수가 워낙 이상한 사람이니까 너무 상처받지 마.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해.”

“네. 선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드레싱 하러 병동 가 볼게요.”

형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당직실을 떠났다.

준후는 형진을 지켜보다가 달력이 걸린 벽면으로 이동했다.

지금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30일이 지난 날짜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앞으로 30일 이내에.

반드시 훈식을 의국에서 쫓아낸다.

준후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