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제56장 진상(4)
“네. 선생님. 차트 확인하고 바로 갈게요.”
병동 간호사와 통화를 마치고 준후는 업무용 책상에 앉았다.
방금 막 마취통증의학과 병동에서 신경외과 병동으로 온 환자의 차트를 살폈다.
차주원.
나이는 27세.
환자의 진단명을 확인한 순간,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희귀 질환을 겪는 환자를 처음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의문.
이 질환을 수술로 고칠 수 있다고?
이상한 마음에 확인해 보니 담당 교수가 홍훈식 교수였다. 훈식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었다.
준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주원이 있는 병실을 찾았다.
주원의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곁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보호자가 있었고 주원은 심술 난 표정으로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흘러드는 햇살에 주원의 얼굴 반쪽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주원은 깔끔한 스포츠머리를 했고 체구가 깡말랐다. 팔다리가 가늘어 젓가락 같았다.
“안녕하세요. 주원 씨 주치의를 맡은 서준후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주원이 엄마예요.”
준후의 인사에 보호자가 웃으며 화답했다. 반면 주원은 무채색인 표정으로 준후를 빤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주원아. 빨리 선생님한테 인사해야지.”
보호자의 재촉에 주원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 씨 많이 힘들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아무도 몰라요. 혹시 선생님은 제가 꾀병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주원이 따지듯이 물었다.
주원의 병명은 CRPS.
복합통증증후군으로 주로 외상 후 발생하는데 원인 불명이고 치료 또한 불가능한 병으로 알려져 있었다.
주원의 경우.
군대 하사로 복무 도중 산비탈에서 굴러떨어진 후부터 CRPS가 발병했다고 한다.
“그런 생각은 전혀 한 적 없는데요. 혹시 주원씨에게 꾀병 부리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나요?”
“군대에서는 귀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들었고 몇몇 대학병원에서도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경솔했네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준후는 주원의 편을 들어주었다.
복합통증증후군은 명쾌하게 정해진 진단 기준이 없었다.
병원마다, 의사마다 결론이 다 달랐다.
그래서 주원이 경험한 것처럼 꾀병을 부린다는 끔찍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신경외과에서 수술하면 상태가 호전될 수 있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수술을 받죠?”
“교감 신경 차단술이라는 걸 할 겁니다. 한 마디로 아픔을 느끼는 신경 길을 막아버리는 거죠.”
“효과는 있어요?”
주원을 실망시키기는 싫었지만 준후는 진실을 꺼내놓았다.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예요?”
주원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마에는 지렁이 주름이 잡혔다.
“효과를 본 환자도 있고 효과가 없었던 환자도 있다는 말이에요. 안타깝지만 환자의 케이스에 따라 달라요.”
“하…… 또 지긋지긋한 희망 고문이네요.”
주원이 한숨 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낙담하는 주원의 모습에 준후도 가슴이 아팠다.
일반적인 질환이라면 모를까.
CRPS 같은 원인 불명의 불치병은 준후로서도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준후가 가장 피하고 싶고, 가장 두려워했던 무기력이라는 감정이 슬슬 고개를 들었다.
“효과가 없는 수술이면 그냥 안 받을래요. 더 아프긴 싫어요.”
“주원아. 약한 소리 하지 마. 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싫어! 안 해! 못 해! 내가 더 이상 얼마나 더 견뎌내야 하는 건데? 나 그냥 스위스 보내 달라고.”
주원이 울부짖듯이 쏘아붙였다.
“너 또 엄마 가슴 찢어지게 그런 소리 할 거야. 네가 없으면 엄마는 어떻게 살라고. 응?”
“내가 없어야 엄마도 편해…….”
“잠시만요. 그만 진정하시고 제 앞에서는 싸우지 마세요.”
준후가 대화에 껴들었다.
두 사람 다 감정이 심각할 정도로 격해져 있었다.
상황을 방치했다간…….
서로의 혀로 서로의 가슴에 날카로운 상처만 새겨 넣을 것이다.
다행히 준후가 절묘한 타이밍에 끼어든 덕분에 모자의 상태는 최악 직전에 봉합되었다.
“어머님. 잠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시겠어요?”
준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보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갔다.
한 사람이 아프면.
그 가족도 함께 아픈 거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주원 씨.”
“…….”
“주원 씨?”
주원과 대화하려던 준후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주원의 목덜미가 어느새 축축해졌다. 얼굴은 일그러졌으며 양손으로는 왼쪽 허벅지를 붙여 잡았다.
“아으으윽! 선생님. 너무 아파요. 다리가 불에 타는 것 같아요. 칼에 베이는 것 같아요.”
주원이 얼굴을 구기며 고통을 호소했다.
복합통증증후군 발작이 시작된 것이다.
환자에 따라 다르지만 주원은 때를 가리지 않고 통증에 시달리는 듯했다.
“진통제 좀 놔주세요……. 센 걸로요. 제발…….”
“진통제는 사용해드릴 수 없어요.”
준후는 주원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선을 그었다.
아까 차트를 통해 확인했다.
마취통증의학과에서 이미 하루 허용량의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했음을.
마약성 진통제를 계속 추가한다면 주원은 진통제에 중독되고 말 것이다.
“으으으. 아프다고요! 죽을 것 같다고요! 대학병원 의사가 왜 그렇게 무능해요?”
절규하는 주원을 치켜보며 준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준후도 주원처럼 고통에 치를 떤 적이 있었다.
무림맹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천마교에게 인질로 끌려가 갖은 고초와 고문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준후는 끔찍한 비명을 입에 달고 살았다.
차라리 죽여달라며 천마교도들에게 애걸복걸했다. 죽음보다 깊은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환자를 위해서 눈 딱 감고.
마약성 진통제를 한 번 더 투여하느냐.
아니면 환자를 모른 척하느냐.
심각하게 고민하던 준후는 제3의 길을 택했다.
“잠깐, 가만있어 봐요.”
주원의 환자복 바짓단을 들어 올리고 준후는 진통 점혈을 펼쳤다.
팟! 팟! 팟!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이어진 혈맥이란 혈맥은 내공으로 원천봉쇄해 버렸다.
환처럼 뭉친 내공으로 혈맥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골, 경골, 좌골 신경이 지나가는 자리를 내공으로 일시적으로 차단했다.
“뭐…… 뭐예요? 아까보다는 참을 만한 것 같은데.”
주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준후를 응시했다.
첫 통증의 수치가 10이라면 준후의 손길이 닿은 이후에 통증 수치는 6 정도로 줄었다.
그나마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으으으으.”
하지만 통증이 줄어들어서 신기했던 것도 잠시뿐.
생쥐가 다리를 갉아먹는 것처럼 왼쪽 다리 전체가 고통스러워졌다.
주원은 이를 악물고 두 주먹도 힘껏 쥐었다.
또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주원 씨, 잠깐 잡시다.”
준후가 한 손으로 주원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주원의 목덜미를 수도로 내리쳤다.
탁!
스르륵.
주원의 눈꺼풀이 감겼다.
힘이 잔뜩 들어갔던 팔다리는 축 늘어졌다.
준후는 주원의 목에 베개를 받쳐주고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내공으로 혈맥과 신경을 일시적으로 차단했지만.
효과는 예상외로 미미했다.
진통 점혈로 CRPS를 상대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잠든 주원을 내려다보며 준후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무림에 준후는 무림맹 무사들의 도움을 받아 마교도의 고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주원은 아니었다.
CRPS를 완치하지 않는 이상.
평생 고문과 같은, 감옥과 같은 통증에 갇혀 있어야 했다.
즉, 주원의 처지는 무림에 준후보다 훨씬 가혹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신경 차단술도 별 효과가 없을 게 분명해.
그렇게 되면 주원 씨가 다시 한번 실망하겠지.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
준후는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자신을 휩쓸어 버리려고 하는 무기력의 파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선생님. 주원이 잠들었나요?”
침상으로 돌아온 보호자가 벌건 눈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화장실에서 펑펑 울고 온 듯했다.
주원의 심정이 이해가 가고 보호자의 심정도 이해가 가서 준후의 가슴은 곱하기로 아팠다.
“내심 많이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죄송해요. 원래 이렇게 예민한 아이가 아니었는데 다치고 나서는 성격이 딴판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원래 아픈 사람은 주변을 살피기 힘들어요. 그래서 아픈 사람을 살피기 위해 의사가 있는 거죠.”
“선생님은 말을 정말 곱게 하시네요.”
“아직 어리긴 하지만 나름 고생을 많이 해봐서요.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면 간호사를 통해 연락하시고요.”
“네.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병실을 나서면서 준후는 각오를 굳혔다.
현대 의학이 CRPS를 완치시킬 수 없다면 최후의 보루는 역시 무공뿐이라고.
* * *
“흐으으음”
주원은 신음을 흘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CRPS 발작이 덮쳐와 고통받다가 준후의 손길이 닿은 후 통증이 줄어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근데 그 이후의 기억을 통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진 것 같았다.
참 기묘했단 말이지…….
통증이 갑자기 줄어든 것도 그렇고. 아픈 와중에 기절한 것도 그렇고.
난생 처음 겪은 경험을 음미하며 주원은 침상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자신의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염병할 다리가 지금은 또 멀쩡했다.
주원이 군대 상사와 군의관.
몇몇 병원의 의료진에게 꾀병 또는 정신 질환자 취급을 받은 것도 다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우리 주원이 일어났니?”
졸린 닭처럼 고개를 꾸벅거리던 어머니가 주원이 깬 것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엄마. 아까는 미안했어.”
“엄마는 괜찮아.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도 그러더라. 아픈 사람은 원래 주변 사람을 못 챙긴다고.”
“그래도 내가 엄마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지. 엄마가 나 때문에 뼈 빠지게 고생해 왔는데.”
주원이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주원의 아버지는 폐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때 주원은 초등학교 5학년에 불과했다.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어머니는 홀몸으로 주원을 키우느라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아침에는 신문을 나르고 오후부터 저녁 늦게까지 식당을 나갔다.
그러면서도 힘든 내색은 단 한 번도 비추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기 위해 주원도 구슬땀을 흘리며 노력했다.
언제나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적어도 악마 같은 CRPS가 찾아오기 전까지.
모자의 삶은 그럭저럭 단란하고 행복했다.
“나 수술받을게.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해볼게.”
“장하다. 장해. 우리 아들. 엄마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니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어머니가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주원이 입원한 후부터 어머니는 종교를 가졌다.
엄마…… 근데 신은 없어.
신이 있다면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을 리 없잖아? 덩달아 엄마까지 고통받을 이유도 없고.
그러니까 신은 없거나 죽었어.
만에 하나라도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심술 고약한 나쁜 놈이겠지.
어머니에게는 미안했지만 주원은 신을 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