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295화 (294/424)

295화

제56장 진상(5)

열흘이란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그동안 준후는 대전 신경외과 의국에 서서히 젖어 들었다.

스태프가 압도적으로 부족했으므로 업무는 산더미처럼 많아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래서 여유다운 여유와 휴식다운 휴식은 오로지 당직 근무를 설 때만 음미할 수 있었다.

당직 시간에 준후는 의학 지식을 공부했다.

스승 박재현이 보내 준, 경추·요추 자료를 암기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마우스 휠이 거침없이 내려갔다.

언뜻 보면 건성으로 문서를 읽는 것 같았지만 천만의 말씀!

준후는 그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정독하고 있을 뿐이었다.

점혈법을 이용한 신경 자극술.

그러니까 내공으로 언어의 독해와 이해를 담당하는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을 활성화 시킨 후 자료를 보면 준후는 초인적인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레지던트 2년 차임에도 준후의 의학 지식이 펠로우와 교수에 근접한 비법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경추·요추 파트 공부는 보통 새벽 3시쯤에 끝났다.

시간에 맞춰 준후는 당직실 한구석에서 경건하게 가부좌를 틀었다.

매일 1시간씩 명상을 했다.

명상의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무공과 내공으로 완치하는 CRPS(복합통증증후군)」

CRPS로 고통받는 주원이 눈에 밟혔던 것이다.

무림에서 주원과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에, 준후는 결코 주원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물론 무공과 내공이 사기적인 능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만능은 아니었다.

무공과 내공으로도 CRPS를 치료하는 길은 멀고 험했다.

CRPS는 ‘왜’ 발생하는가.

‘어떻게’ 하면 CRPS를 치료할 수 있는가.

두뇌에 존재하는 모든 신경 세포를 쥐어 짜보아도 원하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치료에 적합한 무공도 미궁에 빠져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초절정이라는 경지에서 오랫동안 헤맸을 때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멈춰 있다는 것은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무기력한 상태라는 뜻이었다.

준후는 여전히 무기력이 싫고 두려웠다.

싹 지워 버리고 싶은 것이었다.

-서 선생님은 로봇이에요? 어떻게 병동 복도를 맨날 뛰어다녀요? 피곤해 보이는 기색도 없이?

이것은 병동 간호사의 감탄이었고.

-넌 정말 괜찮냐? 계속 이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니야? 당직 근무만 벌써 일주일째인데?

이것은 치프의 걱정이었고.

-더 이상은 못 보겠어요. 선배, 이젠 저도 당직 설게요.

이것은 1년 차 대휘의 염려였다.

준후가 남들보다 빠르고, 남들보다 일을 많이 하자 주변에서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하지만 스태프들은 준후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운기조식과 영양제 조합으로 준후의 체력과 정신력과 집중력이 항상 균일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일이 많더라도 그게 감당할 정도의 양이라면 수련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제로 준후의 실력은 묘목처럼 쑥쑥 자라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달랐다.

응급실 환자를 도맡으면서 특히 환자를 진료하고 진단하는 능력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는 나중에 교수가 되어서 외래 진료 업무를 처리할 때에 밑거름이 되는 매우 중요한 능력이었다.

경추·요추 파트에서도 탁월한 성취가 있었다.

훈식의 수술에서는 배울 것이 없었지만 낙현의 수술에서는 배울 것이 많았다.

차낙현 조교수.

그는 훈식과 같은 경추·요추 파트의 전공자인데 본받을 점이 많았다.

수술 전후로 환자를 세심하게 관리했으며.

최신 연구와 논문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서전으로서 손놀림 또한 뛰어났다.

차 교수님 수술만 완벽하게 흡수하고 돌아가도 대전 파견 생활에 본전은 찾는다.

……라고 준후가 결론을 내릴 정도였다.

그래서 낙현의 수술을 어시스트 할 때면 준후는 특히 더 집중력을 날카롭게 벼렸다.

낙현이 즐겨 쓰는 수술 도구는 무엇인지.

그 수술 도구로 어떤 처지를 하는지를 초식으로 암기해두었다.

그리고 초식화해둔 수술은 당직 근무 때 머릿속으로 영상처럼 재생해서 복기했다.

그것들은 전부 준후의 피와 살이 되었다.

무림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무림에서는 타인이 무공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행동이 법도에 크게 어긋났다.

거의 절도 취급을 당하는데.

비유하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남의 무공을 지켜본다는 것은…….

남의 식당에 들어가서 주방장이 어떤 재료를 어떻게 조리하는지 훔쳐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달랐다.

능력 있는 서전의 수술을 곁에서 아무런 제지 없이 편하게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현재 상황이 준후에게는 개꿀(?)이랄까.

낙현을 통해 준후가 특별히 눈을 뜬 분야는 경추·요추의 내시경 수술이었다.

낙현은 내시경 수술의 장인이었다.

내시경 수술은 수술 시야가 바늘구멍처럼 좁고, 수술 중 출혈이 발생하면 대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낙현은 감촉같이 단점들을 커버했다. 고수가 고수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루는 낙현이 준후에게 물었다.

척추관 협착증 환자에게 펼치던 내시경 추간공 확장술을 마무리 지을 때쯤이었다.

“자네. 서울에서 왔다고 했지?”

“네. 교수님.”

“서울에 있는 레지던트는 다 자네 같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시스트를 너무 잘해서 하는 말이야. 동원이보다도 몇 수 위인 것 같은데?”

동원은 4년 차 치프였다.

“별말씀을…… 저는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열심히 배우는 단계죠.”

“겸손하기는. 내시경 시야를 확보하고, 수술 도구를 건네고, 환자 바이탈을 모니터하는 솜씨가 수준급이던 걸?”

“…….”

“과장님이 자네를 데려오려고 애를 썼다고 하던데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낙현의 극찬에 준후는 쑥스럽게 웃었다.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진면모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 교수님.”

“1년 차 대휘도 잘 교육해 봐. 녀석, 성격은 참한데 수술방에서는 영 맹추 같은 구석이 있단 말이지.”

낙현을 통해 준후는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그날부로 대휘에게 틈틈이 수술 어시스트 하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어시스트 비법은 간단했다.

자신의 눈이 아니라 집도의의 눈으로 수술을 보는 것이 비법이었다.

집도의는 지금 무슨 생각으로 집도를 할까.

집도의가 어떤 어시스트를 받으면 처치를 더 편하게 할까 등등.

무림 출신이었기에 준후는 어시스트에 필요한 마음가짐과 사고방식을 진작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검을 겨눈 상대를 꺾기 위해서는.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열흘하고 하루가 더 지난날.

준후는 대전에서 몇 년이나 근무한 사람처럼 대전 의국에 녹아들었다.

이제 준후는 대전 의국 사람이었다.

* * *

창밖이 어두컴컴했다.

데이와 이브닝 근무를 섰던 태양이 퇴근하고 보름달이 나이트 근무를 인수인계받았다.

신경외과 병동 복도는 한산했다.

몇몇 환자들이 빠른 회복을 위해.

또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병동 복도를 걷고 있었다.

“준후 선배, 진짜 대박이지 않아요?”

신경외과 스테이션에 있던 대휘가 근무 중인 소현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대휘는 막 병동 라운딩을 끝마친 참이었다.

“준후 선배 오고 나서 막혔던 변기가 뻥 뚫린 느낌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예전하고 달리 병동 일이 밀리는 거나 막히는 것도 없잖아요.”

대휘는 계속해서 준후를 찬양했다. 이러다간 찬송가라도 직접 만들 지경이었다.

“성균 선배 탈주했을 때는 진짜 눈앞이 캄캄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살맛이 난다니까요.”

“대휘 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소현이 새침한 눈빛으로 대휘를 응시했다.

“왜요? 제가 틀린 말 했어요? 준후 선배 덕분에 간호사 선생님들도 한결 편해졌잖아요.”

“아뇨. 저도 준후 쌤을 좋아하기는 하는데요.”

“근데 뭐가 문제에요?”

“대휘 쌤은 제일 중요한 걸 까맣게 잊고 있어요. 준후 쌤이 파견 인력이라는 거죠.”

“…….”

“준후 쌤 서울로 돌아가면 후유증을 어떻게 감당할래요?”

“아…… 진짜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준후 선배 없으면 다시 지옥일 텐데. 으으으으.”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고.

때마침 준후가 스테이션으로 접근했다.

준후는 중환자실 라운딩을 끝내고 복귀하는 길이었다.

“귀가 간질간질하는 걸 보니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봐요?”

준후가 대휘 곁에 서서 대화에 껴들었다.

“네. 준후 쌤 이야기하고 있었던 거 맞아요.”

소현이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 했는데요?”

“준후 쌤이 있어서 든든하기는 한데 준후 쌤이 서울로 돌아가면 병동이 다시 개판 날 것 같다는 이야기요.”

“그렇게는 안 될걸요?”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좋은 방법이 있나요? 제가 봤을 때는 준후 쌤이 분신술을 익히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떠나기 전에 의국 틀을 잡아놓을 생각이거든요.”

“틀이요?”

“네. 다 생각해 놓은 게 있어요.”

준후는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을 준후가 걱정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오히려 준후는 남들보다 걱정이 더 많고 더 심각한 걱정을 하는 편이었다.

그래야 최악의 상황에서도 대처가 가능할 테니까.

“역시 준후 선배예요. 오! 나의 눈 부신 태양!”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그러면 덜 불안할 것 같아요.”

대휘는 다시 준후를 치켜세웠고 소현은 질문을 던졌다.

“벌써 밝히면 재미없잖아요. 한두 달 안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겁니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3년 차 혁재가 복도 끝에서 스테이션 쪽으로 다가왔다.

“……!”

준후를 발견한 혁재의 눈이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졌다.

혁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굳어 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혁재야, 어디 가니?”

준후가 먼저 혁재에게 물었다.

혁재가 준후에게 지은 죄가 있었고.

또 치프에게 반말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기에, 준후는 혁재에게 여전히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 잠깐 편의점 좀 다녀오려고.”

“농땡이 치지 말고 빨리 와. 오늘 수술 기록지 작성 안 된 거 많더라.”

“어. 알겠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혁재가 병동을 빠져나갔다.

“준후 선배는 언제 봐도 대단하네요. 그 난폭했던 혁재 쌤을 아기처럼 다루고.”

“그동안 본인이 쌓은 업이 있으니까 저 인간은 저래도 싸.”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잡담을 마친 준후가 찾은 곳은 당직실이었다.

준후는 밀린 업무를 번개처럼 끝내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현재 준후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빌런 교수 훈식을 처리하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복합통증증후군을 무공으로 치료하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은 후자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명상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시도해 볼 때가 됐다.

파바바밧.

준후는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왼쪽 다리를 점혈했다.

10초 정도 지나 효과가 나타났다.

다리에 힘줄과 핏줄이 굵직하게 돋아났다.

근육은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지고 솜털이 빳빳하게 솟구쳐 올랐다.

종아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랬다.

준후의 자신의 다리에 분근착골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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