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제57장 개척(1)
준후가 사파의 고문술인 ‘분근착골술’을 자신의 몸에 직접 펼친 이유.
그것은 복합통증증후군의 아픔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통증을 수치화하고 계량화하기는 어렵지만.
분근착골술 정도의 통증이면 복합통증증후군의 통증과 맞먹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와…… 진짜…….’
머릿속에 수십 개의 욕지거리가 떠오르고.
그 욕지거리가 가슴에서 목구멍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왼쪽 다리는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통증은 날카로운 사시미로 피부에 포를 뜨는 것 같았다.
아궁이에 팔을 들이민 것처럼 뜨겁기도 했다.
분근착골술을 수차례 당해봤음에도 아픔은 끔찍했다.
아픔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하지만 주원을 떠올리면서 다리로 덮쳐오는 끔찍한 통증을 준후는 기꺼이 참아냈다.
준후가 주원의 CRPS를 치료하지 못한다면 주원은 평생 이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야 했다.
그것은 저주이자 지옥이자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일단 진통 점혈부터 시험해 보자.’
파바바밧!
준후의 오른손 검지가 먹이를 사냥하는 매의 부리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왼쪽 다리의 주요 혈자리.
기문, 혈해, 음릉천, 지기, 누곡, 상구혈을 차례대로 점했다.
이는 허벅지부터 발목으로 이어지는 주요 혈자리였다.
이어서 준후는 다리는 지나가는 신경들까지 점혈했다.
진통 점혈을 끝마치자 그나마 숨통이 틔었다.
기존의 통증 수치가 10점이라면.
현 통증 수치는 6점 정도 되었다.
그럭저럭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준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다리의 상태는 여전히 불량했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근육의 잔 떨림이 멈출 줄 몰랐다.
힘줄과 핏줄도 굵게 도드라졌다.
‘확실히 ‘진통 점혈’로는 한계가 있어. 하지만 이 이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입안에서 짭짤하고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통증을 참느라 깨물었던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새어 나온 것이다.
준후는 모처럼 커다란 벽을 마주해 무기력이라는 거대한 해일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직실 창가를 서성거렸다.
분근착골술의 통증 때문에 왼쪽 다리를 절면서.
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CRPS는 원인 불명의 희귀 질환이었고 치료법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해결책이 뚝딱 튀어나올 리 없었다.
한참 방황하던 준후의 발걸음이 다시 업무용 책상으로 향했다.
준후의 손에는 어느새 정형외과 교제가 들려 있었다.
주원이 복합통증증후군을 앓고 있는 부위는 다리였다.
그렇다면 다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펄럭. 펄럭.
시원시원하게 넘어가던 책장이 해부학 사진이 첨부된 지점에서 멈췄다.
준후는 다리의 해부학적 구조를 꼼꼼하게 파악했다.
피부, 근육, 관절, 피하 지방, 근섬유, 신경, 혈관 등등.
자신이 놓쳤던 부위가 있는지를 살피고 또 살펴보았다.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리고 치프 동원이 들어왔다.
“우리 에이스, 뭐 해?”
동원이 친근한 목소리로 다가와 준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당직 근무를 도맡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병동 일까지 척척 해내는 준후였다.
동원에게 준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복덩이였다.
“정형외과 공부 좀 하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정형외과는 왜?”
“오늘 마취통증의학과에서 CRPS 환자 트랜스퍼 왔거든요. 따로 공부를 해두면 도움이 될까 해서요.”
“마음씨야 갸륵한데. 우리가 발버둥 쳐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니. 날고 기는 세계적인 의사들도 못 고치는 불치병을.”
“그래도 가만히 있고 싶지는 않아서요.”
“준후야.”
동원이 그윽한 목소리로 준후를 불렀다.
“네. 치프.”
“사람이란 게 적당히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길이 막혔을 때는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하는 거고.”
“…….”
“할 수 없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동원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준후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무공과 내공이 사기와 같은 능력을 지닌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전지전능한 힘은 아니었다.
무공과 내공 또한 한계가 또렷했다.
하지만 준후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주원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싫었다.
준후마저 포기하면…….
주원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으리라.
“바보 같아 보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어요. 발버둥을 치다 보면 얻어걸리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준후는 힘없이 웃었다.
“CRPS를 앓는 주원 씨, 홍 교수님이 신경 차단술 한다는데 치프 생각은 어때요?”
“아마 효과 없을걸?”
“왜요? 환자의 통증 감소에 효과가 있다는 논문도 꽤 있던데.”
“그게 말이야. 내 동기가 지금 마취통증의학과에 있는데…….”
동원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CRPS 1형은 신경차단술을 해도 별 효과가 없다더라. 1형과 2형의 차이를 아니?”
“네. 1형은 말초신경에 손상이 없는 경우잖아요.”
“그러니까 신경 손상이 없을 때는 신경 차단술을 펼쳐도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더라.”
“그럼 왜 굳이 수술을…….”
“뻔하잖아. 본인 수술 건수 하나 올리려는 거지. 홍 교수님이 우리 과에서 수술 건수가 제일 많아. 쉽고 빨리 수술할 수 있는 환자만 기깔나게 찾아내는 데 능력이 있단 말이야.”
이번 수술에 숨겨진 비밀을 듣고서 준후는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동원의 말이 진실이라면.
(아마도 진실이 맞겠지만)
주원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 * *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업무용 의자에서 일어나던 준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다리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통증 때문이었다.
준후는 밤새 분근착골술을 펼친 상태로 업무를 봤다.
주원과 공감하고.
주원을 치료하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상징이었다.
그래도 지금 상태가 계속되면 다른 환자들을 진료하는데 악영향을 줄 수 있었기에.
준후는 점혈법으로 분근착골술을 해제했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통증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어리석게도 인간은 반드시 아파봐야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모양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가 왔다.
콜폰이 아닌 휴대폰에 스승 박재현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준후는 황급히 통화를 연결했다.
“네. 교수님.”
-미안하다, 어제는 내가 바빠서 연락을 못 받았구나. 새벽에라도 전화할까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닙니다. 교수님. 아, 그리고 얼마 전에 보내 주신 경추·요추 자료 감사하게 잘 보고 있습니다. 도움이 많이 됐어요.”
준후는 고개를 조아려가며 대답했다.
재현의 자료는 이번에도 대박이었다.
스승이 직접 집도한 케이스.
해당 케이스에 장점과 단점.
알아두면 좋은, 비슷한 유형의 해외 논문들까지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의 학교 전과 수준이었다.
덕분에 준후는 체계적이면서 광범위한 경추·요추 질환을 빠르게 격파하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히 도움이 되어야지. 내가 피와 땀으로 정리해 놓은 건데.
재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따로 연락한 이유가 있지 않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랑 나 같은 스타일이 서로 연락할 때는 항상 환자와 관련된 트러블이 있기 마련이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렴.
“그럼 염치불구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준후는 주원에 대한 고민을 티끌 하나 빼놓지 않고 털어놓았다.
이야기하는 내내.
수화기 너머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아주 어려운 길을 찾고 있구나. 이번만큼은 나도 도움을 주기 힘들겠어.
“역시 CRPS 치료법을 찾는 건 어렵겠죠?”
준후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승 재현마저 백기를 들 정도로 CRPS는 난공불락이었다.
어제 동원의 말대로.
정말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그렇겠지.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이니까. 하지만 말이다.
“…….”
-그렇다고 해서 네가 좌절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방법이 없더라도 방법을 찾다 보면 방법이 보일 수도 있겠지.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
-인간은 위대하단다. 인류가 우주로 로켓을 쏘아 보내고 달에 착륙할 수 있을 거라고 예전에 그 누가 상상했겠니.
“…….”
-집념을 간직한다면 언젠가 빛이 보일 거란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교수님.”
통화를 끊고도 준후의 시선은 한참 동안 휴대폰에 머물러 있었다.
재현이 남긴 깊은 여운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준후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계기를 통해.
주원이 퇴원하기 전날.
주원의 복합통증증후군을 완치하게 된다는 기적 같은 사실을.
* *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준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주원을 돕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주원을 찾아가 대화를 나눴고.
마약성 진통제의 허용량이 넘으면 진통 점혈법을 펼쳐주었다.
그 과정에서 주원과 꽤 친해질 수 있었다.
주원은 격투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파이터 권’이라는 채널을 즐겨본다고 했다.
‘파이터 권’ 채널은…….
종합격투기 선수 출신에 권혁이 운영하는 채널로 구독자가 70만에 달했다.
주요 컨텐츠는 격투기 선수의 훈련법, 싸움 요령, 일상, 다른 뉴튜버의 운동 지도 등등이었다.
채널을 알아본 후 준후는 소속된 MCN에 연락을 했다.
파이터 권 채널과 콜라보를 잡아줄 수 있냐고.
그러자 준후의 담당자 영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이터 권 채널하고 콜라보를 생각하신 이유가 있나요?
“제 환자 중 한 명이 그분 팬이라서요. 사인도 받고 응원 영상도 받으면 힘이 될 것 같아서요.”
-아…… 근데 권혁님 평이 대체적으로 안 좋더라고요. 조회수 뽑으려고 뭔가 작위적인 컨셉도 많이 잡고 그런다던데.
“그래요? 저는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요?”
-최근 올라온 영상이 유독 그래요. 저희 MCN 소속 뉴튜버 중 권혁 님과 콜라보 한 분이 있는데 사람이 좀 별로라고 하더라고요.
영은은 권혁과의 콜라보가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준후는 콜라보를 꿋꿋이 밀어붙였다.
권혁의 인성이 별로라도.
권혁의 사인과 응원 영상은 주원에게 큰 힘이 될 테니까.
-그럼 제가 따로 연락하고 날짜 잡히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네. 고맙습니다. 담당님.”
준후는 통화를 끊었다.
바로 다음 날.
훈식의 집도 하에 주원은 하지에 신경차단술을 받았다.
애초에 수술을 계획한 의도가 불순했으므로.
수술 효과는 없다시피 했다.
수술 후에도 주원의 통증은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줄어들지 않았다.
주원과 주원의 보호자는 크게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주원이 먼저 무너지든.
보호자가 먼저 무너지든.
어느 한쪽이라도 무너지기 시작하면 둘 다 동시에 무너지게 된다는 걸 감지한 듯했다.
그렇게 주원의 퇴원 일이 이틀 뒤로 다가온 날.
준후는 모처럼 병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