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제57장 개척(2)
준후가 걷고 있는 곳은 신촌의 번화가였다.
평일이고.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임에도 거리에는 청춘 남녀들이 한 가득이었다.
연인으로 또는 삼삼오오로 모인 그들의 발걸음은 분명 SNS 맛집이나 트렌디한 장소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차도를 따라 늘어선 가게들은 최신 음악을 귀청 때리게 틀어놓았다.
아는 노래가 나왔을까.
앞서 걷던 청년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번화가가 주는 생기가 준후는 낯설고 신기했다.
병원은…….
근무하는 사람들도.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기운이 있고 없고를 가르는 기준은 해야 하는 일을 하느냐.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해 보았다.
딸랑!
도어벨 소리를 앞세워 역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준후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거리와 거리를 오고 가는 청년들을 쳐다보았다.
무림에서도.
현대에서도.
준후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범한 삶을 향한 동경이 항상 가슴 한쪽에 숨어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발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로 다가온 여성의 중단발 머리가 어깨선에서 찰랑거렸다.
여성은 토끼를 닮았다.
피부가 하얗고 눈이 컸다.
분위기가 세련됐다기보다는 귀엽고 쾌활한 편이었다.
영은과의 만남은 오늘이 두 번째였다.
“반가워요. 영은 씨.”
“아직 음료 주문 안 하셨네요. 뭐 드실래요? 제가 쏩니다! 정확히 말하면 법인 카드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하죠.”
“으음…… 신촌까지 와서 심심한 아메리카노라니요. 좀 색다른 메뉴 어떠세요?”
“추천해 주고 싶은 메뉴가 있어요?”
“헤이즐넛 프라프치노 어때요?”
“프라…… 뭐요?”
“프라프치노요. 프라프치노 모르시는구나. 이 기회에 한 번 드셔보세요.”
“좋아요. 그걸로 하죠.”
영은이 계산대에서 주문을 하고 준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근데 선생님. 저 항의하고 싶은 게 있어요.”
영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찔리는 것이 있어서 준후는 영은의 시선을 피했다.
“대전으로 파견 가시고 영상을 도통 안 보내 주시네요? 우리 채널 열흘째 휴업 상태인 거 아시죠?”
“하하하.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중이라서…….”
“그럼 더더욱 찍으셔야죠. 구독자들도 선생님이 대전 병원에서 뭘 하는지 궁금할 것 아니에요.”
영은이 잔소리로 준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교수나 선배들에게도 안 들었던 잔소리를 영은에게 듣는 준후였다.
“대전 병원 구내식당 대 서울 병원 구내식당. 뭐 이런 식으로 비교 영상을 올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제 말이 틀린 거 아니죠?”
“……영은 씨 말이 맞죠.”
“그럼 선생님이 잘못하셨어요? 안 하셨어요?”
“제가 잘못…… 했죠.”
“선생님이 말도 안 되게 바쁜 거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영상 3개는 뽑아야죠.”
“…….”
“그래야 뉴튜브 수익으로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더 많이 도울 수 있잖아요.”
“제가 졌습니다. 앞으로는 뭘 하든 틈틈이 휴대폰으로 영상 촬영할게요.”
준후가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백기를 들고 좌우로 나풀거렸다.
솔직히 영은의 말이 옳았다.
최근 뉴튜브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었다.
“아 참. 콜라보 제안하니까 권혁 님 반응은 어때요?”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통화해 봤는데 좋아 죽던데요? 본인보다 구독자가 많은 채널에서 콜라보 제안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인가 봐요.”
“별 탈 없이 진행돼서 다행이네요.”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현재 준후가 복합통증증후군을 앓고 있는 주원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권혁과의 콜라보였다.
“그리고 저 또 드릴 말씀 있는데.”
“뭔데요?”
“너무 겁먹지 마세요. 이번에는 좋은 소식이니까.”
준후가 영은의 눈치를 보자 영은이 피식 웃었다.
“놀랍게도!”
“놀랍게도?”
“선생님한테 영양제 광고가 들어왔어요. 바로바로…… 비타민 B군 종합 영양제 슈퍼맥스 메타요.”
“가수가 선전하는 그거죠?”
“네. 페이도 짭짤하더라고요.”
“안 할래요.”
준후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영은의 눈동자에 진도 6.0의 지진이 일어났다.
“왜요? 이 좋은 기회를.”
“제가 쇼(show) 닥터를 싫어하거든요. 영양제 광고는 쇼 닥터나 하는 거잖아요.”
‘쇼 닥터’는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이 제품 저 제품을 선전하거나 본인 제품 판매에 열을 올리는 의사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었다.
“물건을 사고 안 사고는 결국 구독자가 스스로 판단하는 거 아닐까요? 어차피 유료 광고 타이틀을 달고 찍을 테니까 구독자들을 속이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의도 자체가 영 꺼림칙한데요. 구독자를 이용해 먹는 것 같아서.”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유료 광고라고 무조건 띄워줄 필요도 없고요.”
“그럼 일단 생각해 볼게요.”
지이이잉.
때마침 테이블에 놓였던 진동벨이 몸을 떨었다. 준후가 진동벨을 들고 계산대로 이동했다.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야. 이거 영은 씨한테 뒤통수 세게 맞았네. 살짝 배신감이 들려고 하는데요?”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준후는 영은을 새침하게 노려보았다.
준후의 커피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칼로리 폭탄 프라프치노였고 영은의 커피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였다.
“제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영은이 멋쩍게 웃었다.
* * *
시청역에서 내린 준후와 영은이 향하고 있는 곳은 역에서 꽤 떨어진 주택가였다.
신촌 번화가와 달리 주택가는 사람이 없어서 한산했다.
도로를 따라 다세대 주택과 빌라가 좌우로 늘어서 있었고 노상에 주차된 차들도 많았다.
“저기에요.”
영은이 저만치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을 가리켰다.
3층에 권’s 종합격투기 도장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쪽은 촬영 시간은 얼마나 생각하고 있대요?”
“3-4시간 정도로 들었어요.”
“뭐. 적당하네요.”
잡담을 나누며 두 사람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사내 두 명이 불쑥 나타나 골목의 입구를 막아섰다.
츄리닝을 걸치고 껌을 짭짭 씹어대는 걸 보면 동네 양아치 같았다.
‘이놈들 봐라?’
맞은편에 있는 양아치에게서 준후는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
양아치들의 어깨가 수직으로 넓었다. 가슴이 앞으로 나왔으며 가슴 근육은 울퉁불퉁했다.
허벅지의 두께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후는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몸 밖으로 발산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내공이 반경 30미터 이내로 뻗어 나갔다.
내공은 곤충의 예민한 더듬이가 되어 주변에 있는 다양한 정보를 준후에게 전해주었다.
이는 무림에서 기감술이라고 부르는 무공이었다.
내공으로 주변을 세심하게 탐색하는 무공인데 내공이 깊을수록 탐색범위가 넓었다.
SUV 자동차 뒤에 한 명.
지금 통과하려는 골목길 맞은편에 있는 승용차 뒤에 한 명.
4층 빌라 위에 한 명.
양아치 이외에도 총 세 명의 괴한(?)이 수상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의미를 준후는 손쉽게 알아차렸다.
“선생님. 느낌이 안 좋은데 돌아가요.”
영은이 준후의 옷자락을 잡았다.
골목길 앞에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동네 건달이었다.
그들이 하려는 행동도 불순할 게 불 보듯 뻔했다.
“괜찮아요. 별일 없을 테니까.”
“별일이 아니라 큰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저 사람들 자기들이 톨게이트라도 되는 것처럼 서 있잖아요. 통행료 받으려고.”
“영은 씨.”
준후의 침착한 눈길이 영은에게 머물렀다.
“네. 선생님.”
“뉴튜브 각 좋아하시죠?”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장하죠. 회사에서 제 별명이 각도기인데요.”
“지금 각이에요. 따라와요.”
준후가 앞장서는 바람에 영은은 하는 수 없이 준후를 따라갔다.
준후의 이해하기 힘든 말과 행동에 의문을 가지면서.
“이야, 데이트 중인가 봐? 아주 보기 좋네.”
준후와 영은이 가까워지자 갈매기 눈썹이 삼류 저질 멘트를 날리곤 낄낄낄 웃었다.
갈매기 눈썹 곁에 있던 주걱턱도 덩달아 깔깔거렸다.
“불쌍한 동네 사람들한테 적선 좀 하고 가지 그래? 딱 봐도 잘 사는 것 같은데.”
“프라프치노를 사 먹을 돈은 있어도 당신들한테 줄 돈은 없어.”
“프라…… 뭐? 어쨌거나 돈은 못 주시겠다?”
“그래. 못 줘.”
“하…… 애인 앞이라고 똥폼 잡는 모양인데. 주제 파악 좀 하자. 우리한테 처맞는 것보다는 돈을 주고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멋있지 않겠어?”
갈매기 눈썹이 준후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오만상을 쓰며 준후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영은이 나섰다.
“선생님. 이러다가 콜라보 촬영 늦겠어요. 고집부리지 마시고 좋게좋게 해결해요.”
영은이 서둘러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하지만 준후가 손을 뻗어 그런 영은을 저지했다.
“안 됩니다. 이놈들한테 한 푼도 주지 마세요. 10원도 아까운 놈들이니까.”
“선생님. 이러다가 싸움 나겠어요. 다치시면 병원 생활하는데도 곤란하시잖아요.”
“뭐야? 너 의사였어? 그럼 돈 많겠네?”
갈매기 눈썹의 눈동자가 탐욕에 번들거렸다.
영은은 아차 싶었지만 벌써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자신 있으면 쳐 봐.”
“응?”
“자신 있으면 쳐 보라고.”
준후가 강하게 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건 갈매기 눈썹이었다.
갈매기 눈썹이 당황한 듯 뒷걸음질을 쳤다. 동료인 주걱턱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못 했다.
“까불지 마라.”
준후의 어깨가 갈매기 눈썹의 어깨를 강타했다.
갈매기 눈썹이 휘청거리면서 틈이 생겼다.
그 틈에 준후는 영은의 손목을 붙잡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예상외로 쉽게 풀린 상황에 영은은 어리둥절했다.
“선생님.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영은 씨가 모르는 걸 보면 사전 협의가 안 된 것 같은데. 이거 몰래카메라예요. 저 사람들은 체육관 사람들이고.”
준후가 검지로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 * *
“야, 몰래카메라 어떻게 됐냐? 뉴튜브 각은 뽑히겠어?”
권혁이 방금 막 헐레벌떡 체육관으로 들어온 사내에게 물었다.
“그게…… 좀 애매하더라고요.”
“애매할 게 뭐가 있는데?”
권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100만 뉴튜버인 준후의 단물을 빨아 먹기 위해 권혁은 몰래카메라를 준비했다.
체육관 후배들을 양아치로 변장시킨 후 준후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도록 지시했다.
[100만 뉴튜버가 길거리에서 양아치를 마주친다면?]
자극적인 제목도 이미 뽑아둔 상태였다.
“의외로 너무 담담하던데요. 말싸움 잠깐 하다가 성진이랑 종현이를 쌩까고 그냥 가더라고요.”
“그게 다야?”
“네.”
“하…… 조졌네.”
권혁이 그린 밑그림과 실제 그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준후가 잔뜩 쫄아서 자기 후배들에게 돈을 건네는 형편없는 모습을 기대했다.
그랬으면 최소 50만 조회수는 뽑아 먹었을 텐데…….
“의사라서 매가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깡이 좋다?”
“그러게요. 성진이랑 종현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더라고요. 원래라면 좀 더 시비를 걸었어야 하는데 대본대로 하지도 못했어요.”
“어휴. 병신들. 격투기 지망생이 의사한테 쫄아가지고.”
권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기왕 촬영을 했으니 아쉽더라도 영상은 써먹을 계획이었다.
때마침 준후와 담당자가 체육관으로 들어왔다.
터벅. 터벅.
준후의 발걸음이 직선으로 권혁을 향했다.
권혁이 생각한 것보다 준후의 몸은 훨씬 탄탄했다. 어깨가 떡 벌어졌고 걸음걸이에는 힘이 있었다.
예전에 상대했던 동 체급의 외국 선수가 겹쳐질 정도였다.
“권혁 씨.”
준후가 권혁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초면부터 아주 무례하시네요. 내가 우스워 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