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제57장 개척(4)
딸칵. 딸칵.
드르르륵.
마우스 포인터를 클릭하는 소리와 마우스 휠을 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체육관 내부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권혁은 준후의 뉴튜브 채널을 살피고 있었다.
영상을 시청하는 권혁의 눈매가 가늘었다.
얼굴은 모니터와 닿을 듯 가까웠다.
“하…… X발. 진짜 의사 맞네.”
권혁은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촬영을 끝내고 준후는 떠났지만 준후가 남긴 여운은 여전했다.
준후의 주먹을 모조리 얻어맞았던 기억이 솟구치면서 권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잘 익은 홍당무가 되었다.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의사가 어떻게 나도 못 피하는 주먹을 휘두르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말이…….”
권혁이 한탄을 하는 가운데.
체육관원 두 명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서현수와 박신열.
격투기 실력은 고만고만하지만 입담이 좋아 권혁의 채널에 만년 게스트로 등장하는 후배였다.
“선배 뭐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아까 말입니다. 의사가 휘두른 주먹, 일부러 맞아주신 거죠?”
현수의 질문에 권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끼들이,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러 왔나.
“누누이 말했잖아. 내가 뉴튜브 각 뽑으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거봐라. 이 멍충아. 신열이가 말입니다. 선배가 그 의사 주먹을 못 피한 거라고 아득바득 우기지 뭡니까?”
“박신열.”
“네. 선배.”
권혁의 서슬 퍼런 눈빛에 신열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냐? 전설의 블랙 맘바가 의사 나부랭이의 주먹을 못 피했다고?
“저…… 그게…….”
“말 더듬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 새꺄.”
“저는 선배님이 아주 약간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일 때 선배 눈빛이 완전히 바뀌잖아요. 그 특유의 눈빛을 봤거든요.”
“…….”
“근데 그 진심이 한 30퍼센트 정도였으면 의사의 주먹을 못 피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하하하.”
대답을 마친 신열이 어색하게 웃었다.
신열의 눈은 정확했다.
실제로 권혁은 준후를 진심으로 상대했으니까.
하지만 이를 대외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근데. 선배.”
신열이 다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왜?”
“오늘 찍은 영상은 어떻게 편집할까요? 몰래카메라 영상이랑 펀치 피하는 영상이요.”
“몰카 영상은 올리고 펀치 피하는 영상은 삭제해.”
“엥? 선배. 그걸 왜 삭제합니까? 뉴튜브 각 때문에 일부러 맞아주신 건데?”
잠자코 있던 현수가 대화에 껴들었다. 권혁의 상처 받은 자존심을 살살 긁어댔다.
“사람들이 깔깔거리면서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대박 칠 것 같은데요.”
“생각해 보니까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
“아니라니까요? 저만 믿으…….”
“서현수. 입 좀 닥쳐. 내가 니 수다를 들으려고 여기 있는 것 같냐?”
“죄…… 죄송합니다.”
“둘 다 볼일 끝났으면 가 봐.”
후배들을 보내고 권혁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지금은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 * *
“와. 준후 선생님. 아까 진짜 멋있었어요.”
체육관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던 도중, 영은이 준후를 향해 양 엄지를 치켜들었다.
“천하의 격투기 선수도 준후 선생님 주먹을 못 피하던데요? 완전 대박!”
“손님이 왔으니까 놀아준 거겠죠.”
“놀아준 것 치고는 권혁 씨 표정이 완전 썩어 있던 걸요? 주변 분위기도 싸했고요.”
영은이 아기 새처럼 조잘거렸다.
준후는 대답 대신 웃고 말았다.
표면상으로는 권혁이 준후에게 접대 복싱을 한 그림이었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접대 복싱을 한 건 권혁이 아니라 준후였다.
준후가 진심이었다면 권혁을 단 1초 만에 제압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놀랍게도 종합 격투기 챔피언이나 복싱 챔피언이 아닌 외과 의사인 준후가 인류 최강의 사나이라는 것을.
“저…… 영상 찍은 거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할까요?”
“따로 찍은 영상이 있어요?”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게스트로 촬영할 경우.
보통 상대방에게 풀 버전 영상을 받아서 재편집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당연하죠. 그 사람들이 편집을 악마같이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거 보세요.”
영은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준후가 액정을 터치하자 30분가량의 영상이 촬영되어 있었다.
영상에는 글러브를 낀 준후가 권혁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장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감인데 그쪽에서 요 장면은 싹 빼고 올릴 것 같거든요? 우리가 선수를 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그쪽은 몰카 영상까지 찍었는데 우리도 이 정도 복수는 해야 수지타산이 맞죠.”
말을 마친 영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편집자이자 담당자로서 영은의 수완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준후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영은 씨 이제 보니 무서운 사람이었네요.”
“그럼요. 누구든 작은 영은이를 건드리면 혼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준후 쌤도 앞으로 제때제때 영상 찍어서 보내 주세요. 알겠죠?”
“……네.”
가는 방향이 달라 준후는 지하철역에서 영은과 헤어졌다.
서울역으로 이동해 대전으로 가는 KTX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권혁의 사인과 응원 동영상을 받았으므로 오늘 일정은 무사히 종료되었다.
준후는 모처럼 시간도 때울 겸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하고 무작위로 떠오르는 뉴튜브 영상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중에 운명처럼 끌렸던 영상이 있었으니…….
바로 QBS 채널에서 방영했던 개그 프로그램 영상이었다.
[개그 페스티벌 대박 프로그램 명인 1시간 연속보기]
명인은 사기꾼 명인이 등장해서 본인의 능력을 뽐내다가 나중에 된통 망신을 당한다는 것이 주된 전개였다.
-저는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태어났을 때 의사가 엉덩이를 찰싹 때리잖아요? 전 그때도 안 울었어요.
-저기요. 명인분. 그때를 기억할 수 있습니까?
-암요. 전 기억력이 좋아요.
-어쨌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통증을 느껴보신 적이 없다는 거죠.
-뭐든지 시험해 보세요. 마침 저기 각목이 있네. 각목으로 제 팔을 내리쳐 보세요.
무통(無痛)의 명인 편을 감상하던 준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섬광과 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공 중에는 천세흑야공이라는 무공이 존재했다. 이는 술자의 통증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그래서 과거 천세흑야공을 익힌 마인들을 상대할 때 준후는 크게 애를 먹었다.
때려도 타격을 받지 않으니 좀비처럼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만약 내가 천세흑야공을 재현할 수 있다면……?
복합통증증후군으로 고통받는 주원 씨를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준후의 머릿속에서 번뜩거렸다.
물론 통증을 느끼지 않는 삶이 행복한 건 아니었다.
통증도 존재의 의의가 있었다.
불에 데는 데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의 몸은 바비큐로 익어버릴 테니까.
하지만 말이다.
주원의 경우 극심한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마약성 진통제로 통증을 계속 억누르다간 진통제에 중독될 위험이 존재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준후의 판단으로는…….
오직 천세흑야공만이 주원의 희망이 될 것 같았다.
CRPS로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다리가 무통인 상태에서 다리를 관리하는 편이 100배는 낫지 않겠나 싶었다.
‘문제는 방법인가?’
준후의 손이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천세흑야공의 존재만 알 뿐.
실제 무공 운용 방법을 준후는 알지 못했다.
정파 출신인 준후가 완벽하게 펼칠 수 있는 사파 무공은 분근착골술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주원을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방법을 찾아야 내리라.
휴대폰 액정에서 뉴튜브 화면이 내려가고 그 자리를 해부학 사진이 대신 차지했다.
예전에 받은 해부도에 하지 구조를 살피는 준후의 눈빛이 진지했다.
현대 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희귀 질환은 무공으로 해결하는 게 답이었다.
* * *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준후의 일상은 여전히 숨 가쁘게 돌아갔다.
병동 관리, 수술방 어시스트, 중환자실 관리, 응급실 환자 진료 등등.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그리 벅차지 않았다.
준후에게는 무공이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영양제와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몰랐으며.
스승 재현의 논문을 달달 외워서 의학 및 수술 지식이 빠삭했다.
그렇다고 처치 능력이 떨어졌냐면…….
그럴 리 없었다.
양수 호박술과 호월십이수를 8성까지 익힌 준후의 손놀림은 이미 웬만한 교수에 버금갔다.
대전 의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준후는 건드릴 수 없는, 이른바 언터처블 레지던트로 거듭나고 있었다.
대전 의국의 역사가 준후 전과 준후 후로 나뉠 지경이었다.
일상 업무를 소화하면서도 준후의 관심은 늘 천세흑야공을 어떻게 재현할 것이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주원의 퇴원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신경 차단술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신경외과에서 더 해줄 치료가 없었던 것이다.
사정은 마취통증의학과도 마찬가지였다.
치료가 가능한 질환은 불치병이 아니었으므로.
“와. 선생님 진짜 감사합니다. 이런 걸 다 받아주시고.”
준후가 주원에게 권혁의 사인을 건네고 동영상을 보여주던 날.
주원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하루 스케줄을 따로 뺀 보람을 진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행복도 전염되는 것이었다.
한편 준후의 뉴튜브 채널은 한 번 더 전성기를 맞이했다.
권혁 측이 올린 영상이 70만 조회수를 달성했고, 얼마 뒤 영은의 솜씨(?)로 업로드된 미방영분 영상이 오늘의 인기 동영상에 오르며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100만 이후 정체되었던 구독자수가 단번에 5만 명 더 늘었다.
[아니, 우리 허락도 안 받고 그런 영상을 올리면 안 되죠. 우리가 뭐가 됩니까?]
[그쪽도 멋대로 찍은 몰래카메라 영상 올렸잖아요. 피장파장 아닌가요?]
[몰카 영상은 반응 좋았잖아요. 준후 선생님에 정의로운 모습이 담겨서. 내용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내용이 뭐가 달라요? 우리 영상으로 권혁 님도 빵 떴다고요. 허당 격투가 이미지가 새로 생겼다고요.]
[제 별명이 블랙 맘바였는데 허당 이미지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말씀이 지나치시네.]
[제가 영상을 조작해서 올린 것도 아니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올렸는데 무슨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전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하루는 영은이 권혁과 나눈 메신저 전문을 준후에게 보내 주었다.
내용을 읽고 준후는 그저 웃었다.
바보 같은 사람.
누구든 작은 영은을 건드리면 혼나기 마련인데 말이야.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찾아온 어느 날 저녁.
준후는 비장한 표정으로 주원의 병실을 찾았다.
주원은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주원 씨 뭐 봐요?”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무협 소설 보고 있었어요.”
“무협 소설 좋아해요? 요새 젊은 친구들은 잘 안 보던데.”
“저는 뭔가 멋스러운 표현들이 좋고 무협지 특유의 세력 싸움이 좋더라고요.”
“다리는 좀 어때요?”
“지금은…… 괜찮아요. 언제 또 발작이 시작될지는 모르겠지만.”
주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늘이 마지막이 되리라.
“주원 씨, 잠깐 걸을 수 있겠어요?”
“네. 근데 왜요?”
“잠깐 저 좀 보죠.”
주원을 데리고 준후는 병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