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제57장 개척(5)
끼이이익.
준후는 3층 구석에 있는 창고의 열쇠를 꽂아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쇠는 오가며 인사를 나누는 어르신 직원에게 미리 받아둔 것이었다.
찰칵!
전등을 켜자 창고 내부가 환하게 밝아졌다.
창고는 4평 정도 되었으며 걸레, 행주, 빗자루 등등의 청소 도구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선생님. 이야기를 하자고 하셔놓고 왜 이렇게 살벌한 곳으로 데려오셨어요?”
준후를 따라 창고에 들어선 주원이 경계하며 물었다.
“문 좀 잠가 주시겠어요?”
“……네.”
문이 닫히고 문이 잠기고 주원이 준후를 마주하고 섰다.
주원의 눈동자에 혼란한 기색이 엿보였다.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많았지만.
준후는 최대한 절제해서 입술을 움직였다.
“주원 씨.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되게 황당하게 들릴 거라는 거 아는데요. 저 미친 사람 아닙니다.”
“왜요? 설마 정체가 외계인이라고 밝히실 건가요?”
“외계인은 아니고 무림인입니다.”
준후의 은은한 목소리가 메아리로 창고에 퍼졌다.
주원이 넋 나간 얼굴로 준후를 쳐다보다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제가 무협 소설 보고 있었다고 이런 장난치기 있어요?”
“장난이 필요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는데. 지금은 후자예요.”
준후는 휴지가 놓여 있는 선반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손바닥에 담아 흡(吸, 빨아들일 흡)자결을 펼쳤다.
휘이이익.
탁!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휴지가 허공을 가로질러 준후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주원의 눈동자가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뭐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선생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면제 주셨나요?”
“이래도 꿈이에요?”
“아야!”
준후가 피식 웃으며 주원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주원이 몸서리를 쳤다.
-무협 소설 좋아한다고 했죠? 이건 어때요? 제 목소리 잘 들리죠?
이번엔 준후가 주원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음이란 무림 버전의 텔레파시였다.
“와. 돌겠네. 그럼 휴지를 당겨온 건 허공섭물이고 방금 그 목소리는 전음인가요?”
무협 소설 마니아답게 주원의 입에서 무협 용어가 술술 나왔다.
이러면 대화가 편하겠다 싶었다.
만약 주원이 무림을 몰랐다면.
준후는 초능력자 행세를 할 작정이었다.
“정확해요. 잘 아는 분이라 뭐를 덧붙일 필요가 없어서 좋네요.”
“근데 무림이니 무협이니 하는 거는 소설 속에 세계 아닌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자세한 건 저도 모릅니다. 저는 그저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무림 세계를 경험했고 또 현대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에요.”
“아직 어안이 벙벙해서 그러는데 허공섭물 다시 한번만 보여주세요.”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휴지를 쥔 손을 다시 선반에 겨누었다.
후우우웅.
휴지가 준후의 손을 떠나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내공을 반(反)자결로 운용해 휴지를 손에서 밀어낸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까.
주원은 팔짱을 낀 채 한동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제게 무림인이라는 걸 밝히는 이유. 또 여기에 데려오신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뭐죠?”
드디어 본론이 튀어나왔다.
준후는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무림인이라는 걸 밝힌 이유는 앞으로 펼칠 치료 방식 때문이었다.
CRPS의 치료 방식은 현대 의술이 아닌 기공술인데…….
이를 주원이 사이비로 오해하면 치료 동의를 받을 수 없었다.
치료 동의를 받지 못하면 치료 과정이 순탄할 수 없었다.
준후의 설명을 듣고 나서 주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능력을 눈앞에서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저도 선생님을 믿지 않았을 것 같아요.”
“네. 그리고 당연히 아시겠지만 제 정체에 대해서는 꼭 비밀을 지켜주세요.”
“물론이죠. 저를 위해서 권혁 님 사인하고 영상까지 받아주셨는데. 입 닫고 있는 정도를 못하겠어요?”
“그럼 슬슬 치료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치료요? 저한테 희망이 있었나요?”
되묻는 주원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희망이란 절망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을 끌어올리는 힘이 있었다.
“완치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지만…… 제 치료를 받고 나면 일상생활에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준후가 치료 효과에 대해 설명했다.
앞으로 펼칠 기공술이 다리의 통각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통각이 없는 삶 VS 통각이 있는 삶.
주원은 과연 어느 쪽을 택할까.
준후의 호기심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화끈하게 풀렸다.
“고민할 게 있나요? 당연히 전자죠.”
주원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저를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고통에서 구원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주원의 허리가 90도로 굽어졌다.
* * *
“선생님. 512호실 최승혁 환자 체온이 38.2도인데요. 어떻게 할까요?
레지던트 1년 차 대휘가 병동 스테이션을 지나가는데 선혜 간호사가 환자 노티를 했다.
“어…… 당직실에 준후 선배 있지 않나요?”
“아까 CRPS 환자 데리고 어디로 가던데요?”
“그래요? 왜 그러셨지?”
대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후의 행동이 다소 뜬금없이 느껴져서 그랬다.
안타깝지만 신경외과에서는 CRPS 환자에게 해줄 것이 없었다.
얼마 전 펼쳤던 신경 차단술의 효과도 신통치 않았고.
“그 환자 내일 퇴원하잖아요.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데려간 게 아닐까요?”
“할 말이 있으면 병실에서 해도 되지 않나요? 언제 통증 발작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굳이 병동을 벗어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선생님이 보기에는 어때요? 준후 선배는 마음이 너무 여린 것 같지 않아요?”
스테이션 접수대에 한쪽 팔을 걸치며 대휘가 선혜에게 물었다.
선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 잘하시는 선생님들은 보통 무뚝뚝하던데…… 준후 쌤은 거의 환자 바라기이긴 하죠.”
“저도 그래서 걱정입니다. CRPS 환자만 봐도 그래요.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뭔가를 해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잖아요.”
“…….”
“그러다가 몸이랑 마음이 축나면 어떻게 하려고.”
대휘는 진심으로 준후를 걱정했다.
의사가 환자를 위한다는 거.
그건 물론 대단하고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
환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면 할수록 의사는 괴롭기 마련인데.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지금 준후의 속은 지금 잿더미나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대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었다.
환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일은 괴롭지만 그 고통을 원료로 삼아 준후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휘 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거예요? 코가 석 자인 사람은 대휘 쌤 아니에요?”
선혜가 유머를 섞어 물었다.
“하하하. 그러게요. 주제넘게.”
“에이, 그렇게 받아들이진 마세요. 제가 선생님을 비하한 것 같잖아요.”
“저도 농담입니다. 방금 노티해 주신 환자는 제가 차트 보고 바로 처방 내드릴게요.”
선혜와의 대화를 마치고 대휘는 당직실로 이동했다.
* * *
3층 창고.
주원은 병실 침대보가 깔린 바닥에 누워 있었다.
준후는 주원 곁에 무릎을 꿇은 채 천세흑야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세흑야공.
통각을 완벽하게 마비시키는 사파의 무공.
힘들고 오랜 고민 끝에 준후는 그 사이한 마공의 원리를 깨우쳤다.
인체에 존재하는 수백 개의 혈 자리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하나는 운동 혈맥.
다른 하나는 감각 혈맥이었다.
천세흑야공은 둘 중에서 감각 혈맥을 영구적으로 사멸시키는 수법이었다.
무림에서의 지식과 해부학적 지식으로 준후는 하지에 존재하는 모든 감각 혈맥의 위치를 암기해두었다.
“서…… 선생님. 정말 괜찮겠죠? 치료받는 도중에 막 주화입마나 그런 거 걸리는 거 아니죠?”
주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럴 때는 무림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게 오히려 독이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주화입마를 몰랐으면 준후의 기공술을 걱정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안심하세요. 실패할 확률은 극히 낮으니까요.”
“왜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모르는 게 낫습니다.”
준후는 치료의 시작을 알리고 가볍게 목을 좌우로 까닥거렸다.
이 순간을 위해 준후가 어떤 희생을 치렀고 얼마나 숱한 시련을 겪었는지 주원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준후는 타인을 안아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타인에게 안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원 씨, 최선을 다할게요.
당신이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갈 수로 있도록 제가 책임질게요.
저는 당신의 주치의니까.
결연한 각오와 함께 기공술의 막이 올랐다.
준후의 손가락이 주원의 누곡혈을 짚었다.
누곡혈은 복사뼈에서 3센티미티 상단에 위치한 혈맥으로 내측 종아리 신경이 지나갔다.
일종의 신경 허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준후의 손가락에서 방출된 내공이 누곡혈을 향해 직진했다.
내공은 파도처럼 누곡혈을 감싸다가 이내 하나의 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내공이 압축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뜨거운 열기.
준후는 삼매진화의 수법을 응용하고 있었다.
삼매진화란 일종의 화공(火攻)이었다. 내공에 불 속성을 더하는 것이었다.
삼매진화 수법은 조화경 이상의 고수만 펼칠 수 있었고 그 효율도 극히 떨어졌다.
열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는데 또 에너지가 필요하듯.
내공에 불 속성을 추가하는 데 내공이 또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천진기가 존재하는 한 보통 주요 혈은 자연적으로 복구되기 마련이라 복구를 영구적으로 막으려면 혈을 완벽하게 태워 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준후는 천세흑야공의 이치를 현대 의학에 소작술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는 정확한 판단이었다.
“서…… 선생님. 저 갑자기 다리가 뜨거운데요? 괜찮은 거 맞나요?”
“네. 치료하는 과정입니다. 두렵고 고통스럽겠지만 참아요. 지금부터는 움직이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마세요.”
주원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천세흑야공에 매진했다.
기공 치료는 물론 쉽지 않았다.
삼매진화 수법으로 정확히 감각 혈맥만 태워야 했다.
실수로 운동 혈맥을 건드리면 주원은 다리를 영영 못 쓰게 될 테니까.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으므로 준후는 혈 자리를 짚을 때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견뎌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의 진리였다.
의사가 고통받을수록 환자는 건강해진다.
그것은 의술의 진리였다.
누곡혈, 지기혈, 음릉천혈 등등.
준후의 손가락이 혈 자리를 따라 상승해나갔다.
내공 소모가 극심해지면서 단전에 극심한 허탈감이 몰려왔다. 누군가 아랫배를 쥐어짜는 것 같았다.
호흡은 거칠어졌고.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체력적인 부담이 가중되면서 한 점으로 모였던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잡념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주원 씨는 잘 버텨주고 있어.
준후야, 너만 잘하면 돼.
거의 다 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가운데 흑세천야공에 끝자락이 가까웠다.
남은 감각 혈맥은 기문혈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준후가 기문혈을 소작하고 있을 때,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저기요. 창고에서 뭐 하고 계십니까?”
“…….”
“보아하니 의사 선생님 같은데…… 창고에서 환자랑 뭐 하시냐고요. 대답 안 하세요?”
등 뒤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공포였다.
가장 중요한 혈맥 소작 작업을 하고 있었던 터라 준후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주원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흑세천야공 때문에 생기는 열감을 극복하느라 직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다 된 밥에 코가 빠지려 하고 있었다.
“선생님. 뭐라고 말씀을 해보시라니까요?”
직원이 끝내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