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01화 (300/424)

301화

제58장 골프(1)

딸칵!

캄캄했던 병실에 불이 켜졌다.

잘 자고 있었던 환자 몇몇이 불만 섞인 신음을 토해냈다. 누구는 졸린 눈을 비볐고, 누구는 이불로 얼굴을 덮어 전등 빛을 가렸다.

현재 시간은 오전 6시.

503호 병실에 아침이 밝았다.

‘한 번도 안 깨고 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기적도 이런 기적이 없구나.’

주원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저녁 꿈만 같은 일이 벌어졌다.

주치의였던 준후가 본인이 무림인이라고 밝히며 주원의 복합통증증후군을 치료해 주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준후의 치료를 100퍼센트 믿지는 않았다.

주원도 CRPS에 대해 제법 알아보았는데 이 병을 아는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CRPS는 원인을 모르고 치료 방법도 모르는 불치병이라고.

실제로 지금까지 3곳의 대학병원을 찾았지만 그 어느 곳도 주원을 치료하지 못했다.

그런데 준후가 제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한들 자신을 치료할 수 있을까?

주원의 생각은 회의적이었으나 치료 결과는 놀랍게도 희망적이었다.

치료를 받은 이래로 주원은 단 한 번도 다리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다리의 통각 전체가 마비됐다는 단점이 존재했지만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주원아. 좋은 아침.”

보호자 침대에 누웠던 어머니가 일어나 부스스한 낯으로 주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어머니. 정말 좋은 아침이네요.”

“오늘따라 유독 표정이 밝아 보이는구나. 어제 발작 없이 잠을 잘 자서 그런가?”

“네. 그런가 봐요.”

주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통증이 사라지니 진짜 살 것 같았다.

이러다간 바보 같이 웃고만 있을 것 같아서 억지로 입꼬리를 내려야 할 정도였다.

“주원 씨. 진통제 바로 투여해드릴까요?”

어느새 침상으로 다가온 간호사가 주원의 혈압과 체온을 재며 물었다.

“아니요. 오늘은 괜찮습니다.”

“네? 정말로요?”

간호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원이 지난 2주 동안 항상 이 시간대에 진통제를 처방받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참으실 필요 없어요. 아침은 특히 힘들어하시잖아요.”

“그래. 주원아. 아프니까 환자인 거야. 참으면 오히려 병 된다?”

“정말 괜찮아서 그래요. 오늘은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네요.”

“그럼 아플 때 바로 말씀해 주세요.”

볼 일을 마친 간호사가 떠났다.

주원은 자신에게 닥친 경이로운 사건을 어머니에게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았다.

준후의 정체.

준후의 치료법에 대해 평생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으므로.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 오늘 퇴원하네?”

“네. 어머니도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무슨. 엄마는 주원이 곁에만 있었을 뿐인데. 병원 나가면 맛있는 음식 먹자꾸나.”

“그래요.”

주원의 목소리가 해맑았다.

다리가 아프지 않았기에 나가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릴 생각에.

주원의 마음은 벌써부터 들떴다.

창가 쪽을 바라보니 모처럼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이젠 주원의 마음에도 무지개가 있었다.

오전 9시가 되자 신경외과 의사들이 회진을 돌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양 떼처럼 주원의 병실로 몰려들었다.

“오늘이 퇴원이시군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과장이 주원에게 물었다.

“아주 좋습니다. 행복할 정도로요.”

“기분이 좋아 보이시니 저도 기분이 좋군요. 그나저나 오늘 아침은 진통제 처방을 안 받으셨네요?”

질문하는 과장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모처럼 오전 발작이 없었네요.”

“그럼 제가 펼친 신경 차단술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부교수 훈식이 대화에 껴들었다.

자신을 치료해 준 건 준후인데 엄한 사람이 잘난 체를 하니, 주원은 기분이 나빴다.

“글쎄요. 저는 준후 선생님이 저를 극진하게 대해주셔서 몸이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서 선생이요?”

과장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준후에게 쏠렸다.

부담스러운 눈초리에 준후가 멋쩍게 웃고 있었다.

“자주 와서 말도 걸어주시고, 다리도 마사지해 주시고. 제가 좋아하는 뉴튜버의 사인과 응원 영상도 받아주셨거든요.”

“서 선생, 환자 관리 잘했어요. 다른 스태프들도 서 선생을 본받도록 해요.”

과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과장은 앞으로의 진료는 마취통증의학과에서 계속 받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주원이야 별로 그럴 필요를 못 느꼈지만.

“준후 선생님. 혹시 회진 끝나고 잠시 뵐 수 있을까요?”

“네. 그러시죠.”

회진이 끝나고 10분쯤 지나가 준후 혼자서 다시 병실을 찾았다.

끔찍한 고통의 삶을 벗어나게 해준 준후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복잡한 감정이 한데 뒤엉켜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선생님하고 한 약속은 무덤까지 지킬 거고요. 감사합니다. 저 앞으로 열심히 살게요. 어머니 호강시켜드리고 선생님한테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요.”

주원은 준후의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뜨거워지던 눈시울에서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숨소리에 흐느낌이 섞였다.

오늘부로 주원은 다시 태어났다.

* * *

터벅. 터벅.

신경외과 병동 복도를 걷던 준후가 503호실을 힐끔거렸다.

주원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응급실 진료를 몇 번 보고 중환자실 라운딩을 하는 사이, 퇴원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주원의 빈자리에서 준후는 쓸쓸함이 아닌 뿌듯함을 맛보았다.

갖은 고초 끝에 완성한 천세흑야공으로 CRPS 치료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준후는 주기적으로 마음을 침략해 오는 무기력감을 물리칠 수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어.

앞으로도 난 반드시 그 길을 찾아낼 거야. 좌절과 절망은 내 사전에 없는 거야.

“어머! 죄송해요. 준후 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태연 간호사가 준후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병실에서 급하게 나오다가 드레싱 카트로 준후의 왼쪽 다리를 치고 만 것이다.

평소의 준후라면.

드레싱 카트의 접근을 기감으로 느껴 먼저 피했을 텐데…….

오늘은 생각이 너무 깊었던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요? 꽤 세게 부딪쳤는데요? 아프실 것 같아요.”

“제가 타고난 무쇠 다리라서요.”

간호사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준후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당직실로 돌아가 업무용 책상 앞에 앉았다.

드레싱 카트에 부딪혔지만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왼쪽 다리는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랬다.

주원에게 천세흑야공을 펼치기 전에 자신의 다리에 직접 천세흑야공을 펼쳤다.

검증되지 않은 기공술을 주원에게 시험해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툭. 툭. 툭.

준후는 주먹으로 자신의 다리를 건드려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예 왼쪽 다리가 없는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데 이 정도 대가를 치른 거면 오히려 저렴한 축에 속한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준후의 시선이 창가를 향했다.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렀다.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 한 뭉치가 느긋하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

공휴일이라서 병동은 한산했다.

외래 진료가 없고, 수술 스케줄도 없었다.

오전 원내 일정이 있어서 모였던 교수들도 지금쯤은 다 퇴근하고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운도 따랐네.’

준후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 어제저녁의 풍경.

천세흑야공으로 주원을 치료하던 풍경이 떠올랐다.

천신만고 끝에 치료를 마무리하던 도중, 미화 직원이 창고로 난입해 들어왔다.

자칫하면 준후가 주화입마를 입고 주원의 감각 혈맥과 운동 혈맥을 함께 소작해 버릴 뻔했던 위험천만한 상황.

하늘의 도움이 있었다.

준후의 어깨를 직원이 손으로 짚기 직전에 기공술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후로는 별 탈이 없었다.

준후는 환자에게 개인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고 대충 둘러댔다.

미화 직원은 미심쩍다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지이이잉.

휴대폰 진동에 깨지는 상념.

준후가 가운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보니 아영이 전화를 걸었다.

“어. 아영아. 오고 있어?”

-응. 오후 3시쯤이면 도착할 것 같아.

우연의 일치인지 아영도 준후처럼 대전으로 파견을 나오게 되었다.

이럴 때마다 준후는 아영이 하늘이 점지해진 인연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우리 빵순이. 벌써부터 입가에 침이 줄줄 흐르고 있겠네. 선심당 갈 생각에.”

-그 정도는 아니야. 오버하지 마.

“아영이 너라면 그러고도 남아. 빵킷리스트도 다 적어놨을 것 같은데. 맞지?”

-그건 인정.

아영이 꺄르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CRPS 환자 치료는 어떻게 됐어? 잘 끝났어?

무림 출신이라는 것을 밝힌 이후, 준후는 아영에게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왼쪽 다리의 통각이 마비됐다는 사실은 숨길 예정이었지만.

“아주~ 잘 끝났어. 환자도 대만족하고 퇴원했지.”

-그럼 지금쯤 또 우울해하고 있겠네.

“웬 우울? 치료도 잘 끝냈는데 내가 왜 우울해?”

되물으면서 준후는 크게 놀랐다.

아영의 말을 듣고 보니 오늘 오전부터 이상하게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

-아주 뻔한 이야기지. 준후 넌 무의식적으로 다른 CRPS 환자들을 생각하고 있었을걸?

“…….”

-주원 씨처럼 고통받는 CRPS 환자들은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하는지 고민했겠지. 일일이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치료를 해줘야 하는지. 그 사람들한테 자기가 무림인이라는 걸 어떻게 밝혀야 하는지 등등.

“족집게네. 하늘은 속여도 아영이 너는 못 속이겠어.”

준후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아영의 지적이 옳았다.

알아보니 대한민국에서만 매년 1,000명의 CRPS 환자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CRPS에도 1형과 2형이 존재하고 환자별로 통증의 정도는 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들을 치료할 생각만으로도 벅차서 준후는 어느 순간 생각하기를 멈춰 버렸다.

“아영아. 이제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준후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아영에게 드러냈다.

준후의 약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는 지구상에서 오직 아영뿐이었다.

-다른 CRPS 환자들은 신경 쓰지 마. 그저 지금 네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무시하라고? 의사인 내가 그럴 수 있겠어?”

-응. 무시해야 돼. 무조건.

아영의 대답이 단호했다.

-지구에서 1초마다 평균 2명의 사람이 죽는대. 살인, 기아, 전쟁 같은 이유로. 너 그 사람들 다 살릴 수 있어?

“당연히 못 하지. 그러면 내가 신이게?”

-내 말이 그 말이야. 난 네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저 네 눈앞에 있는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

“…….”

-네 길을 걷다가 CRPS 환자를 또 만나면 그때 치료하면 되지 않을까?

“…….”

-준후 네가 벌써부터 CRPS 환자들의 구세주인 것처럼 행동하려고 하지 말고.

아영의 대답은 성숙했다.

불안해하는 준후를 포근하게 안아주기 충분했다.

대답을 듣는 순간, 준후는 자신에게 드리웠던 어둠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아영은 준후의 빛이었다.

“고마워. 아영아. 진심으로.”

-알면 됐어. 나 잘했으니까 빵 많이 사도 돼?

“인심 썼다. 이번만큼은 봐줄게.”

아영과의 통화를 마치고서도.

준후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아영이 남긴 여운이 짙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당직실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준후는 허공섭물의 이치로 수화기를 손에 쥐었다.

-준후 선배, 죄송한데요. 지금 당장 응급실로 내려와 주실 수 있어요?

1년 차 대휘의 목소리가 긴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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