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03화 (302/424)

303화

제58장 골프(3)

“홍 교수 급한 전화야? 조금 있으면 자네 퍼팅 차례인데?”

“다 끝났습니다. 지인이 보험을 들어 달라고 통 사정을 하는 바람에요. 설마 제게 진료부원장님과의 골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까?”

훈식이 아부성 멘트를 날리며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타석에 선 진료부원장 고상현 근처로 다가갔다.

골프장은 초록빛으로 탁 트여 있었다. 정면에서 초봄의 쌀쌀한 바람이 사선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후우웅!

탁!

상현의 골프채가 시원하게 반원을 그렸다. 하지만 퍼팅 소리가 시원시원했던 것에 반해 골프공은 얼마 나가지 못했다.

허공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간신히 모래 벙커 앞에 떨어졌다.

공의 궤적이 너무 높아서 바람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나이스 샷! 역시 진료부원장님이십니다.”

“자네 지금 나를 먹이는 건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지금 바람에 이 정도 퍼팅이면 예술이죠.”

상현이 나가고 훈식이 타석에 들어섰다.

훈식은 대충 골프채를 휘둘렀다.

공도 대충 날아갔다.

상현의 비거리에 3분의 2쯤 되는 자리에 공이 떨어졌다.

물론 전부 훈식이 의도한 바였다.

“에그그. 공을 너무 낮게 쳤나 봅니다. 바람 때문에 이번 홀은 망했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구먼. 자네답지 않은데?”

“저라고 항상 잘 치겠습니까?”

훈식이 멋쩍게 웃었다.

이윽고 상현과 윤호가 앞장서서 걷고 그 뒤를 훈식과 영태가 뒤따랐다.

“홍 교수. 아까 전화 병원 전화 아니었어?”

영태가 훈식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운을 띄웠다.

“병원 전화 맞아.”

“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 응급 환자 노티한 것 같던데.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부원장님하고 골프 칠 기회가 어디 흔한가? 가긴 어딜 가?”

훈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남들에게는 이 자리가 단순한 유희거리 일지 몰라도 훈식에게는 아니었다.

훈식은 이 자리에 목숨을 걸었다.

진료부원장에게 잘 보여서 잃어버렸던 과장 자리를 탈환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어린 후배 놈이 자신의 윗대가리에 앉아서 지시하는 꼬라지를 대체 언제까지 견디란 말인가.

“그래도 나중에 문제 생기지 않겠어? 오늘 일이 시덕이 귀에 들어가면 시덕이가 가만있겠냐고.”

영태가 현 과장이자 후배인 시덕의 이야기를 꺼냈다.

시덕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훈식은 짜증이 솟구쳤다.

“가만히 안 있으면 지가 어쩔 건데? 뭐 나를 자르기라도 할 거야?”

“…….”

“자네도 한번 생각해 보라고. 내가 병원에 복귀하는 게 빠른지, 아니면 환자가 다른 병원에 가는 게 빠른지 말이야.”

“…….”

“하긴 수술도 없는 내과의인 자네가 내 마음을 이해할 리가 없지.”

“어허. 말이 좀 심하네?”

“내가 틀린 말 했나?”

훈식이 막말을 하자 영태가 혀를 찼다.

훈식과 적당히 거리를 벌린 채 입을 꾹 닫고 걷기만 했다.

쪼잔한 인간 같으니라고…….

홀을 가로지르는 동안, 훈식의 손은 연신 바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바빴다.

당직 근무 때 골프장에 온 게 조금 찔린다만…….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준후 녀석만 입을 꾹 닫으면.

* * *

“와.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인가?”

훈식과의 대화를 마친 준후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있는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당직 근무 중에 골프장을 간 것도 모자라 훈식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렸다.

1) 환자를 당장 다른 병원에 이송 보내라.

2)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준후만 알고 있어라.

즉, 이번 사건을 아예 묻어버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없었다.

준후가 지금까지 경험한 교수들 중, 훈식은 단연코 1등이었다.

물론 나쁜 쪽으로 말이다.

훈식의 지시를 따르느냐.

훈식의 지시를 거부하느냐.

준후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든 빨리 선택을 내려야 했다.

환자에게는 시간이 부족했다.

마음이 기우는 쪽이라면 당연히 후자였는데 선택이 쉽지 않았다.

훈식이 골프장에 있었으므로 수술을 집도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준후가 척추 동정맥 기형 수술을 혼자 집도할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경추·요추 파트는 이제 막 공부를 시작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후자를 선택하는 순간, 준후는 영영 훈식의 눈 밖에 날 것이다.

레지던트가 교수에게 찍힌다?

이는 자신의 앞길에 똥물을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파견을 나온 상황이라도 그랬다.

하지만 후자야말로 진정한 환자를 위한 길이었다.

전자를 선택한다면 환자는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칠 게 분명했다.

“선배. CT 촬영하고 왔는데. 진짜 대박이던데요?”

때마침 환자의 침상을 끌고 응급실로 복귀한 대휘가 준후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머리가 아니라 허리에 문제가 있더라고요. 진단검사의학과 의사가 우리 환자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했어요.”

흥분한 대휘의 언성이 올라갔다.

“역시 준후 선배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니까요?”

“뭐야? 촬영 전까지는 나를 영 못 미더워하더니 갑자기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뱁새가 어디 참새의 뜻을 알겠어요? 하하하.”

대휘는 멋쩍게 웃으며 준후를 우러러보았다.

두통의 원인을 허리에서 찾는 대담함.

보호자의 반대를 무릎 쓰고 검사를 강행했던 강단.

준후는 그야말로 외과 의사의 표본 같았다.

아마 3, 4년 차도 준후처럼 환자의 질환을 명쾌하게 짚어내지는 못했을 거라고 대휘는 확신했다.

그래서 준후를 더 닮고 싶었고.

“근데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야.”

“네? 무슨 문제요? 수술 들어가면 그만이잖아요.”

“홍 교수님이 당직인데 지금 골프장에 있댄다.”

“네? 골프장이요?”

이어지는 준후의 설명을 듣는 동안, 대휘의 눈동자는 당장 빠져나올 것처럼 커졌다.

“심지어 전원을 시키래요? 미쳤네요. 홍 교수님.”

“내 말이 그 말이야. 머리 아파 죽겠어.”

“그래도…… 저희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교수님이 까라면 까야지.”

축 처진 어깨로 대휘가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어쩔 수가 없잖아요. 애초에 수술할 사람도 없고.”

“수술할 사람이 있으면?”

“설마 선배가 직접 하시려는 건 아니죠?”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나도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안 돼.”

“그럼 이야기는 더 하나 마나 아닌가요?”

대휘의 지적에 준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방법을 선택하면 앞으로 훈식과 영원히 원수가 된다는 단점이 있을 뿐.

“근데 아무래도 나는 양심에 거슬리는 짓은 못하겠다.”

“선배,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일단 과장님한테 연락하고 정형외과에도 연락해 보게. 경추·요추 파트면 정형외과와도 연결이 되니까.”

“와!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정형외과에 SOS를 치면…….”

박수를 치며 기뻐하던 대휘가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근데 그러면…… 홍 교수님이 골프장에 갔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아요?”

“당연히 그러겠지.”

“선배, 홍 교수님한테 찍혀도 괜찮겠어요? 홍 교수님 뒤끝 장난 아닌데.”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외과 의사가 되었나?

라고 준후는 조금 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고통스럽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의사가 됐다는 대답이 내면에서 들려왔다.

만약 현 상황에서 환자를 이송 보낸다면 준후는 외과의를 선택한 숭고한 의미를 배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할 용기가 준후는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선배. 홍 교수님이 거지 같은 인간인 건 아는데요. 선배도 적당히 몸은 사려야죠.”

대휘가 평소답지 않게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파견 나왔다가 봉변만 당하고 돌아가실 거예요? 이건 아니잖아요.”

“대휘야.”

“네. 선배.”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난 말이다. 교수한테 찍히지 않으려고 외과의 된 거 아니다. 아픈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외과의가 된 거지.”

몸이 꺾일지언정 신념은 꺾일 수 없다고 준후는 믿었다.

준후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대휘에게 라스트 오더를 내렸다.

“수술 동의서 출력해서 보호자한테 사인받아. 수술방은 내가 잡았으니까 잡을 필요 없고.”

* * *

준후의 확고한 결정으로 전개는 급물살을 탔다.

일단 준후는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파했고 사실을 인지한 과장은 수술을 집도할 정형외과의를 직접 수배해 주었다.

한편 준후가 불안했는지 훈식이 몇 차례 준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준후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

딱히 훈식을 회피한 것은 아니었다.

훈식과 통화를 하면 화가 나서 수술 어시스트에 집중을 못 할 것 같아서였다.

터벅. 터벅.

수술실로 향하는 도중.

준후는 뇌신경 자극 점혈법을 펼쳤다.

파바바밧!

왼손 검지가 브로카 영역이 위치한 전두엽과 베르니케 영역이 위치한 후두엽을 자극했다.

내공에 뇌 영역이 공명하면서 수십 개의 전구가 켜진 것처럼 머릿속이 밝아졌다.

그 상태에서…….

준후는 휴대폰에 저장해둔 스승 재현의 경추·요추 비급 노트를 속독했다.

뇌가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였다.

단어 하나하나가 도장처럼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준후의 검지가 후두부를 짚었다.

내공 점혈법으로 시각 중추를 자극한 것이다.

그러자 경추 동정맥 기형 수술을 집도하고 있는 재현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수술방으로 이동하는 그 짧은 순간에 준후는 자신이 어시스트를 맡은 수술에 지식을 모조리 흡수하고 시각화까지 끝내 버렸다.

무림에 내공 자극술에 현대 뇌 과학 지식이 만나면서 경이로운 시너지가 폭발한 것이다.

‘이만하면 충분해.’

선행 학습을 마친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들어가는 수술이지만 수술을 맡은 정형외과의의 발목을 잡지 않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잠시 후 도착한 수술실.

준후는 계수대에서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하고 소독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가운과 장갑, 루뻬 등을 착용했다.

비록 훈식과 원수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오늘의 선택을 영원히 반복할 거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선생님. 오늘 완전 똥 밟으셨던데요?”

준후를 돕던 간호사가 딱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문이 벌써 수술실에도 퍼진 모양이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죠. 별로 신경 안 씁니다.”

“그래도요. 근데 선생님…….”

간호사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신경외과 홍 교수님도 문제인데 오늘 수술 같이하는 남궁혁 선생님도 만만치 않아요.”

“…….”

“별명이 레지던트 킬러예요. 처치 하나만 실수해도 바로 불호령이에요. 하도 레지던트 선생님들 기를 죽이고 다녀서 정형외과 과장님한테 지적도 받았어요.”

“그럼 실수를 한 번도 안 하면 그만 아닌가요?”

“에이,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수술도 보통 어려운 수술이 아니던데.”

“직접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준후는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무림에서 남궁세가 인물들과 친했기 때문일까.

교수의 성씨가 남궁이라는 점도 괜히 마음에 들었다.

지이이잉.

3번 수술방 문이 열리고.

채비를 다 갖춘 준후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발걸음은 씩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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