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제58장 골프(4)
‘첩첩산중이군.’
정형외과 당직 교수 남궁혁은 한숨 쉬며 수술실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신경외과 과장이자 의대 동기인 시덕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척추 동정맥 기형 환자가 들어왔는데 신경외과 대신 수술을 해달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시덕이 농담을 한다고 남궁혁은 생각했다.
경추·요추 파트는 신경외과와 정형외과의 진료가 겹치는 파트였다.
자칫 분쟁이 벌어질 수 있어서.
하루는 정형외과가 경추·요추 파트를 보고.
그다음 날에는 신경외과가 진료를 보는 퐁당퐁당의 원칙을 굳게 지켜왔다.
그런데 시덕이 그 원칙을 깨겠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뿐, 속사정을 듣고 나니 기가 막혔다.
당직 교수가 자리를 비우고 골프를 치러 갔단다.
문제의 당직 교수는 병원 내에서도 유명한 뺀질이 훈식이었고.
“교수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남궁혁의 한숨을 듣고 윤기가 물었다.
남궁혁을 바라보는 윤기의 눈동자가 순진무구했다.
윤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1년 차였다.
3·4년 차는 죄다 세미나에 갔고 2년 차는 병동을 지키도록 말뚝을 박아놓았다.
“수술이 만만치 않구나. 응급 척추 동정맥 기형 환자는 집도가 까다로워. 게다가 지금쯤이면 혈관 몇 개가 터졌을 수도 있단다.”
“아…… 그럼 수술 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신경외과에서 저희 탓을 하는 거 아닙니까?”
윤기가 걱정하며 물었다.
“그건 탓이라고 볼 수 없어. 윤기 너, 앞으로 사고방식을 고쳐야겠구나.”
“…….”
“일단 수술실에 들어가면 그 수술은 내 수술이야. 책임감을 가져야지.”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렇게 배우는 거지.”
말을 마치고도 남궁혁은 한참 동안 윤기를 쳐다보았다.
남궁혁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2년 차로 어시스트를 바꿀까 생각했던 것이다.
2년 차도 못마땅한 건 마찬가지만 적어도 윤기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2년 차를 수술실로 데리고 오면 병동에 문제가 터졌을 때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게임으로 비유를 하자면 아군을 도와주러 갔다가 본진이 터져 버리는 상황이랄까.
“그래도 조금은 안심입니다.”
“안심? 이 상황에서 그런 한심한 말이 나오니?”
윤기의 입에서 튀어나온 경솔한 단어에 남궁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게…… 이번 수술에 준후 선배가 어시스트를 한다고 해서요.”
“준후? 그게 누구니?”
“신경외과 2년 차 어시스트입니다.”
“1년 차인 너야 2년 차가 대단해 보이겠지만 2년 차도 그렇게 아는 게 많지는 않아.”
“준후 선배는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의대 다닐 때부터 전설로 불렸거든요. 전체 수석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환자들도 엄청 치료하고 다녔습니다.”
윤기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교수 회의 때 ‘준후’라는 이름을 몇 번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진단 난이도가 최상위권인 척추 동정맥 기형을 알아차린 사람도 준후였고.
하지만 남궁혁은 준후를 믿지 않았다.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란다. 그런 것에 휘둘리지 마.”
“……네.”
윤기의 목소리에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잡담을 나누면서 도착한 수술실.
남궁혁은 계수대로 이동해서 윤기와 함께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실시했다.
내색은 안 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마음이 급했다.
환자의 생명이 계절이라면.
지금, 초겨울의 상황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소독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수술모, 수술 장갑, 수술 가운 등을 착용하고.
남궁혁은 빠르고 짧은 보폭으로 수술방에 진입했다.
걱정 반, 불안 반으로 도착한 수술방의 풍경은 정갈했다.
환자는 수술대에 누워 있었다.
환자 감시 장치가 연결되어 있었고 중심정맥관도 연결되어 있었다.
수술대 양옆으로 드레싱 카트가 두 대씩 놓였으며.
모니터에는 환자의 응급 CT 영상이 띄워져 있었다.
수술대와 조금 떨어진 커튼 뒤 공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취의도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다 차려진 밥상 위에 남궁혁은 수저만 들면 되는 상태였다.
“네가 혼자 수술 세팅을 했니?”
집도의 자리에 선 남궁혁이 맞은편에 있던 레지던트에게 물었다.
레지던트는 훤칠한 몸에 맑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네. 교수님. 신경외과 서준후라고 합니다.”
남궁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척 꼼꼼하게 세팅된 수술 도구들을 살폈다.
혈관 수술에 필요한 미세 포셉, 혈관 겸자, 척추 전용 견인기, 내비게이터, 각종 소모품 등등.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한 상이었다.
수술 준비 시간이 길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정확도와 속도를 갖춘 세팅이었다.
이윽고 탐색을 마친 남궁혁의 눈길이 준후에게 머물렀다.
“너. 아주 제법이구나.”
* * *
남궁혁의 도착에 준후는 한 시름을 덜었다.
정형외과의 도움이 없었으면 정말 환자를 전원 보냈어야 했다.
“너. 아주 제법이구나.”
수술 세팅을 살핀 남궁혁이 준후를 칭찬했다.
“2년 차인 데다가…… 신경외과면 요추·수술 어시스트 경험도 그리 많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평소에 틈틈이 공부해뒀습니다. 환자들은 저를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누가 보면 네가 벌써 명의인 줄 알겠어.”
말투는 비꼬는 듯했지만 남궁혁의 눈매는 둥그런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준후의 대답이 맘에 든 눈치였다.
“척추 동정맥 기형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질문하는 남궁혁의 목소리가 깐깐했다.
“교수님을 돕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입니다.”
“환자를 살리려면 네가 잘해야 해. 수술 과정을 짧게 읊어봐.”
“수술 부위를 노출시킨 후 후궁 절제술을 펼칩니다. 그렇게 혈관을 가로막는 구조물을 전부 제거한 후, 기형이 생긴 혈관에 위아래를 혈관 겸자로 잠가줍니다.”
“…….”
“기형 혈관을 절제해 주고 수술 부위를 원복하면 됩니다.”
준후의 대답은 깔끔했다.
국내 최고의 신경외과의 재현의 수술 노하우를 10분 만에 통째로 암기한 준후였다.
수술 개요를 설명하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맹탕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바로 수술 시작하지.”
남궁혁의 지시에 스태프들이 분주해졌다.
정형외과 1년 차 윤기기 준후 옆에 붙었고.
사정이 있어 뒤늦게 합류한 소독 간호사가 남궁혁의 곁에 섰다.
수술에 필요한 조각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본격적인 수술에 앞서 준후는 환자의 바이탈을 한 번 더 체크했다.
체온 36.7.
분당 호흡수 15회.
맥박 145
혈압 160mmHg/120mmHg
맥박과 혈압이 응급실에서 측정했던 것보다 조금 더 상승했다.
혈관 출혈에 징조였다.
이미 잃어버린 피를 보충하기 위해서 혈관이 터지면 신체는 보상기전으로 맥박과 혈압을 높인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준후는 직감했다.
이번 수술은 속도전이 될 것이다.
“윤기 너는 베타차단제와 항고혈압제 투여하고 알부민 수액 추가로 달아.”
“네. 교수님.”
“준후 넌 나를 도와서 곧바로 수술에 들어간다.”
남궁혁의 오더는 깔끔하고 시원시원했다.
골프를 치러 간 누구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집도의가 남궁혁이라면.
이번 수술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이윽고 준후의 손이 바빠졌다.
준후는 일단 유성펜으로 엎드려 누운 환자의 요추 2-3번 자리에 세로로 선을 그었다.
피부 절개선이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준후의 손길에 따라 환자 허리에 빨간 소독액이 발라졌다.
펄럭!
하얀 수술포가 소독된 자리 위로 올라갔다.
수술대를 비추고 있는 무영등의 불빛 때문에 수술포가 차갑도록 하얗게 보였다.
“10번 블레이드.”
준비가 끝나자마자 남궁혁의 손에 메스가 들렸다.
메스가 무심하게 피부 절개선을 따라 움직였다.
준후가 그린 절개선과 메스가 그린 절개선이 한 몸인 것처럼 정확하게 일치했다.
남궁혁의 실력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피부가 갈라지면서 그 옆으로 찔끔찔끔 피가 새어 나왔기에 준후는 거즈로 피를 닦았다.
견인기를 양손에 들고 절개창을 좌우로 벌렸다.
수술 시야가 평야처럼 확 트였다.
준후와 남궁혁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수술 부위를 노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합은 퍼즐 조각처럼 매번 딱딱 들어맞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통했고.
통했으므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됐다.
피하층이 갈라지고.
근막층이 갈라지고.
고정용 견인기가 설치되는 등등.
모든 과정은 순탄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준후도, 남궁혁도 이번 수술에 핵심 포인트가 수술 속도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척추의 최전선.
그러니까 연막이 갈라지면서 마침내 허리 내부의 구조가 드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당연하게 환자의 요추였다.
요추의 정렬은 반듯했다.
뼈 문제가 아니라 혈관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혈압과 맥박이 높아서 예상은 했는데…… 역시 혈관 몇 개가 터져 있구나.”
미세 현미경에 눈을 가까이 댄 남궁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요추 2-3번의 ASA(Anterior Spine Artery, 척추 전방동맥)에서 뻗어가는 몇몇 혈관이 터져 있었다.
혈관의 끝에 검붉은 점이 매달려 있었다.
피가 굳어서 생긴 혈전이었다.
“척추 동정맥의 기형도 예상보다 복잡한 것 같습니다.”
준후도 한마디 보탰다.
“그래. 위치마저 최악이군. 하필이면 측면 동맥인 데다가 근처에 신경까지 지나가고 있어.”
남궁혁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후궁 절제술부터 시도할까요?”
“그래야지. 혈관에 접근하려면.”
“후궁 절제술은 제가 해봐도 되겠습니까? 교수님은 체력을 아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은 고맙다만…… 잘할 수 있겠어? 빠르고 정확하게 해야 하는데 말이야.”
“최소 10번은 넘게 해봤습니다.”
“그래도 응급 환자한테 해본 적은 없을 텐데? 정규 수술처럼 느긋하게 생각했다간 큰코다칠 거야.”
“일단 제가 해보고, 제가 하는 꼴이 못마땅하면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남궁혁이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준후는 양손에 다이아몬드 드릴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본 남궁혁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양손을 쓰겠다고?”
“네. 저는 양손을 다 잘 씁니다. 그리고 한 손보다는 양손을 쓰는 게 훨씬 속도가 빠를 겁니다.”
인턴 시절 ‘바보 소리’를 들으며 익힌 양수 호박 기술이 또다시 활약할 차례가 왔다.
“윤기야. 썩션하고 이리게이션(식염수 세척) 잘해라. 내 속도를 못 쫓아오면 안 돼.”
“아. 네. 선배.”
윤기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준후는 후궁 절제술을 실시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드릴 두 개가 동시에 회전했다.
잔잔한 듯 요란한 회전 소리가 수술방의 모든 소리를 잡아먹었다.
준후의 세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양손에 쥔 드릴이 삼각뿔 모양의 후궁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준후의 머릿속에는 후궁을 완벽하게 절제할 수 있는 설계도가 이미 펼쳐져 있었다.
무려 스승 박재현이 수십 년간 그려놓은 설계도가.
그리고 준후는 그 설계도면을 완성할 실력을 무공으로 갖추었다.
실수?
변수?
그런 것 따위는 절대 발생할 수 없었다.
지금 준후의 손은 그저 낙화유수(落花流水)였다.
양수 호박 기술을 펼치는 와중에 무공 초식의 이치까지 담았던 것이다.
초식의 이름대로 준후의 손목과 손가락 놀림은 흐르는 물처럼 유연했다.
두 개의 드릴은 서로 막힘이 없었고, 거스름이 없었고, 충돌이 없었다.
덕분에 단단한 후궁 뼈가 섬세하고 빠르게 갈려 나갔다.
환자를 살리고 싶다는 절실함.
거기에 경이로운 무공이 더해지자 준후의 활약은 눈부실 지경이었다.
마침내 후궁 절제술이 막을 내렸다.
절단면은 자로 잰 것처럼 말끔했으며 인근 신경과 혈관의 손상은 없었다.
고작 3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