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제59장 태산압정(1)
“하는 꼬라지를 보면 네가 아니라 그 양반이 과장 같던데? 임원 회의며 어디며 안 끼는 데가 없다고.”
남궁혁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나도 좋아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잖아. 윗선을 꽉 잡고 있는데.”
“너도 이 기회에 골프나 좀 치러 다니는 건 어때?”
“염병. 외과 의사가 골프 칠 시간이 어디 있어? 내가 골프치면서 아부나 하려고 의과의가 된 줄 알아?”
“그럼 홍 교수부터 똑바로 손보든가.”
남궁혁의 비수 같은 지적에 시덕은 잘근잘근 입술만 깨물었다.
맞는 말이긴 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신경외과의 실세는 훈식이었다.
시덕은 마치 명예 과장 같은 느낌이었다. 훈식의 그늘을 아직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서 훈식만 떠올리면 속이 답답했다.
남들은 왕이라고 인정을 안 하는데.
혼자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자괴감을 느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시덕은 과장 자리를 훈식에게 다시 양보할 수 없었다.
훈식의 기분과 인맥으로 의국이 돌아가는 꼴을 두 번 다시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좋은 계획이 있어.”
“무슨 계획.”
“안 그래도 오늘 건수 잡았잖아. 당직 근무 째고 골프 치러 간 거. 이거면 괜찮은 이슈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네. 웬일이냐?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던가?”
“열심히 사는 친구를 비아냥거리지 말아 주라. 넌 왜 이렇게 나한테 삐딱하냐?”
시덕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사서 고생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 과장 자리 안 맡았으면 이렇게 고생할 리도 없잖아.”
“…….”
“그냥 수술만 열심히 하면 속 편한데.”
남궁혁이 말을 마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딱하다는 눈빛으로 시덕을 응시했다.
“너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내가 뭘?”
“너희 과장님은 사람이 좋잖아. 그러니까 밑에 사람도 편하지. 훈식 과장 밑에 있었으면 너도 매일 들들 볶였을 거다. 수술 실적하고 논문 실적 올리라고.”
시덕은 은근하게 돌려서 남궁혁을 깠다.
외과의는 수술만 잘하면 된다?
그건 의국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실적으로 쪼여대기 시작하면 몸도 걸레가 되고 마음도 걸레가 되어 너덜너덜해진다.
오죽하면 과장 생각이 없던 시덕이 훈식이 부재했을 때 바로 과장에 도전했겠는가.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네. 그건 그렇고 너 앞으로 준후 좀 신경 써줘야겠다.”
남궁혁이 화제를 돌렸다.
“준후는 왜? 일 잘한다며.”
“아까 머리 잘 돌아간다고 했던 거 취소.”
“네 멋대로 인정하고 취소하지 말아 줄래?”
“생각해 봐. 훈식 교수가 골프 치러 간 걸 까발린 사람이 누구냐? 준후잖아.”
남궁혁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척추 동정맥 기형 환자? 솔직히 다른 병원에 전원 보냈어도 돼. 아마 훈식 교수도 준후한테 그렇게 지시했겠지. 그런데 준후가 그걸 무시하고 너한테 연락한 거야. 환자가 응급이니까 어떻게든 우리 병원에서 수술하려고.”
시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많이 치사하긴 했지만 우리 병원에서 꼭 환자를 수술할 필요는 없었다.
응급 환자 돌리기는 대형 병원과 대학 병원에서도 자주 벌어지곤 하니까.
“그러네. 이번 일로 준후가 훈식 교수한테 단단히 찍히겠어.”
“알았으면 신경 좀 써라. 응?”
“알았어. 나도 그 정도 힘은 있다.”
남궁혁과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시덕은 곧바로 카페를 떠나 신경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 * *
“선배, 진짜 고생하셨어요.”
준후가 신경외과 당직실로 복귀하자 1년 차 대휘가 준후를 반갑게 맞았다.
당직실 의자에 앉은 준후의 등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뭐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서비스가 좋아?”
준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방금 말한 그대로예요. 척추 환자 때문에 고생 많으셨잖아요. 진단하랴, 과장님께 노티하랴, 어시스트하랴.”
“…….”
“만약 선배가 없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걸요?”
대휘는 호들갑 아닌 호들갑을 떨었다.
준후가 파견을 나오면서 대전 신경외과 의국이 그나마 제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이제 준후 없는 의국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대휘였다.
“의과의가 진료보고 수술 보는 거 당연한 거 아니니?”
“그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았던 곳이 우리 의국이잖아요. 선배도 지금까지 경험해 본 게 있으니까 아시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러네.”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전 신경외과 의국은 솔직히 개판이었다.
3년 차는 군기 반장이랍시고 애들을 때리고.
2년 차는 탈주하고.
4년 차는 본인의 보신에만 관심이 있었다.
과장은 정작 힘이 없고.
실세라고 할 수 있는 훈식은 정신머리가 썩어 있었다.
의국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수술은 잘 끝났어요?”
“생각보다 훨씬 잘 끝났어. 환자 경과 문제로 말 나오는 일은 없을 거야.”
“역시 준후 선배예요. 선배가 어시스트 하는 동안 제가 척추 동정맥 기형 수술 알아봤거든요?”
대휘가 속사포로 말을 계속했다.
“질병이 희귀해서 연습할 기회가 없고, 수술 방식도 엄청 까다롭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걸 캬- 선배가 소화하다니.”
“너도 배우면 할 수 있어.”
“할 수 있기야 하겠죠.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대휘의 목소리가 밝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무기력하고 우울한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3년 차의 폭력을 막아주니 본래에 쾌활한 성격이 나오는 것 같았다.
녀석, 그동안 맘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드르르륵.
그때 노크 없이 당직실 문이 열렸다.
누군가 싶어서 돌아가는 준후의 고개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이시덕.
휴무임에도 과장이 친히 당직실을 찾았던 것이다.
꽤 의외였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서 과장이 병동을 찾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말이다.
(수술이 끝난 직후 준후는 과장에게 수술이 무사히 종료되었다고 노티한 바 있었다)
“과…… 과장님. 당직실은 어쩐 일로…….”
시덕을 발견하고 놀란 대휘가 말을 더듬거렸다.
“준후 너 잠깐 나 좀 보자. 과장실로 오렴.”
“네. 과장님.”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덕을 뒤따라 당직실로 이동했다.
당직실에 들어서자 시덕이 소파에 앉아서 등을 기댔다.
시덕의 피부는 푸석푸석했으며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덕이 피곤해 보이는 이유를 준후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남궁혁에게 네 이야기는 침이 마르도록 들었단다. 활약이 아주 대단했다지?”
“별말씀을요. 저는 교수님을 곁에서 거든 것뿐입니다.”
“그 완벽주의자 수술을 곁에서 거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란다. 아무나 못 하는 거라고.”
“휴일은 좀 쉬셔야 할 텐데 의국은 어쩐 일이십니까?”
준후가 바로 본론을 짚었다.
그러자 시덕이 상체를 준후 쪽으로 가까이하며 양 팔꿈치를 테이블에 붙었다.
“오늘 일로 네가 많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말이다. 훈식 교수가 분명 널 벼르고 있을 테지.”
“전 신경 안 씁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니?”
어이가 없다는 듯 시덕이 혀를 찼다.
“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저는 애초부터 훈식 교수님하고 잘 안 맞았거든요.”
준후는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시덕과 훈식은 견원지간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훈식을 싫어한다는 속내를 비침으로써 시덕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갖가지 명분과 말싸움으로 얼룩진 무림맹에서 살아남은 준후였다.
정치질은 기본 소양이었다.
“훈식 교수에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니?”
시덕의 표정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어렸다.
“부교수님인데도 수술 실력이 별로라고 느꼈습니다. 듣자 하니 본인 성질을 못 이기면 인턴과 레지던트를 폭행도 하시고요.”
“…….”
“그런 망나니를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크크크큭.”
준후의 돌직구에 시덕이 배를 잡아가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당직실에 퍼졌다.
“당돌한 녀석. 넌 레지던트고 난 과장이야. 근데 지금 무려 내 앞에서 부교수 뒷담화를 까고 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니?”
“네.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네 입으로 말해봐.”
“제가 훈식 교수님이 아니라 과장님 편이라는 뜻이죠.”
“너, 아주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처치나 수술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머리도 비상해.”
준후가 쏘아낸 화살은 정확하게 시덕에게 적중했다.
시덕이 준후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슬슬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도 좋을 듯했다.
“과장님. 사실……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렴.”
“제가 대전에서 경추·요추 수술에 집중하고 싶어서 그런데. 혹시 수술 스케줄을 경추·요추 파트 중심으로 짜주실 수 있을까요?”
뇌종양 파트.
뇌혈관 파트.
이 두 가지 파트는 서울에서 거의 마스터를 하고 대전에 파견 나온 준후였다.
그리고 준후의 다음 목표는 경추·요추 파트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추·요추 수술에 자주 들어갈수록 좋았다.
실전 경험을 쌓는 것과 동시에 교수의 수술법을 초식으로 저장해둘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경추·요추 파트를 전공할 계획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긴 경추·요추 파트 전공이면 설령 병원을 떠나더라도 의원을 차릴 수 있겠지.”
준후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시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곤란하겠어. 너도 알다시피 수술 스케줄이 워낙 꼬여 있잖니? 파견을 나온 너한테만 특혜를 주는 것도 보기 안 좋고 말이야.”
“저는 그저 경추·요추 파트를 중심으로 수술 스케줄을 잡아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경추·요추 파트만 수술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으음…… 그것도 곤란해. 레지던트 수술 스케줄을 그런 식으로 조종하는 건 전례가 없어.”
“하지만 과장님께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능력이 있는 것과 능력을 사용하는 건 다른 영역이란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조급하게 실력을 키울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저는 항상 급합니다. 환자는 저를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준후의 목소리가 비장했다.
신경외과 T.O는 예전부터 부족했고 앞으로는 더 부족해질 것이다.
준후가 하루라도 빨리 실력을 키우지 않는다면.
놓치는 환자가 많아질 것은 자명했다.
지금 준후가 착용하는 팔찌의 주인공이자 의대 동기인 성호처럼.
성호는 T.A(교통사고)를 당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수많은 병원 응급실을 전전하다가 뇌사에 빠지고 말았다.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꼴을 준후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나름 사연이 있나 보구나.”
“네. 과장님.”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란다. 네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
시덕이 딱 잘라 말했지만 준후는 물러서지 않았다.
준후의 손에는 비장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제가 훈식 교수님을 의국에서 내쫓겠다고 약속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뭐? 네가 훈식 교수를 내쫓아?”
시덕의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준후의 발언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준후, 이 녀석. 오냐오냐해 줬더니 결국 선을 넘는구나. 되지도 않는 소리나 지껄여대고.”
놀라움에 물들었던 시덕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기 시작했다.
두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과장님, 솔직히 훈식 교수님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기회에 훈식 교수를 내쫓고 자리를 확고히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면 내가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어. 근데 말이다. 고작 레지던트 2년 차인 네가 뭘 할 수 있겠니?”
“레지던트 2년 차라서 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경추·요추 파트 수술을 전담하면 필연적으로 훈식 교수를 자주 볼 텐데. 그러면 훈식 교수를 쫓아내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도 있고요.”
준후의 눈빛이 자신만만했다.
자신에게 칼자루가 넘어왔다는 것도 이미 확신했다.
“일단 제 계획을 들어나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