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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07화 (306/424)

307화

제59장 태산압정(2)

그 날 저녁, 당직실.

준후는 창가에 서서 깜깜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과장은 준후가 경추·요추 파트 수련하는 것을 최대한 돕기로 약속했고, 준후는 훈식을 반드시 쫓아내겠다고 약속했다.

한낱 레지던트가 무슨 수로 하늘 같은 교수를 권좌에서 쫓아낸단 말인가.

준후의 다짐을 대부분은 허풍으로 치부할 것이다.

하지만 준후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훈식이 가진 못된 버릇.

거기에 준후가 펼칠 비장의 무공.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면 훈식을 혼내는 주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휘이이잉.

문득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와 준후의 머리카락을 희롱했다.

준후의 머리 또한 밤바람만큼이나 서늘했다.

환자를 대할 때는 감정적이지만.

악당을 물리칠 때는 얼음장 같은 준후였다.

준후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당직실에는 준후 혼자뿐이었다.

병동은 잠잠했고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는 별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준후가 의사 가운을 펄럭이며 무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활짝 펼친 두 손바닥이 허공을 때렸다.

이어지는 연속 동작.

오른손은 우측으로 반원을 그리고 왼손은 좌측으로 반원을 그렸다.

어깨와 손목이 달의 곡선처럼 둥글었다.

허공에서 원을 그린 두 손이 원의 바닥에서 만났다.

두 손이 분수처럼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지금 익히고 있는 무공은 작년 가을부터 익히고 있던 호월십이수였다.

호월십이수의 성취는 8성.

대성(大成)인 10성에서 딱 2성이 모자랐다.

그 이치를 쉽게 터득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성장 과정이 너무 더뎠다.

준후의 성취는 올가을에도 8성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걸음도 전진을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대성을 해야 11-0 봉합사로 봉합을 할 수 있을 텐데.

손으로 못하는 처치가 없을 텐데.

초조한 마음이 무공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초식의 이음새가 툭툭 끊어지기 시작했다.

동작들이 반 박자씩 뒤로 밀리거나 반 박자씩 앞으로 당겨졌다.

내공의 흐름도 불안정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깜빡 잊고 열어둔 창가에서 흘러온 달빛이 준후를 비췄다.

순간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달빛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호월십이수를 관통하는 수용(受容)의 이치가 바로 이 느낌인가 싶었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소중한 자식을 품어 안는다는 느낌으로, 준후는 초식을 재해석했다.

마음이 바뀌자 무공의 성격도 바뀌었다.

모든 초식이 둥글고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초식에 맞춰 내공 진기의 운용도 유연해졌다.

준후는 마치 스스로가 보름달이 된 것 같았다.

야광명월(夜光明月).

양 손바닥으로 적을 밀어내는 마지막 초식을 펼치고서 준후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에서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 빛은 명백한 달빛이었다.

달빛으로 샤워를 한 덕분에.

호월십이수의 참 의미를 관통하고 대성까지 이룬 것이다.

“하…….”

준후의 입술이 벌어지며 복잡한 감정이 담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단 하루 만에 8성의 성취를 10성까지 끌어 올릴 줄이야.

깨달음이란 심오하면서도 변덕스러운 것이었다.

한계를 돌파한 준후가 업무용 책상에 앉아 서랍에 있던 봉합 모형과 봉합사, 봉합 도구를 꺼냈다.

스으으윽.

메스로 모형에 일(一)자의 상처를 냈다.

원수와 같았던 11-0 봉합사의 포장을 뜯고.

왼손에는 포셉을.

오른손에는 니들홀더를 쥐었다.

끼기긱. 딸칵.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고정한 준후의 눈이 11-0 봉합사에 머물렀다.

11-0 봉합사는 수술용 봉합사 중에 가장 얇았다.

굵기가 0.01mm로 미세 혈관을 봉합할 때만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다.

예전의 준후는 8-0 봉합사까지만 소화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을 쓰면 실이 영락없이 끊어져 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11-0 봉합사를 쥐고 있음에도 별다른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이상하게 실패할 거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11-0 봉합사가 제아무리 얇다고 한들 달빛보다 더 얇겠는가.

달빛에 취한 눈빛으로.

달빛에 젖은 손으로, 준후는 상처를 낸 모형을 봉합하기 시작했다.

어깨와 손목.

그리고 손가락까지 봉합을 하는데 불편하거나 거슬리는 점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봉합사를 끊어 먹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봉합?

그딴 건 그냥 손이 가는 대로 하면 됐다.

달빛은 누구의 눈치를 보고 쏟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달빛은 스스로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11-0 봉합사로 준후는 모형의 상처를 10바늘가량 꿰맸다.

이 모든 게 걸린 시간은 고작 3분에 불과했다.

중간에 봉합사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봉합사가 상처를 묶어두는 힘은 절묘했다.

매듭과 매듭 간의 간격도 자로 잰 것처럼 일정했다.

준후는 손에 쥐고 있던 니들홀더와 포셉을 손에서 놓았다.

손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달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똑. 똑. 똑. 똑.

새벽 시간에 당직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비밀 사인이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당직실로 들어온 사람은 아영이었다.

떨어진 시간은 2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심적으로는 꼭 2년 만에 만나는 것 같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더 있었다간 준후 네 얼굴도 까먹었겠다.”

“영상 통화도 자주 했잖아. 엄살은.”

“나 정도면 한참 엄살 피울 나이지.”

아영이 씽긋 웃으며 준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영의 손에는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분명 빵일 것이다.

선심당에서 산 빵.

“당직인데도 쌩쌩해 보이네. 그 운기조식이란 걸 했나 봐?”

“맞아. 영양제 먹고 운기조식하면 평생 당직도 가능해. 피곤이 뭔지를 모르거든.”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의 준후를 만들어준 일등공신 중 하나가 바로 운기조식이었다.

외과의 생활을 버티려면 탄탄한 체력과 집중력은 필수였다.

“출출할 텐데 하나 먹을래?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소보루 튀김이야.”

아영이 종이봉투에서 빵을 꺼내며 말했다.

“빵순이씨나 많이 드세요. 저는 빵 생각 없습니다.”

“칫. 나랑 사귀면서 아직도 빵의 매력을 모르다니.”

빵을 먹는 아영의 눈빛이 당직실을 한 바퀴 훑었다.

“당직실은 서울이나 대전이나 큰 차이가 없네?”

“맞아. 퀴퀴하고 지저분한 건 거기서 거기야.”

“근데 저건 뭐야? 봉합 연습했어?”

호기심이 생겼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아영이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영은 모형을 살피다가 별안간 켁켁거렸다.

“아영아. 괜찮아?”

“괜찮기도 하고 안 괜찮기도 해.”

아영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을 계속했다.

“준후야, 너 설마 11-0 봉합사로 봉합 연습했어?”

“맞아. 꽤 깔끔하지?”

“와…… 11-0 봉합사면 명의라고 불리는 교수님들도 헤매는 굵기 아니야? 그걸 벌써 해냈다고?”

“…….”

“가만 보니까…… 봉합이 어설픈 것도 아니고 일반 봉합사로 봉합한 것처럼 감촉 같은데?”

“오늘 막 깨달음을 얻었거든. 그 결과야. 앞으로 손으로 하는 처치 중에 못할 건 없을 것 같아.”

“대박이다. 진짜. 나도 무림으로 보내주라.”

“무림이 꼭 좋은 건 아니야.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거든.”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아영과의 대화가 준후는 즐겁고 편안했다.

무림 출신이라는 것을 밝힌 후 속내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져서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줄 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었다.

“기왕 봉합 이야기가 나온 김에 숙제 검사 좀 해볼까?”

“대전에서 만난 첫날부터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

“인생은 원래 가혹한 거야.”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실력 좀 뽐내볼게.”

빵을 다 먹은 아영이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손에 컷 시져(cut Scissors, 봉합 매듭을 자르는 가위)를 손에 쥐었다.

찰칵. 찰칵.

준후가 지어 놓은 매듭을 자르는 가위 소리가 경쾌했다.

다 풀린 봉합사를 치우고.

아영이 봉합할 준비를 했다.

오른손에 포셉을 쥐고, 왼손에 니들홀더를 쥐었다.

이는 왼손잡이의 봉합 세팅인데.

아영이 준후에게 양수 호박 기술을 배운 후부터 왼손 봉합을 연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세팅이었다.

“봉합사는 뭘로 줄까?”

“4-0로 해볼게.”

“괜찮겠어? 6개월 안에 그 정도까지 소화하기는 벅찰 텐데.”

준후의 목소리에 걱정이 배어났다.

“나 있잖아. 선배들한테 바보 소리 들어가면서 맨날 양손으로 가위바위보 했단 말이야. 이 정도도 못하면 억울해서 잠 못 자.”

“그래. 일단 시도는 해보자.”

준후는 4-0 봉합사를 꺼내 포장을 벗기고 아영에게 건넸다.

끼기긱. 찰칵.

아영이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였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손놀림이 제법 야무졌다.

손가락을 어색하게 절거나 힘이 과하게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럼 시작할게.”

선언과 함께 시작된 아영의 왼손 봉합.

열심인 아영을 지켜보며 준후는 내심 경악했다.

아영의 발전 속도는 준후의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지금 봉합하는 모습만 놓고 보면 아영이 원래 왼손잡이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아영 덕분에 준후는 타인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영의 실력은 그만큼 일취월장했다.

그러고 보면 아영도 원래부터 능력자였다.

준후에게 가려졌을 뿐.

인턴 시절 치른 봉합 대회에서 준후 다음으로 2등을 차지했었고, 흉부외과 레지던트와 교수들의 예쁨을 한 몸에 받았다.

“휴. 이 이상은 못하겠다.”

아영이 수술 도구를 내려놓고 두 손을 번쩍 천장으로 들어 올렸다.

꿰맨 바늘은 총 8개.

걸린 시간은 10분.

봉합사가 상처를 오므리는 장력은 적절했으며 매듭 간의 간격도 균일했다.

짝. 짝. 짝.

준후는 별다른 칭찬 없이 박수로 대신했다.

성취를 이룬 것은 준후뿐만이 아니었다. 아영 역시 기적 같은 성취를 이뤄냈다.

“나 잘한 거 맞아?”

“퍼펙트. 완벽해. 이대로만 하면 나도 금방 따라잡겠다.”

“에이, 11-0 봉합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것 같은데?”

“너라면 할 수 있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근데 오른손으로는 어디까지 할 수 있어?”

“5-0까지는 무난해.”

“멋있다. 우리 나중에 명의 부부로 뉴스 나오겠는데?”

준후의 농담에 아영이 배시시 웃었다.

실력 테스트가 끝난 후.

준후는 곧바로 아영에게 추궁과혈을 펼쳤다.

못 본 사이에 아영의 컨디션이 많이 떨어졌을 것을 우려해서였다.

우드드득. 우드드득.

준후는 아영의 어깨·목·허리 등등을 주무르고, 내공을 담은 손가락으로 둥글게 문지르고, 뼈의 정렬도 다시 맞춰주었다.

아영의 콧소리가 야릇했기에.

중간에 주의도 한 번씩 주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준후는 아영의 등허리에 손을 얹었다.

아영에게 진기를 흘려보내며 혈맥의 흐름을 살폈다.

시간이 흐를수록 준후의 이마에 주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영의 혈맥 몇 곳이 꽉 막혀 기의 순환이 원활하지 못했다.

기력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고된 흉부외과 생활 때문이었다.

“아영아. 너 요새 컨디션 별로지?”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아영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야 척하면 척이지. 안 되겠다. 조만간 오프 맞춰서 나랑 몸보신 좀 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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