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08화 (307/424)

308화

제59장 태산압정(3)

신경외과 컨퍼런스 룸.

치프의 진행에 따라 오전 컨퍼런스가 진행 중이었다.

대휘가 입원 환자 브리핑을 하는 동안, 준후는 인쇄물을 한 장 넘겨 수술 스케줄을 미리 보고 있었다.

스케줄 표에 따르면 준후는 뇌수술 2건을 어시스트해야 했다.

수술 1건은 과장 어시스트였고, 나머지는 1건은 뇌혈관 파트 진태의 어시스트였다.

과장이 과연 약속을 제대로 지킬까. 자신을 경추·요추 파트 수술에 꽂아줄까.

준후는 살짝 걱정이 됐다.

준후의 수술 스케줄을 과장 입맛대로 변경한다는 것은 과장이 준후에게 나름 특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주변의 견제나 반발을 피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 수술 스케줄 정리를 하겠…….”

“잠깐.”

치프가 컨퍼런스의 화제를 바꿨을 때, 과장이 용감하게 나섰다.

“수술 스케줄 좀 변경합시다. 서준후.”

“네. 과장님.”

“넌 기존에 배정된 수술 말고 훈식 교수하고 정환 교수 수술에 들어가라. 준후 자리에는 혁재가 들어가고.”

과장이 선언하듯 말했다.

두 교수 다 경추·요추 전공이었으므로 과장이 준후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준후는 책상 아래로 손을 내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 왜 수술 스케줄을 과장님 멋대로 변경합니까?”

훈식이 불쾌하다는 목소리로 딴죽을 걸었다.

“수술 스케줄 관리하는 것도 과장의 업무 아닙니까? 과장이 과장 일을 하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죠?”

과장도 지지 않고 벌처럼 쏘아붙였다.

허공에서 충돌한 과장과 훈식의 눈빛에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는 겁니까? 이유가. 서준후한테 뭐 약점이라도 잡혔어요?”

“홍 교수. 입조심 하세요. 내가 예전에는 당신 학교 후배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엄연히 상관이에요.”

“당신? 과장이야말로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홍 교수님. 참으시죠.”

훈식 곁에 있던 훈식의 오른팔 준서가 씩씩거리는 훈식을 말렸다.

그리고 훈식 대신 차분하게 훈식의 입을 자처했다.

“수술 스케줄을 완전히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습니다. 과장님.”

준서의 질문에 스태프들의 시선이 전부 과장에게 쏠렸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순전히 과장의 몫이었다.

‘과장님이 말을 제대로 못 하면 나까지 덩달아 찍히겠군. 과연 어떻게 대답하시려나?’

준후의 호기심과 걱정이 커져가는 가운데 과장이 운을 뗐다.

“며칠 전 준후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경추·요추 수술을 집중적으로 수련하고 싶다고 알려 왔죠.”

과장의 선택은 의외로 정면돌파였다.

의외의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준후가 봤을 때 자기 패를 남에게 까 보이는 건 하수 같은 행동이었다.

“지금 그 말씀은 준후의 편의를 봐주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되묻는 준서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과장을 바라보는 다른 교수들과 레지던트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상황이 점점 꼬이고 있었다.

“저 사실은…….”

준후가 나서려고 하자 과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회의 분위기가 험악함에도 과장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준후는 과장을 계속 믿어보기로 했다.

“준후가 파견을 나온 후로 우리 의국은 크게 변했습니다. 병동도 수술방로 그럭저럭 굴러가기 시작했죠.”

“…….”

“여러분.”

과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뜸을 들였다.

“파견 나온 후부터 준후가 계속 야간 당직을 서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과장의 지적에 교수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물론 교수들은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레지던트의 당직 따위는 관심 밖이었으니까.

“이재성. 내 말이 틀렸니?”

과장이 치프를 꼭 찍어서 물었다.

“아뇨. 맞습니다. 준후가 당직을 자처해서 지금까지 혼자서 당직을 서고 있었습니다.”

“준후가 파견 온 이후로 달라진 점은 뭐가 있지?”

“병동하고 중환자실 환자 관리가 잘 되고 있습니다. 처방이나 처치, 차트 작성도 안 밀리고 있고요. 솔직히 준후 덕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치프의 설명에 과장이 거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가 이렇게 열심히 또 탁월하게 일을 잘하는데 약간의 편의를 봐주는 게 뭐가 어떻습니까?”

“…….”

“경추·요추 파트 전공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해당 파트 수술을 몰아주는 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

“제가 준후의 수술 스케줄을 바꿨지, 준후가 수술을 안 하도록 따로 뺐습니까?”

과장이 조목조목 설명에 나서자 교수들은 아무도 대꾸를 못 했다.

이제 명분이 과장의 편이라는 것을 준후는 직감했다.

정파 무림맹에서 말싸움이 벌어져도 보통 이런 식이었다.

누구의 명분이 더 많고.

누구의 명분이 더 꼼꼼한가에 따라 결정권이 넘어갔다.

준후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과장은 수완이 좋았다.

그저 훈식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오히려 잘됐네.

홍 교수만 처리하면 대전 의국이 정상으로 돌아오겠어.

앞으로 의국에 펼쳐질 청사진을 그려보고 준후는 속으로 웃었다.

“서준후.”

“네. 과장님.”

“너 앞으로 경추·요추 수술만 어시스트할 거냐?”

“그건 아닙니다. 경추·요추 수술 위주로 어시스트를 하고 일정이 없으면 당연히 뇌종양이나 뇌혈관 수술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자. 그럼 이제 제 결정에 이의가 있으신 분, 손들어주세요.”

과장의 목소리에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 위엄에 짓눌려 교수들은 쉽사리 손을 들지 못했다.

딴지의 제왕인 훈식조차 한 방 먹었다는 듯 똥 씹을 표정을 할 따름이었다.

“그럼 준후의 수술 스케줄 건은 앞으로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다들 동의한 일이니까 나중에 딴말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과장이 준후를 응시했다.

나는 약속을 지켰으니 다음 차례는 너라는 눈빛이었다.

준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된 수술 스케줄 정리하기 전에 뭐 한 가지 짚고 넘어갑시다. 홍 교수님?”

“뭡니까?”

훈식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어제 척추동정맥 기형 환자가 응급실에 온 거 아시죠? 준후가 직접 노티했으니까 모른다고 잡아뗄 생각은 마세요.”

과장의 지적에 훈식의 귓불이 빨개졌다. 볼살이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아는데 왜요?”

“그 환자 응급인데 왜 수술 안 했습니까?”

“수술보다 전원이 나은 상황처럼 보여서 전원을 지시했어요. 그걸 준후 녀석이 따르지 않았고.”

훈식이 준후를 노려보며 말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말이.”

과장이 따져 물었다.

“환자를 전원 보냈다고 칩시다. 그럼 그 병원에서는 당연히 환자를 수술했겠죠?”

“아마도 그랬겠죠.”

“그럼 전원을 보내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우리 병원에서 바로 수술을 하면 되지, 왜 환자를 이송시켜서 수술을 받게 합니까?”

과장의 지적에 훈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본인의 변명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훈식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훈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준후는 깨소금이었다.

골프를 칠 때야 좋았겠지만 그 뒷감당은 지옥일 것이다.

“어제 당직 안 섰죠? 당직을 안 섰으니까 수술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죠?”

“으…….”

“오늘 과장 회의 때 홍 교수의 근무 태만을 보고하겠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적어도 오늘 회의에서만큼은 과장이 훈식에게 판정승을 거뒀다.

* * *

이어지는 컨퍼런스와 회진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훈식이 불편한 기색을 온몸으로 표출했기 때문이다.

다른 교수들은 실세인 훈식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하…… 저 새끼가 결국 사고 치네.’

회진이 끝나갈 무렵, 훈식은 준후를 노골적으로 노려보았다.

본인에게는 아무 죄도 없다고.

본인은 청렴결백하다고.

훈식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왜냐면 준후가 자신의 지시만 따랐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준후가 자신의 지시대로 환자를 전원 보냈다면 오늘 일은 쥐도 새도 없이 묻힐 거였다.

“서준후. 너 잠깐 나 좀 보자.”

회진이 끝났을 때, 훈식은 준후를 컨퍼런스 룸으로 불러냈다.

“어쩐 일이십니까? 교수님.”

훈식과 마주한 준후의 눈빛은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실로 뻔뻔한 눈빛이었다.

“야. 이 새끼야. 내 말이 동네 개소리로 들려? 왜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지X이야.”

목구멍에서 욕지거리부터 터졌다.

말을 하고 보니 더 열이 받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환자 전원 보내라고 했어? 안 했어?”

“전원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제가 봤을 때는 환자에게 당장 수술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과장님께 따로 노티를 한 번 더 드렸습니다.”

“씹X끼가 그걸 변명이라고 해? 과장이 경추·요추 파트 전공이야? 내 말을 따라야지, 왜 멍청하게 과장한테 전화를 해서 일을 키우냐고.”

“죄송합니다. 과장님. 그런데…….”

고개를 푹 숙인 준후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제가 교수님께 노티를 드렸을 때 말입니다. 뭔가 시원시원한 소리가 들렸는데요. 혹시 골프 치고 계셨습니까?”

준후의 당돌한 질문에 훈식의 두 눈이 치와와처럼 동그래졌다.

“야! 너 미쳤어? 그걸 지금 이 상황에서 질문이라고 해?!”

“그냥 너무 궁금해서.”

“이런 개X신새끼. 일만 잘하지 눈치는 완전 밥에 물 말아 먹었구만.”

훈식의 콧김이 뜨겁고 거칠어졌다.

더 이상은 화를 참을 수 없어서 훈식은 냅다 발길질을 했다.

구두코로 준후의 정강이를 걷어찬 것이다.

“으으…….”

“으으윽…….”

두 개의 신음이 동시에 터졌다.

하나는 훈식의 것이었고 나머지는 준후의 것이었다.

준후를 걷어찬 것은 훈식인데 정작 훈식의 발가락이 시큰거렸다. 단단한 바위를 걷어찬 기분이었다.

준후가 내공으로 정강이를 보호했다는 사실을 훈식이 알 리가 없었다.

“뭐야? 너 정강이가 왜 이렇게 단단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도 너무 아픕니다.”

어쨌거나 준후가 인상을 찌푸리며 괴로움을 토로했으므로, 훈식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멍청한 놈아. 한국 사람은 눈치 빼면 시체라고. 앞으로 눈치 좀 챙겨라. 응?”

훈식은 한 번 더 준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번에도 훈식의 발가락 끝이 아려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준후는 고통스러워했다.

허리를 숙여 한 손으로 정강이를 쓸어내리기 바빴다.

준후가 아파하는데 왜 자신이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훈식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끼이이익.

때마침 컨퍼런스 룸 문이 열리고 1년 차 대휘가 안으로 들어왔다.

훈식과 준후 사이에 싸늘한 분위기를 읽고, 대휘가 돌처럼 그 자리에 굳었다.

“김대휘.”

“네. 교수님.”

“너 지금 아무것도 못 본 거다. 알았지?”

훈식이 대휘의 입단속을 지시했다.

“……네.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그럼 가 봐.”

대휘가 떠나기 무섭게 준후가 꼴불견인 모습으로 하소연을 했다.

“교수님. 정강이가 너무 아픕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저번처럼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확실해?”

“네.”

준후의 통사정에 훈식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서 훈식은 짜릿한 쾌락을 맛보았다.

권력이란 초콜릿처럼 달콤한 것이었다.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눈치도 바짝 차려. 파견 끝나고 서울로 가면 땡이라는 안일한 생각도 버려.”

“…….”

“서울에 내 동기 많다. 네까짓 거 묻는 건 일도 아니야.”

“명심하겠습니다. 교수님.”

툭!

훈식은 일부러 준후의 어깨를 툭 치고 컨퍼런스 룸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훈식이 떠나기 무섭게 비굴했던 준후의 표정이 180도 변했다.

먹잇감이 아니라 사냥꾼의 표정이었다.

“협박에, 구타에, 업무 태만에, 3종 세트가 한 번에 다 딸려 들어왔네. 이래서 현대가 좋단 말이지.”

준후는 씨익 웃으며.

가운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의 녹음 종료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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