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09화 (308/424)

309화

제59장 태산압정(4)

“선배 아까는 죄송했어요.”

준후가 당직실로 복귀하자마자 1년 차 대휘가 고개를 푹 숙이며 한 말이었다.

“뭐가?”

준후는 어깨를 으쓱하고 대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선배가 홍 교수님한테 맞는 걸 못 본 척…… 해버렸잖아요. 비겁하게……. 선배는 저 때문에 혁재 선배랑 한바탕 싸우기까지 했는데.”

“그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어. 괜히 자책할 필요 없다.”

“그래도…….”

“인마. 떳떳하게 고개 들어.”

준후의 말을 듣고서야 대휘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대휘의 눈동자는 준후를 똑바로 보고 있지 않았다.

“선배. 홍 교수님한테 단단히 찍힌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해요? 사실상 홍 교수님이 의국 실세잖아요.”

“찍을 테면 계속 찍어보라지. 그러다가 자기 발등이 날아갈 테니까.”

“와…… 선배 진짜 대단해요.”

“갑자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감이 넘칠 수 있어요? 저 같았으면 바로 탈주했을 텐데.”

대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훈식은 ‘악’하기만 한 인간이 아니라 ‘독’한 인간이기도 했다.

한 번 자기 눈 밖에 난 사람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괴롭힐 위인이었다.

실제로 희생자도 있었다.

구서진.

준후가 파견 오기 전까지 2년 차로 근무했던 바로 윗 선배.

그는 훈식에게 찍힌 데다가 3년 차 혁재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레지던트를 그만두었다.

준후가 서진의 뒤를 밟을까 대휘는 두려웠다.

이제 준후가 없는 의국은 상상할 수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휘야.”

“네. 선배.”

“넌 잘 모르겠지만 홍 교수 같은 사람이 제일 상대하기 쉬워.”

“그 반대 아니에요?”

“반대의 반대라니까?”

훈식에게 정강이를 까였음에도 준후의 목소리는 쾌활하기만 했다.

“어째서요?”

“이걸 들어봐.”

준후가 휴대폰을 꺼내 방금 녹음한 따끈따끈한 녹음 파일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대휘의 얼굴에 진 주름은 사라질 줄 몰랐다.

“어때? 꽤 쓸 만한 자료지?”

“그렇기는 한데요…… 녹음 파일 정도로 홍 교수님을 처벌하는 게 가능할까요?”

“…….”

“왠지 나중에 커트 당할 것 같아요……. 홍 교수님이 진료부원장님이나 다른 윗선을 워낙 꽉 잡고 있어서.”

“아니지. 아니지.”

준후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검지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이건 퍼즐 조각 하나에 불과해. 여기에 두 가지 조각이 더해지면 그땐 홍 교수 모가지가 날아갈 거다.”

“이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물론. 내가 설마 녹음 파일 하나로 홍 교수를 잡으려고 했겠니?”

준후는 여전히 자신만만했으나.

그 원천을 대휘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준후의 진면모를 다 아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대휘는 생각했다.

“어쨌거나 저는 선배 편이에요. 선배가 잘되길 바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고요.”

“알아. 그래서 나도 너한테 녹음 파일을 들려줬던 거야.”

“진짜 선배 계획대로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저도 홍 교수 꼴 보기 싫거든요.”

“분명 그렇게 될 거야. 날 믿어.”

준후가 싱긋 웃었다.

그제야 대휘의 걱정도 눈 녹듯 녹기 시작했다.

지금의 의국을 만든 준후라면…….

어쩌면…….

훈식을 내쫓는 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은 그렇게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 대휘야. 나 오기 전에 2년 차였던 레지던트 있다고 했지?”

“네. 서진 선배라고…….”

“연락처 좀 알려줄래?”

“알려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어디다 쓰시려고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잖아. 당연히 복귀시켜야지.”

“그렇게 데였는데 설마 복귀할까요? 우리 의국 쪽으로는 오줌도 누기 싫어할 것 같은데요?”

대휘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준후의 의견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사서 헛고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오기 싫으면 오고 싶게 만들면 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선배. 뭔가 예전에 알던 선배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점에서?”

“으음…… 예전의 선배는 뭔가 정의롭고 따뜻한 느낌이었는데 오늘 선배의 느낌은…… 뭔가 차갑고 속을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아뇨.”

“내가 진짜 열 받았다는 거지.”

말투와 달리 준후의 얼굴은 여전히 웃는 상이었다.

역시 오늘 준후는 이상했다.

대휘는 준후에게 서진의 연락처를 알려주었고, 준후는 본인 휴대폰에 연락처를 저장했다.

“스크럽 다녀온다. 당직실 잘 지키고 있어.”

“네. 선배.”

대휘의 배웅을 받은 준후는 곧장 수술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계수대 앞에서 손가락과 손, 팔뚝을 소독했다.

소독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수술 가운, 수술 장갑, 수술모 등을 착용하고 2번 수술방에 진입했다.

취이이익.

천장에서 쏟아진 소독 가스가 준후의 몸을 휘감았다.

알코올 냄새가 코끝에 은은하게 번졌다.

과장과의 거래 덕분에 대전 파견 기간 동안 경추·요추 수술을 집중적으로 수련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잡을 수 없는 기회.

단 6개월에 한정된 짧은 이 기회를, 준후는 절대 놓칠 수 없었다.

‘호월십이수도 대성했겠다. 이제 거칠 것이 없지.’

수술대로 향하는 준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나흘 뒤, 새벽.

준후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졸고 있는 것도.

명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난 며칠간 어시스트를 했던 경추·요출 수술들을 빠짐없이 복습하는 중이었다.

복습 전에 준후는 후두엽을 내공으로 자극해 시각 회로를 각성시켜두었다.

그래서 눈을 감아 어두운 정면에 수술을 집도 중인 집도의의 모습들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집도의가 쓰는 수술 도구가 무엇인지.

집도의가 손을 얼마나 정교하게 움직이는지.

맞은편에서 자신은 어떻게 어시스트를 하는지 등등.

심지어 원하는 장면을 확대하거나 축소해서 볼 수 있었다.

‘내공 뇌신경 자극 점혈술’을 통해서.

준후는 남들이 발휘하지 못하는 뇌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하는 중이었다.

‘조금 과하긴 한데 한번 해볼까?’

내친김에 준후는 수술까지 집도해 보기로 했다.

눈으로 복습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준후는 머릿속으로 재생 중이던 척추 후만증 수술을 맨 앞으로 돌렸다.

집도의의 존재를 지우고 그 자리에 자신을 대입시켰다.

반신반의하며 해봤는데 그게 정말 됐다.

무려 실전과 똑같은 이미지 트레이닝이 가능해진 것이다.

준후는 환희에 들떠서 척추 후만증 수술을 집도했다.

기억이 닳고 닳을 때까지 수술을 머릿속으로 복기했고.

호월십이수로 인해 무적의 손기술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준후는 상상 속의 수술을 완벽하게 마칠 수 있었다.

‘와! 이게 되네.’

준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머릿속으로 수술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빅뱅급의 대사건이었다.

이는 비단 수술방에서만 수술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준후 혼자서도 얼마든지 수술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천천히 진득하게 성장하면 되지. 굳이 그렇게까지 빡빡하게 수련할 필요가 있어?

누군가는 그렇게 물을 수도 있었다.

거기에 대한 준후의 대답은 ‘yes’였다.

무림에서 죽어갔던 동료들.

그리고 그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봐야 했던 준후의 트라우마는 심연보다 깊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대에서도 비슷한 아픔을 또 겪었지 않은가.

똑같은 괴로움을 겪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하루라도 빨리 성장해야 한 명이라도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을 테고.

그래야만 준후가 겪었던 아픔도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새로운 깨달음에 들뜬 준후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상상 수련을 이어나갔다.

컨퍼런스 시간 즈음해서 대휘가 당직실에 들어올 때까지 말이다.

“선배, 뭐 하세요?”

기가 막힌다는 대휘의 목소리에 준후가 번쩍 눈을 떴다.

수술에 열중했던 나머지 대휘의 발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아, 뭐, 그냥…….”

“선배.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잰걸음으로 다가온 대휘가 준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대휘의 손은 미지근했다.

“으음……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홍 교수 혼내준다고 스트레스 너무 받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야. 절대.”

“안 되겠다. 내일부터 저도 야간 당직 설게요. 선배 너무 힘들어 보여요.”

“걱정해 주는 건 괜찮은데 난 정말 괜찮아.”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공에 손을 휘젓고 있는데 그게 괜찮은 거예요?”

대휘의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준후는 한참 진땀을 빼야 했다.

-내공 뇌신경 자극 점혈술

-상상 수련

이 두 가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었으므로, 눈을 감고 수술하는 시늉을 해봤다고 둘러댔다.

대휘는 못마땅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준후는 십 년 감수했다.

준후가 당직 근무를 고집했던 건 단순히 책임감이나 희생정신의 발로가 아니었다.

준후에게 당직 시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수련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선배, 오늘 오프 아니에요? 슬슬 환복하고 나가보셔야죠.”

“나갈 때 나가더라도 컨퍼런스하고 회진은 참여하고 나서 나가야지.”

“선배 상태를 보면 그냥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대휘야. 나 정말 괜찮다니까?”

준후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전 컨퍼런스와 회진이 모두 끝났다.

외래 진료가 있는 교수들은 외래 진료실로.

수술이 있는 교수들은 수술실로.

레지던트들도 각자의 용무로 흩어지는데.

훈식이 준후를 불렀다.

“서준후.”

“네. 교수님.”

준후는 일부러 군기 잡힌 척하며 훈식에게 다가갔다.

준후와 같이 있던 대휘는 그런 준후를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수술 스케줄 보니까 너 오늘 오프더라?”

“네. 맞습니다. 혹시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훈식이 숱이 없는 옆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학회에 제출할 논문하고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논문이 있거든? 합쳐서 총 4개야.”

“네. 교수님.”

“그거 다음 주까지 자료 정리해서 나한테 메일로 보내. 지금쯤 네 개인 메일로 내 문서가 가 있을 테니까.”

훈식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의도가 노골적이다 못해 투명할 정도였다.

훈식은 저번 골프 사건으로 준후에게 앙심을 품고 이를 복수하려 하고 있었다.

준후가 과장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골프 사건으로 훈식은 10퍼센트 연봉 삭감 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징계 위원회에 연줄이 있어서 그나마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야비한 놈.

날 열 받게 하려고 일부러 오프 날을 골랐구나.

훈식의 의도를 간파했음에도 준후는 실실 웃기만 했다.

“오프긴 했는데 막상 하고 싶은 일이 없었거든요. 뭔가 하늘에서 일거리를 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오. 사고방식이 긍정적인걸? 아주 좋아, 그런 태도.”

“기간 내에 꼭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해라.”

훈식이 준후의 어깨를 두드리고 병동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대화를 엿듣고 있던 대휘가 쪼르르 준후에게 달려왔다.

“사탄도 울고 가겠네. 어쩜 쉬는 날에 맞춰서 논문을 던져주고 가요?”

“…….”

“제가 도와드릴게요, 선배! 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엥? 도와주긴 뭘 도와줘?”

준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준후의 표정을 읽고 대휘는 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논문 자료 정리해야 할 거 아니에요. 논문이 4개씩이나 되면 오늘 오프는 당연히 반납해야 하고 다음 주까지 꼬박 밤새야 할 텐데요?”

대휘의 지적에 준후는 코웃음을 쳤다.

“저 새끼가 시킨 건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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