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제59장 태산압정(5)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준후가 어색하게 웃었다.
쉬는 날이라서 복장을 캐주얼하게 입었다.
검은색 면바지에 따뜻하고 복슬복슬한 재질의 베이지색 니트.
일상복을 입은 모습이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다.
의사 가운이 없어서 허전하고.
목에 청진기가 걸려 있지 않아서 허전했다.
준후는 화장실을 나와 병동을 벗어났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향했다.
오늘의 주요 일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빌런 홍 교수를 물리칠 조력자를 만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스케줄이었다.
둘 다 중요한 일이었다.
[선배는 너무 비밀이 많아요. 저한테는 다 알려주셔도 괜찮아요. 저 삐치는 거 보고 싶으세요?]
바지 주머니에 진동이 와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대휘 녀석이 문자를 보냈다.
내용을 훑으며 준후는 좀 전으로 시간 여행을 했다.
-저 새끼가 시킨 건 안 해.
-당연히 하기 싫겠죠. 교수가 내던진 논문 폭탄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하지만 더럽고 아니꼬와도 해야 하는 일이 있잖아요. 논문 쌩까면 선배는 바로 지옥행이에요.
-…….
-홍 교수가 선배를 괴롭힐 명분을 주는 거라고요.
-말 한번 잘했다. 내 목적이 바로 그거야. 홍 교수한테 무자비하게 괴롭힘당하는 거.
상식을 벗어난 준후의 대답에 대휘가 미간을 좁혔다.
준후가 농담으로 말하는 건지, 진담으로 말하는 건지 헷갈린다는 눈치였다.
-대휘야. 내가 3년 차 혁재 혼내준 거 기억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요. 노예 해방의 날이었는데.
-방식은 그때랑 조금 다르겠지만 결국 혼쭐나는 건 홍 교수가 될 거야. 진득하게 기다려봐.
준후가 대휘를 좋게좋게 타이르면서 대화는 종료되었다.
대휘가 답답해하는 이유를 준후는 충분히 알았지만 그렇다고 계획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계획에 무공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병원 건물을 빠져나오자 머릿속 잡념들로부터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준후는 포근한 아침 햇살을 만끽했다.
출근하는 직원들과 진료를 보러 오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본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본관 건물이 꼭 사람들을 먹어치우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아침.”
맞은편에서 아영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걸음걸이에 힘이 없었다. 아영도 준후처럼 어제가 당직이었고 오늘이 오프 날이었다.
“쯧쯧쯧. 조금만 더 있으면 판다가 친구하자고 하겠다.”
준후의 눈길이 아영의 짙은 다크서클에 머물렀다.
“판다랑 나는 친구가 될 수 없어.”
“왜?”
“나는 너무 바쁜 몸이라서 판다랑 놀아줄 시간이 없거든.”
아영이 준후의 농담을 받아주며 피식 웃었다.
준후는 한동안 말없이 아영을 쳐다보기만 했다.
비록 아영이 스스로 흉부외과의의 길을 택했지만 그 고난의 길을 바라보는 준후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뿐만 아니라 고통도 함께 나누기에.
“왜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쳐다봐? 나, 지금 행복한데.”
“기왕이면 네가 고생을 덜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랬으면 흉부외과 전공을 하면 안 됐지. 근데 난 시간을 되돌려도 흉부외과를 택했을 것 같아.”
아영의 대답이 단호했다.
아영이 차고 있는 목걸이가 햇살을 반사하며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저 목걸이 안에는 아영이 어렸을 때 심장병으로 사망한 아영의 남동생 사진이 들어 있었다.
준후가 가슴에 성호를 묻은 것처럼 아영은 가슴에 남동생을 묻고 있었다.
준후와 아영은 다른 것 같으면서도 꽤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운기조식 가르쳐줄까? 그럼 덜 피곤할 건데.”
“명상도 못 하는데 운기조식은 꿈도 못 꾸지. 난 생각이 많아서 주화입마에 걸릴 것 같아.”
“이야. 우리 아영이 이제 주화입마도 알아?”
“준후, 너 때문에 무협지 공부했어. 나 구파일방하고 오대세가도 알아.”
아영이 거만하게 가슴을 내밀며 대답했다. 잘난 체하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주화입마 이야기하니까 살짝 겁나긴 하네. 그렇다고 내가 24시간 밀착해서 봐줄 수도 없는 거고. 음, 나중에 시간을 따로 빼보자.”
“그래. 근데 우리 오늘 어디 가?”
“벽화마을이라고 있다는데 거기서 바람 좀 쐬자.”
“그 전에 선심당을 들르는 건 어때?”
아영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고 준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전에 가서 빵 잔뜩 사 왔잖아. 또 가?”
“아직 못 먹어 본 빵이 넘쳐 나. 앞으로 최소 10번은 더 가야 할 것 같은데?”
“어허. 그러다 또 역류성 식도염 도질라.”
“고질라보다는 도질라를 상대하는 게 더 낫잖아?”
아영의 아재 개그에 준후가 백기를 들었다.
어쩌면 빵심(?)이야말로.
아영이 고된 흉부외과 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일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대전역으로 이동했다.
선심당에 도착하자 고소한 빵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빵집은 아침인데도 손님이 많았다. 가뜩이나 비좁은 통로를 헤집고 다녀야 했다.
“흐흐~으으응~.”
아영은 콧노래를 부르며 빵 매대 사이를 탐험했고 준후는 빵 쟁반을 든 채 아영의 곁을 따라다니며 수행 비서를 자처했다.
기운 없어 보이던 아영은 빵집에 와서 금방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부디 그게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아영의 옆얼굴을 보며 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저녁 스케줄은 오로지 아영만을 위해 준비했다.
목적은 아영을 제대로 몸보신 시켜주는 것.
하지만 ‘그 무공’을 준후는 무림에서도 펼쳐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살짝 걱정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창피하기도 했고.
준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영의 빵 쇼핑이 끝났다.
쟁반 위에는 어느새 3층 빵탑이 형성되어 있었다.
“회사 동료분들하고 같이 드실 건가 보네요.”
계산대 직원이 수북한 쟁반을 보며 물었다.
“아니요. 저 혼자 먹을 건데요?”
“이 많은 걸 다요?”
“네. 이 많은 걸 다요.”
아영이 확인 사살하듯 대답했다.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물었다.
“혹시 뉴튜브 하시나요?”
“아뇨. 그냥 빵을 좋아해서요.”
아영의 빵밍아웃과 함께 계산과 포장이 끝났다.
두 사람은 가까운 카페를 찾았다.
2인용 테이블이 4개.
4인용 테이블을 2개 갖춘, 다른 매장에서 사 온 빵도 자유롭게 먹을 수 아담한 카페였다.
역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서 본격적인 시식이 시작되었다.
아영의 정신은 온통 빵에 팔려 있었다.
빵을 베어 물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빵을 마시고를 수차례 반복했다.
준후가 빵에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사진은 안 찍어도 돼?”
“사진 같은 거 필요 없어. 빵은 온몸으로 기억하는 거야.”
아영의 대답은 심오하면서 동시에 철학적이었다.
준후는 피식 웃었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그때.
준후의 시선이 창가 끝자리에 위치한 모자(母子)를 향했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치원생, 대략 5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날벌레 같은 것을 잡기 위해 테이블 근처를 난잡하게 돌아다녔다.
그런데 아이의 발걸음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했다.
몸의 균형을 제대로 못 잡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은 찌푸린 상이었고 두 뺨에 희미하게 홍조가 있었다.
“아영아. 나 잠깐 건너편 테이블 좀 다녀올게.”
“그래.”
아영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평소라면 반드시 이유를 물어봤을 텐데 지금의 아영은 빵에게 매혹을 당한 상태였다.
‘이런!’
자리에서 막 일어난 준후가 얼굴을 찌푸렸다.
위태롭게 걸어 다니던 아이의 한쪽 발목이 엇나갔다. 몸의 중심이 완전히 깨지면서 아이의 머리가 테이블 쪽으로 기울었다.
이대로라면 낮은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찧을 게 분명했다.
파바바밧.
청풍보를 밟으며 준후가 카페 통로를 가로질렀다.
아이에게 접근하는데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준후는 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받쳤다.
“어머. 무슨 일인가요?”
아이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후를 응시했다.
준후가 청풍보를 밟으면서 생긴 풍압이 아이 어머니의 앞머리를 휘저었다.
그 덕인지 아이 어머니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이가 넘어질 뻔해서 제가 받쳐줬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아이가 평소에도 잘 넘어져서요. 잠깐 업무 연락이 와서 신경을 못 썼네요.”
“…….”
“호섭아. 엄마가 바깥에 있을 때는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지?”
“네.”
호섭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이가 평소에도 잘 넘어지나요? 혹시 아드님,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6살이요. 그런데 그건 왜요?”
아이 어머니가 되물었지만 준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턱을 쓸어내리며 호섭을 내려다보았다.
6살이면 걷고 뛰는 건 문제가 없어야 하는 나이였다.
호섭의 보행 장애에서 준후는 무언가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
모자를 못 봤으면 모를까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병원 안이 됐든, 바깥이 됐든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치료해 주고 싶은 준후였다.
“간단히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대전 신원대 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 서준후라고 합니다.”
“아. 의사 선생님이시군요.”
“형아. 의사 선생님이에요? 근데 왜 하얀 옷 안 입어요?”
“쉬는 날에는 하얀 옷 안 입어.”
준후는 호섭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호섭의 이마에도 슬쩍 손을 댔다.
이마에 살짝 열감이 있었다.
두 뺨의 홍조는 발열 때문에 생긴 듯했다.
“아드님이 평소 자주 넘어진다고 하셨는데 병원에는 가보셨나요?”
“넘어지는 것 때문에 간 건 아니고 다른 것 때문에 갔어요.”
“다른 이유가 뭐죠?”
준후가 다시 캐물었다.
그러자 호섭 어머니가 팔짱을 낀 채 경계하는 눈빛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저기요. 그런 걸 왜 꼬치꼬치 묻고 그러세요? 제가 무슨 제 아들을 학대라도 하는 줄 아세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거 아닙니다. 호섭이가 뇌 쪽으로 질환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여쭤본 거예요.”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멀쩡한 아이한테 뇌 질환이 있다니.”
“엄마. 뇌 질환이 뭐야?”
호섭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지금은 몰라도 돼. 호섭이 넘어질 뻔한 걸 붙잡아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요. 더 이상은 간섭 안 하셨으면 좋겠네요.”
호섭 어머니가 축객령을 내렸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물러서는 것이 도리겠지만 준후는 그럴 수 없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
준후에게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준후 머릿속에 빨간색 신호등이 켜졌다.
호섭은 어디가 아픈 게 분명하다고.
만약 이대로 호섭과 헤어진다면.
나중에 호섭을 만나는 곳은 응급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준후는 그런 방식의 재회는 결코 원하지 않았다.
“저희 아이, 환자 취급하지 말고 가시라니까요?”
호섭 어머니가 성난 목소리로 준후를 몰아붙였다.
“어머님, 불쾌하신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어머님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겁니다.”
“그걸 아시는 분이 대체 왜 이러세요?”
“딱 3분만 제게 시간을 내주시죠. 그 이상은 시간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손가락 3개를 펼치며 준후가 3분을 강조했다.
내공과 무공을 익힌 준후라면.
병원 바깥이라도 아이를 3분 안에 진료하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