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제60장 계략(1)
스스로를 신경외과 레지던트 차라고 소개한 준후가 끈질기게 진료를 부탁하고 있었다.
서연은 문득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래서 양손 검지로 관자놀이를 둥글게 문질렀다.
의사라면 보통 병원 밖에서는 사람을 치료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요리사가 집에서는 본인 식사를 대충 하는 것처럼.
하물며 호섭이는, 적어도 서연이 보기에 크게 아픈 곳이 없었다.
잠깐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렸을 뿐,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준후의 적극적인 태도를 서연은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맞으세요? 혹시 의사인 척하고 접근해서 영양제를 팔거나 무슨 보험 들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서연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준후가 기다렸다는 지갑에서 병원 명찰을 꺼내 건넸다.
이런 오해를 대비해서 준후는 평일에도 병원 명찰을 가지고 다녔다.
“가만 보자.”
서연은 준후가 보여준 명찰 속 사진과 준후 얼굴을 번갈아 확인했다.
명찰이 조잡하게 위조된 건 아닌지 확인도 했다.
준후를 인정한다는 듯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 선생님은 맞는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러세요?”
“아픈 사람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는 병 같은 게 있습니다.”
“저희 호섭이는 건강하다니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아니라면 다행이고. 아니라면 제가 귀중한 시간을 빼앗은 셈이니 디저트를 사드리겠습니다.”
“그럼 약속대로 3분 안에 끝내주세요.”
서연의 목소리가 새침했다.
“형아. 나 진짜 안 아파요. 그냥 가끔 머리가 띵 하기만 해요.”
“머리가 띵하다고?”
준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네. 가끔요. 아니, 요즘은 조금 자주요.”
“호섭이가 어지럽다고 해서 얼마 전에 동네 의원에 갔었어요.”
서연이 한숨을 쉬며 대화에 껴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그럴 생각이에요. 어느 날 호섭이가 하늘이 빙빙 돈다길래 그냥 장난치는 줄 알았거든요?”
“…….”
“근데 그 뒤로 자주 어지럼을 호소하면서 넘어지더라고요.”
“네. 꽈당했어요.”
“그래서 동네 의원에 갔더니 처음에는 빈혈 같다는 거예요. 근데 피검사를 했더니 또 빈혈은 아니라고 하고요.”
서연은 말을 하면 할수록 답답했다.
호섭이가 아픈 것도 문제였고.
아픈 호섭이를 관리하는 것도 문제였고.
그 두 가지 때문에 본인 일에 지장이 가는 것도 문제였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셨나요?”
“2번째로 간 의원에서는 호섭이한테 심리적인 문제가 있을 것 같다면서 심리 상담을 추천하더라고요. 그래서 심리 상담 센터 예약해놨어요.”
“알겠습니다. 이만하면 필요한 건 다 파악했네요.”
“별로 말씀드린 것도 없는데요?”
“제가 따로 의심하고 있는 질환이 있어서요.”
준후의 태도는 여전히 당당했다.
이곳은 카페였고 호섭을 검사할 이렇다 할 도구도 없었다.
그런데도 준후는 무언가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자신감의 근거를 서연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우리 호섭이는 머릿결이 참 부드럽네? 머리카락도 엄마를 닮았나 보다.”
준후가 호섭의 정수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헤헤. 감사합니다.”
“형도 호섭이처럼 머리가 부드러웠으면 좋겠어. 형은 머리카락이 빳빳한 편이거든.”
“엄마가 야채를 많이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했어요.”
“그래? 형이 야채를 안 먹어서 그랬거나?”
진료를 본다고 하더니.
준후는 호섭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시시껄렁한 잡담만 했다.
그 탓에 준후를 향한 서연의 신뢰도는 밑바닥을 쳤다.
역시 명찰을 위조했나 본데?
“호섭이 어머님.”
잡담을 마친 준후가 서연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갑자기 왜 귓속말을 해요?”
“지금부터 할 말은 아이가 미리 알아서 좋을 게 없어서 그럽니다.”
준후의 목소리가 사뭇 비장했다.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엄마의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한편 호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연과 준후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소아 뇌 질환 중에 ‘아놀드 키아리 증후군’이라고 있어요.”
“뭔가 심각한 이름이네요.”
“증상이 나타났을 때 치료가 안 되면 심각해질 수도 있죠.”
서연이 이해하기 쉽도록.
준후가 아놀드 키아리 증후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의학 용어와 해부학 용어가 나오는 걸 보면 준후는 진짜 의사가 맞는 모양이었다.
“심리 상담 센터 예약 취소하시고요. 당장 신경외과 예약부터 잡으세요. 혹시라도 호섭이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응급실로 오시고요.”
“아. 네.”
서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준후의 진단은 청천벽력이었다.
호섭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빈혈을 앓거나 심리 상태가 불안해서 힘들어하는 줄 알았건만,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기 때문이다.
“형아. 엄마랑 무슨 이야기 해요?”
자신을 따돌린다고 생각했는지 호섭이 칭얼거리듯 물었다.
“형아가 호섭이랑 엄마가 이야기하는 걸 방해했잖아. 그래서 호섭이 뭐 좋아하냐고 물어봤어. 맛있는 거 사주려고.”
“저 케이크요. 치즈 케이크. 치케!”
“그래. 형이 치즈 케이크 사줄게.”
준후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준후가 계산대로 떠난 후.
종업원이 테이블에 와서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놓고 떠났다.
호섭이 서연의 눈치를 보다가 포크로 케이크를 떠먹기 시작했다.
서연은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놀랍게도 준후가 정말 약속을 지켰다.
3분 안에 진료를 끝냈던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연은 휴대폰 검색창에 아놀드 키아리 증후군을 검색했다.
-평형감각의 문제.
-어지러움.
-비정상적인 걸음.
검색된 증상 중에 호섭이에게 포함되는 증상이 무려 3개나 있었다.
서연은 손가락으로 휴대폰 스크롤을 계속 넘기다가 한 대목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근데 이게 말이 되나?’
눈을 의심하게 되는 내용이 있었다.
아놀드 키아리 증후군을 진단하는 데 MRI가 사용된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말이다.
준후는 호섭이를 진단하면서 MRI를 사용하지 않았다.
MRI를 보유한 카페는 지구상에 그 어느 곳에도 없을 테니까.
준후가 진단을 위해 한 행동이라곤 호섭의 정수리에 잠깐 손을 얹은 것뿐이었다.
손이 MRI를 대신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아놀드 키아리 증후군은 실제로 있었고 지금 호섭이에게 딱 맞는 질환이니까.
서연은 준후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그리고 신원대학교 병원 예약 번호를 알아낸 뒤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건너, 건너편에 앉아 있던 준후는 사라지고 없었다.
뭔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 * *
“아이 어머니랑 무슨 이야기 했어?”
카페를 나오는 도중 아영이 준후에게 물었다.
“사실 그대로 말했지. 아이가 아놀드 키아리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엥? 그게 문진으로 가능해? CT나 MRI 찍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손이 어디 보통 손인가?”
준후는 손바닥을 활짝 펼쳐서 아영에게 내밀었다.
호섭에게 펼친 건 ‘내공 뇌 조영술’이었다.
내가 기공의 이치를 사용해.
내공이 두개골을 통과하게 만든 후.
그 내공으로 뇌의 구조와 혈관 등을 꼼꼼하게 훑는, 세상에서 오직 준후만이 가능한 검사였다.
검사 시간은 20초.
결과를 얻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초면 충분했다.
‘내공 뇌 조영술’을 통해 준후는 호섭의 소뇌가 있는 위치가 비정상적으로 작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위치에서 퍼져 나가는 내공의 반향이 지극히 좁았기 때문이다.
“와! 진짜 초능력이 따로 없네.”
역사로 밀려드는 바람에 아영의 머릿결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는 와중에 검사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자 아영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생각해도 사기이긴 해. 그래도 공짜로 얻은 건 아니다? 나 인턴 때 이걸 익히려고 엄청 고생했어.”
“당연히 그랬겠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 준후 잘했어요, 기특해요.”
아영이 익살맞게 말하며 준후의 엉덩이를 팡팡 두들겼다.
준후도 기분이 나쁘진 않아서 잠자코 있었다.
“근데 저 아이는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야?”
“후두공이 그렇게 좁지는 않아. 수술만 제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
“다행이네. 준후 너를 만난 게 천운이야.”
역사 계단을 다 내려오고 난 후.
아영은 한동안 준후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문득 준후의 잘 생긴 외모도.
준후가 가진 능력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근데 준후야.”
“응. 왜?”
“쉴 때라도 긴장을 풀고 있으면 안 돼? 너 아까부터 줄곧 눈이 좌우로 엄청 돌아가는 거 알아?”
“아…… 버릇이라…….”
준후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
산만한 시선 처리는 무림에서 얻은 직업병이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기습을 할지 몰랐으니까.
“근데 호섭이가 넘어질 뻔한 걸 잡아줄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시선 덕분이야.”
“왜?”
“나도 모르게 위기를 감지하고 튀어나갔으니까.”
“뭔가 멋있으면서도 슬프다.”
“멋있는 건 알겠는데 슬픈 건 또 뭐야?”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에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영은 가끔 이렇게 감성적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눈을 뗄 수 없는 게 축복이자 저주 같다고. 지금 같으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겠지만 정작 준후, 너는 한순간도 편히 쉴 수 없잖아.”
“이젠 그러려니 해야지.”
준후가 성호의 팔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도 오래 차고 다녀서 팔찌의 도금이 드문드문 벗겨져 있었다.
긴장의 끈을 한시라도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 준후라고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달갑지 않은 것은 눈앞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약속해. 데이트하는 동안은 나만 보겠다고.”
“뭐래? 정작 본인은 좀 전까지 빵에 한눈팔고 나는 나 몰라라 했으면서.”
“바보야. 그런 건 모른 척해주라.”
“그걸 어떻게 모른 척을 해? 하마터면 선심당 빵을 질투할 뻔했는데?”
아영과 툭탁거리면서 준후는 웃었다.
아영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영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준후에게는 최상의 휴식이라는 것을.
* * *
그 날 오후 4시 20분.
벽화 마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준후와 아영이 다시 대전역으로 돌아왔다.
준후가 아영에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미안. 데이트에 집중해야 하는데 다른 일정을 끼워 버려서.”
“괜찮아. 중요한 일이잖아. 나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사람이라 다 이해할 수 있어.”
“…….”
“나는 설령 남자친구가 빵을 질투한다고 해도 다 받아줄 수 있어.”
“아영아. 너 은근히 뒤끝 있다?”
“아니. 그런 거 전혀~ 없는데? 준후 네 착각이겠지.”
너스레를 떠는 아영과 준후는 1시간 뒤에 역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동안 아영은 인근 공원을 둘러보겠다고 했다.
아영과 헤어진 준후는 3번 출구 앞에 위치한 카페를 찾았다.
커피 굿이라는 이름에 카페는 3개뿐인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자리는 다 비어 있었고 계산대에 있는 직원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준후가 안으로 들어가자 원두를 볶고 있는지 고소한 원두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일행이 있는데 음료는 일행이 온 다음에 시켜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직원의 양해를 구하고 준후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바깥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턱이 날카로운 청년이 카페로 들어왔다.
준후가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니 시간이 정확히 4시 30분이었다.
시간을 초 단위까지 계산하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초를 계산해도 4시 30분에서 1-2초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쪽이 서준후십니까?”
청년이 준후에게 다가와 물었다.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으로 의자를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