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12화 (311/424)

312화

제60장 계략(2)

준후는 맞은편에 앉은 청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구서진.

전(前) 신경외과 레지던트 2년 차.

서진이 어떤 사람인지는 1년 차 대휘에게 얼추 들었다.

무뚝뚝하게 자기 할 일에 충실한 소나무 같은 사람.

대휘에 따르면 서진의 업무 능력은 탁월하다고 했다.

준후가 파견 오기 전, 대전 신경외과 의국이 그냥저냥 굴러간 것도 서진 덕분이라고 했다.

성격을 대충 들어서 그런지 외모에도 서진의 성격이 묻어나는 듯했다.

유성펜으로 칠한 것 같은 짙은 눈썹.

넓은 얼굴과 네모난 턱.

표정이 없어서 감정을 읽기도 쉽지 않았다.

“직접 얼굴을 보게 됐으니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대전 파견 근무 나온 서준후라고 합니다.”

“구서진입니다.”

“일단 음료라도 시킬까요? 뭐 드실래요?”

“케모마일 차로 하죠.”

“커피는 안 드시고요?”

“카페인을 마시면 가슴이 뜁니다.”

“카페인 없이 레지던트 생활을 어떻게 버티셨어요? 카페인은 레지던트의 피인데.”

준후가 농담조로 말했지만 서진은 침묵을 지켰다.

본인 취향에 맞는 농담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준후를 경계하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주문을 하고 도로 의자에 앉았다.

서진이 초점 없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휘가 그러는데 대전에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이스 브레이킹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랑 친해지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만든 거 아니잖아요?”

서진은 먼저 칼을 빼 들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내세우는 타입이라는 건가?

서진의 성향을 읽고 준후는 대화 모드를 180도로 변경했다. 허리를 펴고 서진과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논쟁이라면 준후도 자신 있었다.

무림맹은 세 치 혀가 검인 곳이었다.

혀라는 검을 잘못 휘두르면 항상 피해를 보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맞아요. 서진 씨랑 친해지고 싶어서 부른 거 아닙니다. 용건이 있어서 보자고 했죠.”

“…….”

“더 정확히 말하면 협조를 구하고 싶습니다.”

“협조요? 갑자기?”

“홍 교수 아시죠?”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죠.”

서진의 무뚝뚝한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홍 교수가 화제로 튀어나오자 서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조만간 홍 교수를 몰아낼 건데요. 서진 씨가 지원사격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참나, 어이가 없네.”

“뭐가 어이가 없습니까?”

“아니. 레지던트가 무슨 수로 교수를 의국에서 쫓아내요. 당신 미쳤어요?”

서진은 어림 반푼 어치도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교수는 레지던트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 권력자였다.

설령 수련 중에 다른 병원으로 도피한다고 해도 교수의 입김은 피할 수 없었다.

의료계 바닥은 워낙 좁아서 두세 다리만 건너면 서로 다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도망친 병원에서도 찍힌 교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었다.

“제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은데요? 제가 헛소리나 하려고 서진 씨를 부른 것 같습니까?”

“에이씨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느낌이 싸했는데. 오지 말걸 그랬네.”

서진이 혼잣말을 했지만 사실 준후가 다 들으라고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

“방금 그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전 갑니다.”

“앉으세요. 후회하기 싫으면.”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준후가 목소리로 잡았다.

“후회? 그쪽하고 대화를 계속하면 그걸 더 후회할 것 같은데요?”

“홍 교수 이야기가 나오니까 흥분을 가라앉히질 못하네요. 쌓인 게 많으신 거 같은데…… 제가 서진 씨 입장이면 오히려 복수가 하고 싶을 것 같은데요.”

“…….”

“뭐, 비겁하게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도 됩니다. 안 잡아요. 조심히 들어가시죠.”

준후는 일부러 서진을 도발했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인 줄 안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맞는 말이다.

본인이 원하는 게 있어서 상대에게 무조건적으로 맞춰주면 상대는 더 기고만장해진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었다.

“뭐? 비겁? 도망? 당신 말 다했어요?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그럼 서진 씨는 왜 저를 미친놈 취급합니까? 저에 대해 뭘 안다고?”

준후의 역공에 서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해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때마침 종업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테이블에 음료를 내려놓으며 불안한 눈빛으로 준후와 서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종업원은 금방 자리를 떠났다.

그가 놓고 간 음료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준후와 서진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아…… 진짜.”

서진은 신경질을 부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케모마일 차로 목을 적셨다.

기 싸움의 승자는 준후였다.

“앞으로 2주 안에 홍 교수가 큰 사고를 칠 거예요. 서진 씨가 할 일은 그때 언론하고 인터뷰를 해서 홍 교수의 악행을 낱낱이 까발려주는 겁니다.”

“무당입니까?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서진이 가시 돋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불길 같았던 감정은 아까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제대로 된 계획이 있어요?”

“있습니다. 지금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준후가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대화의 기세를 타고 있었다.

“뭐가 어찌 됐든 서진 씨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설령 제 계획이 망해서 홍 교수가 사고를 안 친다고 합시다. 그럼 서진 씨는 지금처럼 지내면 되지 않나요?”

“뭐. 그거야 그렇긴 하죠.”

인정한다는 듯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 교수 쫓아내면 의국으로 돌아오세요. 과장님께 잘 말씀드려서 서진 씨 복귀도 도울 테니.”

사실 이것이 준후의 진짜 의도였다.

엄밀히 따져서 서진이 없어도 홍 교수를 쫓아내는 데는 하등 문제가 없었다.

다만 서진이 홍 교수 쫓아내는 일에 협조하게 된다면 서진은 지난 앙금을 직접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신경외과 의국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일 잘하는 사람이 꼭 필요한데, 복수한 서진이 홀가분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면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그 지옥에 왜 갑니까? 그동안 당한 게 얼만데.”

“홍 교수는 사라질 테고. 3년 차 혁재도 제가 이미 잘 길들여 놨어요. 근무할 맛 날 겁니다.”

“혁재 선배를 길들였다고요? 자기 기분 나쁘면 야구 배트나 휘둘러대는 개망나니를?”

놀란 서진은 눈을 깜빡거렸다.

서진이 탈주를 결심한 이유는 가장 큰 이유는 홍 교수에게 있었지만 혁재에게도 있었다.

혁재는 걸핏하면 후배를 팼다.

서진도 많이 맞았다.

그 탓에 수술 중 실수를 해서 홍 교수에게 찍혔고 그때부터 긴 악몽이 시작되었다.

“못 믿겠으면 대휘한테 전화해 보세요. 혁재한테 전화를 해도 되고요.”

“그나저나 선배한테 잘도 반말을 하네요.”

“친구 먹었거든요. 치프 허락도 받았어요.”

준후의 대답은 가면 갈수록 서진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망나니라고 불리는 혁재를 길들이고, 선배한테 반말을 하다니.

그런데 그 반말 허락을 심지어 치프한테 직접 받았단다. 무언가 소설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

“…….”

태풍처럼 휘몰아치던 대화가 태풍의 눈으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용히 자신의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씩 마셨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를 자신만의 셈법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저는 할 말을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서진 씨는 어때요?”

“저도 더 할 말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홍 교수 내쫓는 일, 도와주실 거예요?”

준후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 * *

터벅. 터벅.

서진은 오렌지빛 석양을 마주한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석양 때문에 서진의 몸도 졸지에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역 주변을 거닐던 서진의 발걸음이 인근 하천을 향했다.

서진은 물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준후를 만나고 생각이 많아졌다.

대부분이 안 좋은 생각들이었다.

홍 교수에게 막말을 듣고, 정강이를 까이고, 논문 폭탄을 떠안고.

비슷한 방식으로 혁재에게 당했던 상처들이 떠올랐다.

서진의 낯빛이 차차 어두워졌다.

-홍 교수는 사라질 테고. 3년 차 혁재도 제가 이미 잘 길들여 놨어요. 근무할 맛 날 겁니다.

그 와중에 준후가 했던 자신만만한 말이 서진을 사로잡았다.

홍 교수가 쫓겨나고.

혁재가 정신을 차렸다면.

사실 서진이 의국에 못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골칫거리가 다 사라진 셈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서진은 의사 생활을 다시 하고 싶었다.

의국에서 도망쳐 보낸 한 달.

그 시간은 서진이 생각한 만큼 즐겁지 않았다.

서진은 자신이 신경외과의라는 사실에 나름 자부심이 있었다.

물론 업무가 말도 못 할 정도로 고되기는 했지만, 환자를 치료하고 처치를 배워가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꼈다.

그런데 병원을 떠나자 그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떤 게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일까.

한참 고민하던 서진은 휴대폰을 들었다. 탈주한 후 처음으로 대휘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휘는 의외로 금방 전화를 받았다.

-서진 선배! 완전 오랜만이에요. 왜 이제야 전화를 주셨어요?

대휘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귓가에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널 혼자 내버려 두고 도망쳤는데 무슨 낯으로 전화를 하겠어?”

-그런 말씀 마세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도 탈주하려고 했거든요.

“너도?”

-네. 근데 준후 선배가 탈주하려는 저를 알아보고 하루 오프를 주더라고요. 덕분에 마음 다잡고 계속 근무하기로 했죠.

“뭔 소리야? 오프를 줬다고? 치프도 못하는 일을 파견 온 인간이 어떻게 해?”

서진이 기가 찬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준후의 기행(?)은 파도 파도 끝이 없었다.

“그러니까 파견 첫날에 본인 일에 네 일까지 다 처리했다는 거지?”

대휘의 설명을 듣고 서진이 정리해서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준후 선배 완전 미쳤어요. 인간도 아니에요.

대휘와 통화하면서 서진은 준후에 관한 것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는데, 대휘는 준후를 완전히 아이돌 모시듯이 했다.

준후에 푹 빠졌다는 것이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대휘가 준후를 신뢰한다면.

서진도 준후를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후가 1년 차이자 의국 최약체인 대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인성에 합격점을 줄 만했다.

서진의 가슴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희망의 싹이 트고 있었다.

“야. 그러다가 숨넘어가겠다. 진정 좀 해.”

-진정이 안 되니까 그렇죠. 그나저나 선배…… 진짜 복귀할 생각은 없으세요? 선배까지 돌아오면 진짜 의국이 든든해질 것 같아요.

“아직 잘 모르겠어. 고민 중이다.”

-준후 선배랑은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대휘가 준후와의 대화를 궁금해했다.

서진의 전화번호를 준후에게 알려준 사람은 분명 대휘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휘가 둘의 만남을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서진은 준후와 했던 이야기를 짧게 요약해서 대휘에게 전했다.

통화는 10분 정도 이어졌고 대휘는 서진이 그립다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자신의 판단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 서진은 마지막으로 악마 혁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복귀와 직결된 문제였다.

혁재도 금방 전화를 받았다.

신호음이 채 세 번도 가기 전에.

마치 서진의 전화를 한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야. 서진아 잘 지냈냐?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한테 너무했던 것 같다. 제발 용서해 주라.

혁재의 반응은 낯설었다.

서진이 아는 혁재는 절대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인간이 아니었다.

더 웃긴 건 혁재의 목소리가 삼류 배우의 연기톤이었고 대사까지 연기 같았다는 점이었다.

이 미친 새끼.

감히 선배한테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튀어? 내가 졸라 만만했나 보다?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처 기어들어 와.

안 그러면 네가 어디서 수련하든 내 인맥으로 널 괴롭혀줄 테니까.

서진의 평소 성격이라면.

이런 식의 말을 속사포로 내뱉어야 정상이었다.

“저를…… 안 혼내시네요?”

-어휴. 뭔 소리야 혼나기는! 내가 혼나야지. 걸핏하면 후배들 때리기만 하고 말이야.

“…….”

-쑥하고 마늘은 안 먹었지만 나도 사람 됐다. 마음 정리하는 대로 편하게 복귀해.

잔뜩 긴장한 것과 달리 혁재와의 통화도 매끈하게 종료되었다.

정말 준후가 의국에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았다.

이게 이렇게 될 수가 있나?

레지던트 2년 차가 무슨 힘이 있다고?

한참 동안 충격을 다스리고 서진은 준후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라도 도울게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