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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13화 (312/424)

313화

제60장 계략(3)

준후와 아영의 오붓한 데이트가 끝난 장소는 영화관이었다.

요즘 대 유행이라는 히어로 영화는 밤 10시쯤 되어서 그 막을 내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준후와 아영도 대열에 합류했다.

키오스크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맞은편에 매점이 있는 로비로 나오자 아영이 화장실을 간다고 했다.

준후를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이 없었으므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늘이 도운 덕분일까.

하루 종일 의국에서 응급 콜이 오지 않았다.

아영에게 미안한 일 없이 데이트를 마칠 수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준후의 손가락이 문자 메시지 창을 툭 건드렸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라도 도울게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서진의 문자 메시지를 읽은 준후는 피식 웃었다.

서진이 놓칠 수 없는 미끼를 던졌으므로 서진은 그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다.

서진과의 미팅이 끝난 후.

준후는 대휘, 혁재, 치프에게 미리 연락을 해두었다.

혹시라도 서진이 연락을 해오면 복귀할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잘 격려해달라고.

셋 다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서진은 의국을 완성할 마지막 조각이었다.

대전 신경외과 의국은 사람이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다.

권역 외상센터로 지정되어 응급 환자가 수시로 몰려드는데 이를 처리할 인력이 부족했다.

준후가 3인분 이상의 활약을 하며 분전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이제, 마지막으로 쓰레기 홍 교수만 남았네.

그거야 뭐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일이니까.

숙적과의 혈전이 코앞이었지만.

준후의 마음은 찜질방에 드러누운 것처럼 편안했다.

놀랍게도 홍 교수를 처리하는 일이 앞으로 할 일 중에서 가장 쉬웠다.

“미안. 늦었지?”

다가오는 아영의 말에 준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안할 것도 없고 늦은 것도 없는데?”

“그런가? 영화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영 집중을 못 했어. 중반부터 닭 졸 듯이 졸아 버렸네.”

아영이 상영관 쪽을 힐끔거리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아영은 영화의 중·후반부를 거의 보지 못했다. 스크린을 본 시간보다 바닥을 본 시간이 더 많았다.

졸다가 침을 흘려서 준후가 닦아준 적도 있었다.

“평소에 피로가 쌓여서 그렇지. 거기다가 오늘은 걸어 다닌 시간도 꽤 길었고.”

“그래도 준후 너랑 같이 있어서 좋았어.”

“빵을 마음껏 먹어서 좋았던 건 아니고?”

“서준후, 진짜 뒤끝 쩐다.”

아영이 꺄르르 웃었고 준후는 어색하게 웃었다.

흉부외과의로서 아영이 피로를 달고 살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곤해하는 모습을 직접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마 아영은 예전부터 준후에게 피곤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오늘은 그 한계치를 넘어버린 것이고.

“나갈까?”

“응.”

영화관을 나오자 번화가의 화려한 불빛이 두 사람을 반겼다. 번화가는 낮보다 저녁이 더 화려했다.

술집은 찾는 직장인과 젊은 남녀들로 거리가 붐볐다.

“오늘은 저기 갈까?”

준후의 검지가 역 뒤편에 있는 한 건물을 가리켰다.

검지 끝에 위치한 건물을 확인하고 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형광색 간판이 빛나는 곳.

그곳은 다름 아닌 모텔이었다.

“나 오늘은 너무 피곤한데? 그냥 헤어지면 안 될까? 머리도 무겁고 몸도 무거워.”

아영은 좋게 돌려 말했다.

당연하게도 준후와 함께 보는 밤이 싫은 건 아니었다. 아영은 그저 많이 지쳐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가자는 건데?”

“저기 가서 손만 잡고 잘 자신 있어? 그러면 갈게.”

“당연히 그럴 순 없지.”

“난 준후 너처럼 체력이 넘쳐나는 무림인이 아니야. 진짜 못 버틸 것 같아서 하는 소리라구.”

“어…… 그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해보면 알 건데 평소랑은 완전히 다를 거야.”

준후가 유난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이런 약한 모습은 처음 봤다.

“진짜 나 한 번만 믿어 봐. 실망 안 시킬 게.”

“으음…….”

아영이 팔짱을 낀 채 새초롬한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준후의 눈빛은 여전히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꿍꿍이는 안개 속에 있었다.

“칫. 오늘 빵만 덜 먹었어도 확실하게 거절하는 건데.”

“오케이 한 거지?”

아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준후가 씽긋 웃으며 아영과 억지로 팔짱을 꼈다. 좁고 으슥한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오늘 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스케줄이 바로 지금부터 펼칠 스케줄이었다.

준후가 아영과 함께 밤을 보내고 싶은 건 준후가 짐승(?)이라서가 아니었다.

나름의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고된 업무로 피곤해하는 아영에게 기력을 보충해 주고 싶은 순수한 목적 말이다.

“근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뭐가?”

“몸을 쓰는데 어떻게 피로가 풀린다는 거야? 예전처럼 마사지해 주게?”

“아니. 그거랑은 차원이 달라.”

“어떤 점에서?”

“요새 무협지 많이 읽어봤잖아. 혹시 ‘채양보양술’이라고 알아?”

준후가 낯선 단어를 입에 올렸다.

* * *

다음 날.

준후와 아영이 모텔에서 나와 쌀쌀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림이라는 곳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대체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아영이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베일에 싸였던 채양보양술은 바로.

남녀가 서로 몸을 섞는 것이었다.

방식 또한 특이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채양보양술이 끝났을 때 아영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놀라운 경험을 했다.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지고 온몸에 힘이 흘러넘쳐서 가만히 누워 있는 게 힘들 정도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당장 42.195킬로미터의 풀 마라톤을 한다고 해도 완주할 자신 있을 정도였다.

“원리는 내가 내 몸에 있는 진기를 아영이 너한테 흘려보내는 거야.”

“그런 거라면 간단하게 손을 잡고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래도 되긴 하는데 서로의 신체가 접촉하는 면이 넓으면 넓을수록 효과가 빠르고 좋아.

“그렇구나. 그럼 지속 시간은 얼마나 돼?”

“술자에 따라 다르긴 한데 내 수준이면 최소 보름은 갈 거야. 주요 혈자리는 물론이고 세맥, 그러니까 작은 혈자리에도 진기를 다 쏟아부었거든.”

“바보. 그런 거면 진작 말을 하지.”

“내 말을 계속 잘라 먹고 의심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영이 고개 숙여 사과하자 준후가 피식 웃었다.

어제와 달리 활기찬 아영의 모습을 보니 준후도 뿌듯했다.

아영의 걸음걸이는 힘찼다.

흐리멍덩했던 눈빛은 초점이 잘 잡혀 있었고 굽었던 어깨는 펴졌다.

판다가 친구를 하자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다크서클 또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사실 준후는 무림에서 채양보양술을 펼쳐본 적이 없었다.

무림맹 서고에서 쓸 만한 무공 서적이 있나 뒤지다가 내용만 슬쩍 훑어봤을 뿐이었다.

그 시절의 준후는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적일도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만 살았었다.

‘배운 건 언젠가 다 써먹게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준후는 또 웃었다.

어쨌거나 아영이 기력을 되찾아서 다행이었다.

아영이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를 타고.

두 사람은 근무지인 대전 신원대학교 병원으로 복귀했다.

“오늘도 파이팅.”

“응. 아영이 너도.”

6층 에스컬레이터에서 두 사람이 헤어졌다. 준후는 6층으로 향했고 아영은 8층으로 향했다.

하루 쉬었다고 흉부외과 업무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작성해야 할 차트만 20개가 넘었고 수술 스케줄도 4시간 이상인 것으로 2개나 잡혔다.

어제까지의 아영이었다면 그 과도한 업무량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아영은 어제의 아영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오늘의 아영은 마르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였다.

체력이 팔팔하니 집중력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실수를 하고 싶어도 도무지 실수를 할 수가 없었다.

준후 덕분에 아영은 무결점의 레지던트로 거듭났다.

* * *

꿀맛 같은 오프가 끝난 후, 준후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의국의 분위기는 여전히 개판이었다.

과장 시덕과 부교수 훈식의 대립이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특히 오전 컨퍼런스는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처럼 부교수 자리에 공백이 생겼는데 시덕과 훈식이 밀어주는 조교수가 달랐다.

자리는 하나인데.

앉고 싶은 사람은 둘이나 되니 다툼을 피할 수 없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부교수 승진 건이 단순히 한 사람을 진급시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승진에 연루된 조교수들은 단순히 들러리일 뿐.

사실은 시덕과 훈식이 의국을 두고 패권 다툼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승자와 패자가 반드시 나뉘어야 했으므로 시덕과 훈식은 서로에게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덕분에 의국 분위기만 살벌해졌다.

하지만 준후는 시덕과 훈식의 싸움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나흘만 지나면.

훈식은 불명예를 떠안고 제 발로 병원을 나가야 했다.

최후의 승자는 시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까맣게 모르는 이 전쟁의 결말은 오로지 준후만 알고 있었다.

시덕의 배려 덕분에.

준후는 경추·요추 파트 수술을 집중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스승 재현이 보낸 준 논문의 실제 케이스를 몸으로 경험하며 차곡차곡 수술 숙련도를 높여갔다.

당직 때가 되면 초식화한 수술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혼자 집도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호섭이가 신경외과에 입원했다.

외래에서 아놀드 키아리 기형 진단을 받았고, 수술 날짜까지 확정되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그 날 카페에서 선생님을 못 봤으면 우리 호섭이 정말 큰 일 났을 거예요.”

“…….”

“그때는 까칠하게 굴어서 정말 죄송해요.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병실에서 마주친 호섭의 어머니가 준후에게 90도로 고개 숙이며 한 말이었다.

준후는 그럴 수도 있다며 보호자를 다독였다.

보호자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난데없이 마주친 신경외과 의사가 본인 아들이 중병을 앓고 말한다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훈식을 쫓아낼 D-2일이 찾아왔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전 준후는 훈식의 수술 어시스트를 맡게 되었다.

훈식은 손보다 입이 뛰어난 집도의였으므로 훈식의 수술에서 크게 배울 것이 없었다.

준후는 처음부터 훈식의 수술 과정을 초식으로 저장해두지도 않았다.

이젠 자신이 어떤 경추·요추 수술을 하더라도 훈식보다 뛰어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서준후.”

수술이 끝나고 수술방을 나가는데 훈식이 준후를 불러 세웠다.

준후를 바라보는 훈식의 눈빛에 불만이 가득했다.

“네. 교수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하…… 이 녀석 졸라 빠졌네. 내가 정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몰라?”

“죄송하지만 정말 모르겠습니다.”

준후는 일부러 고문관 역할을 자처했다.

이에 훈식이 왼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말아 올렸다.

“내가 너한테 논문 정리해놓으라고 지시한 거, 기억하고 있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데드라인이 이틀 뒤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정리 중인 거 맞아? 진행 상항 보고가 전혀 안 된다?”

“분량이 워낙 방대한 데다가 꼼꼼하게 처리하고 있어서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기다리게 한 만큼 제대로 정리해서 보내야 해. 이번에 논문 펑크 나면 나 진짜 곤란해진다.”

“저만 믿어주세요.”

준후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사실 준후는 메일만 딱 한 번 열어봤다.

메일에 첨부된 자료들은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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