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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14화 (313/424)

314화

제60장 계략(4)

훈식과의 이별이 D-2이었던 날 저녁.

당직 근무자인 준후가 신경외과 병동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복도는 환했지만 소등이 된 병실은 어두웠다. 달빛처럼 은은한 조명등이 하나 켜져 있을 따름이었다.

가장 가까운 병실에서 환자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후가 병실로 들어갔다.

미닫이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닫혔다.

코 고는 환자의 목을 준후의 손가락이 솜털처럼 가볍게 건드렸다.

크어어엉 크어어엉 울리던 환자의 코 고는 소리가 뚝 멈췄다.

병실에 평화의 정적이 찾아왔다.

“선생님. 매번 감사해요. 덕분에 요즘 푹 자고 있습니다.”

건너편 침상에서 있는 한 환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실에 있는 환자들의 상태를 눈대중으로 살폈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환자는 없었다.

준후의 발걸음이 다시 다음 병실로 향했다.

야간 라운딩은 10분 만에 끝났다.

적어도 오늘 저녁은 병동에서 응급 상황이 벌어질 확률은 적어 보였다.

문제가 터진다면 중환자실이나 응급실 쪽이 될 것이다.

“라운딩 돌고 계세요?”

복도 끝 창고에서 정민 간호사가 드레싱 카트를 끌고 나왔다. 카트 위에 의료물품이 한가득이었다.

“네. 방금 끝났습니다.”

“근데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두 개에서 세 개까지도 괜찮습니다.”

준후가 너스레를 떨자 정민이 쿡쿡 웃었다.

“선생님이 야간 라운딩 돌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요. 선생님 귀신이세요? 어쩜 그렇게 소리가 안 나요?”

정민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묻어났다.

“정말 귀신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장난치지 말고요.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모든 행동을 최대한 조용하게 하려고 노력해서 그렇습니다. 요령을 알려드리기는 힘드네요.”

준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자거나.

잠에 들려는 환자와 보호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준후는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일단 걸을 때 귀보(鬼步)를 사용했다. 귀보는 기척을 죽이는 보법이었다.

실제로 야간 라운딩을 돌 때 준후의 발에서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밖에 병실 문을 열고 닫을 때.

사소한 처치를 할 때 등등.

그때마다 준후는 내공으로 소리를 허공의 한 점에 붙잡아두었다.

소리가 퍼져 나가는 것을 최대한 막았다.

비록 주 업무가 자객은 아니더라도 무림맹에서 자객 수업을 의무적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아쉽네요. 뭔가 요령을 알았으면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게요. 세상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참 많은 것 같아요.”

“벌써 3주째 혼자 당직 서시는 거 아니에요?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그럭저럭 버틸 만해요. 중간중간 요령껏 자기도 하고요.”

준후는 적당히 힘든 척을 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운기조식과 영양제의 조합으로 1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힘든 내색을 안 해도 의심을 살 것 같았다.

“그나저나 준후 쌤이 야간 당직 말뚝 박으니까 환자들이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

“아프다고 하면 번개처럼 달려오고 처치는 조용하게 하니까요. 오늘 퇴원한 김명오 환자 아시죠?”

“당연히 알고 있죠.”

김명오는 뇌경색 수술을 받았던 65세 노인이었다.

“김명오 환자가 스태프 친절 카드에 선생님 이름 적고 가더라고요. 조만간 친절사원으로 또 뽑히시겠어요.”

“하하하. 그런가요?”

준후는 딱히 환자나 보호자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환자나 보호자의 입장에서 뭐가 불편하고 뭐가 괴로울지 생각하고 그 부분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역지사지하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준후의 탁월한 성취와 성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인지 몰랐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하지 않는다면.

설령 무공과 내공을 갖추더라도.

써먹을 곳이 없는 것 아닐까.

실제로 일반 무림인이 의사가 된다고 한들 밤에 자는 환자를 깨우지 않기 위해 귀보를 운용하는 수고는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마음씨가 고와요?”

“엥? 갑자기 질문이 확 튀는 느낌인데요?”

“전 궁금한 건 못 참거든요.”

“글쎄요. 소중한 사람을 너무 많이 잃어버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대답을 하고 준후는 왼손에 찬 건강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성호의 유품이었다.

성호의 죽음과 함께 무림에서 별이 된 수많은 동료의 죽음이 우르르 준후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적일도에 검에 베인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아파 본 사람이 아파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진리였다.

“뭔가 사연이 있으셨구나. 말씀 감사해요.”

“선생님도 고생하세요. 노티할 거 있으면 언제나 부담 없이 하시고요.”

“넵!”

대화가 끝났다.

정민이 드레싱 카트를 조심조심 끌며 병동 복도를 가로질렀다.

준후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가 컨퍼런스 룸으로 눈을 돌렸다.

컨퍼런스 룸에 불이 커져 있었다.

불나방이 불에 끌리듯, 준후의 발이 컨퍼런스 룸을 찾았다.

원형 테이블 중앙에서 1년 차 대휘가 신경외과 교제를 읽고 있었다.

대휘는 일주일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야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레지던트 1년 차가 의사 수련 중 가장 고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지와 끈기가 대단했다.

“선배, 오셨어요?”

준후가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자 대휘가 준후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잠이 오는 걸 참고 억지로 공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부하는 모습은 멋있는데 그냥 자는 게 낫겠다.”

준후가 대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도 선배처럼 멋있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평소에 열심히 공부해야죠.”

“쉿! 누가 들으면 내가 벌써 교수인 줄 알겠어.”

“들어도 상관없어요. 저는 진심으로 선배를 존경하니까.”

대휘의 눈빛과 목소리가 진심이었다. 재현을 처음 만났을 때, 준후도 아마 지금의 대휘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그쯤 미치자 입가에 괜히 미소가 떠올랐다.

“선배 때문에 알았어요. 한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홍 교수나 혁재만 봐도 알 수 있지.”

“그쪽은 악당이고요.”

대휘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근데 선배.”

“응. 왜?”

“홍 교수님 논문은 다 정리하셨어요? 오늘 홍 교수님이랑 같이 수술했는데 선배 욕을 엄청 하더라고요. 게을러 빠졌다고.”

“논문은 손도 안 댔는데?”

“……이게 선배 작전이었어요? 논문 정리를 안 해서 홍 교수님을 엿 먹이는 거?”

대휘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적어도 대휘가 보기에 준후의 계략은 득보다 실이 많아 보였다.

준후가 논문 정리를 안 하면 홍 교수가 당연히 피해를 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질 집요한 괴롭힘은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홍 교수에게 찍히고 멀쩡하게 레지던트 생활을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수가 각 잡고 레지던트를 괴롭히는데 레지던트가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그건 작전의 일부지. 모레가 되면 내 의도가 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휴~ 선배 속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열 길 사람 속은 알아도, 한 길 선배 속은 도저히 모르겠어요.”

“그게 내 매력이니까. 그리고 모레 나한테 큰일이 벌어질 건데 너무 걱정하진 마. 분명 괜찮을 거야.”

“그 말을 들으니까 더 무서워지는데요?”

“내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하셔. 공부는 잠깐 스톱.”

준후는 대휘에게 추궁과혈을 해주었다.

목에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꽉 막힌 혈류의 흐름을 개통하고.

거북목까지 살짝 교정해 주었다.

해부학적 지식에 무공과 내공이 가미 되면서 준후의 추궁과혈은 무림의 추궁과혈보다 한 단계 진일보했다.

“와. 미쳤다. 너무 시원해요. 어깨까지 가벼워졌는데요?”

대휘가 어깨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머리까지 맑아진 기분이었다. 지금 기세면 밤도 지새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

준후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겼다.

추궁과혈은 분명 피로 회복에 효과적인 기술이었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효과가 일시적이었던 것이다.

지속시간이 3-4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육체에 쌓인 근본적인 피로를 풀려면 운기조식을 해야 했다.

문제는 운기조식을 타인에게 함부로 가르쳐줄 수 없다는 것이고.

“치프한테는 마사지 자주 해주세요?”

대휘가 화제를 돌렸다.

“치프는 왜?”

“치프도 요새 부쩍 피곤해하더라고요. 전문의 시험 준비도 있고 수술 스케줄도 빡세게 잡혀 있어서요.”

“요새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서 그건 몰랐네.”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치프도 피곤할 만했다.

4년 차가 두 명이나 있는 서울 의국과 달리, 대전 의국에 4년 차는 치프뿐이었다.

업무 부담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치프도 신경 써야겠네. 어쨌거나 공부는 적당히 해.”

“네. 선배.”

준후가 떠나면서 컨퍼런스 룸에 대휘 혼자 남았다.

준후의 마사지로 정신을 차린 대휘는 볼펜으로 교재의 내용을 옮겨 적으며 공부에 열중했다.

‘아…… 또 이러네.’

대휘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누군가가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시적으로 숨을 쉬기 불편했다.

숨구멍이 콱 막힌 것 같았다.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솜털은 곤두섰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지만 유지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10초 정도?

그래서 별일 아닐 거라고 대휘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야간 공부는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 * *

다음 날.

훈식을 쫓아내는 계획의 하루 전날.

오전 수술 스케줄을 끝낸 준후가 신경외과 병동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정오였다.

아침에 먹은 게 없어서 속이 허전하다 못해 쓰라렸다.

“준후 쌤. 혹시 바쁘세요?”

스테이션을 지나치는 준후를 민서 간호사가 다급하게 잡았다.

“아뇨. 괜찮은데요. 뭐 때문에 그러세요?”

“처치가 좀 많이 밀려 있어서요. ABGA(동맥혈채혈)하고 나잘 튜브(콧줄 삽입)하고 드레싱 같은 거요.”

“당직실에 대휘 있지 않아요?”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휘는 오늘 수술 스케줄이 없었다. 당직실 붙박이였으므로 병동 관리는 대휘의 몫이었다.

농땡이를 부릴 녀석이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이지?

“전화도 안 받고요. 당직실에 가도 안 보이더라고요.”

“알겠습니다. 일단 밀린 처치부터 끝내죠.”

준후가 민서와 병동을 돌았다.

호월십이수를 10성으로 대성을 하고 머릿속으로 고난이도 수술도 집도하는 준후였다.

1년 차가 해야 하는 처치 정도는 눈 감고 해도 될 정도였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처치들은 고작 5분 만에 모두 종료되었다.

대휘가 도맡았다면 30분은 걸렸을 처치였다.

“역시 준후 쌤. 최고!”

처치를 마치자 민서가 준후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칭찬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준후의 마음은 정작 콩밭에 가 있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대휘가 걱정됐던 것이다.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잠시 후 민서가 드레싱 카트를 밀며 스테이션으로 돌아갔고 준후는 병동 복도 중앙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침 수술을 마친 3년 차 혁재가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혁재야. 대휘 못 봤니?”

준후는 태연히 혁재에게 반말을 했다.

후배를 야구 배트로 쥐 잡듯 잡았던 선배에게는 선배 대접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도 방금 왔어.”

혁재가 준후 눈치를 보며 답했다.

분근착골술에 된통 당한 후, 혁재는 순한 양이 되었다.

“대휘는 왜?”

“어디 갔는지 말도 안 하고 사라졌길래. 일단 당직실 좀 봐주라.”

“나 바쁜데.”

“나는 한가한 줄 알아? 오늘 하루 종일 한 끼도 못 먹었다고.”

“알았어. 가면 되잖아.”

혁재를 당직실로 보내고 준후는 병동을 샅샅이 뒤졌다.

창고, 숙직실, 컨퍼런스 룸.

그 어디에서도 대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준후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직원용 화장실이었는데.

그곳에 찾고 있던 대휘가 있었다.

좌변기가 있는 첫 번째 칸에 대휘가 실신한 듯 쓰러져 있었다.

“김대휘!”

준후의 목청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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