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제60장 계략(5)
경증 환자들이 분류되어 있는 응급실의 A 섹터.
그곳의 한 침상에 특별한 환자가 누워 있었다. 그 환자는 다른 환자들과 달리 복장이 특이했다.
환자인데도 수술복과 의사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똑. 똑. 똑.
환자의 정맥과 연결된 수액의 점액통에서 수액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환자의 이름은 김대휘.
화장실에서 혼절했다가 준후에게 발견된 신경외과 1년 차 레지던트였다.
“죄송해요. 괜히 선배랑 간호사 선생님들 놀라게 해드리고. 게다가 오늘은 수술 스케줄도 빡빡한 날인데…….”
의식을 차린 대휘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푹 쉬어.”
침상 곁에 서 있던 준후가 대휘를 안심시켰다.
“쉬는 건 좋은데 저 때문에 선배가 고생하니까 그러죠.”
“네가 하는 일 몇 개 떠맡는다고 내가 눈 하나 깜빡할 거 같아? 어림도 없어.”
“그래도…….”
대휘가 말꼬리를 흐렸다.
말을 할 때도 그렇고.
말을 하고 나서도 그렇고.
대휘의 두 눈은 준후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갈 곳을 잃은 시선으로 대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응급실 천장은 화장실 타일처럼 새하얬다.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대휘는 몰려오는 잠에서 깨기 위해 화장실을 찾았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좌변기 칸에 있는 화장지로 손을 닦으려는데 강렬한 현기증이 닥쳐왔다.
위이이잉.
귓가에 이명이 들렸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주변이 빙글빙글 돌았다. 바보같이 ‘어어’하는 소리를 내면서 대휘는 쓰러졌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응급실이었다.
“조짐이 안 좋긴 했어. 요새 새벽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공부할 시간이 새벽밖에 없으니까요. 근데 3주째 당직 서는 선배는 정작 멀쩡하고 왜 저만 쓰러져요? 뭐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대휘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묻어났다.
준후는 하마터면 ‘넌 운기조식을 모르잖아’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운기조식은 그만큼 사기였다.
요즘 물건으로 비유하자면 초고속 배터리 충전기였다.
“나도 몰라. 그냥 유전일지도?”
“선배. 아버님도 체력이 좋아요?”
“엄청나시지.”
운기조식을 입에 담을 수 없으므로 준후는 아버지를 팔았다. 아버지 귀가 간지럽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이고. 의사가 환자로 오면 어쩌나?”
한 사내가 침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응급의학과 2년 차 레지던트 승혁이었다.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준후의 대학 동기였다.
“대휘 상태는 좀 어때?”
“피 검사 이상 무(無), 심전도 이상 무, 흉부 엑스레이 이상 무. 온통 무밭이네.”
승혁은 익살맞게 대답하며 준후를 바라봤다.
“루틴 검사만 하긴 했는데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스트레스랑 과로한 것 때문에 미주 신경성 실신이 온 것 같아.”
“하긴 그것 말고 다른 게 없겠지.”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주 신경은 혈압과 맥박을 관장하는 부교감 신경인데, 미주 신경의 기능이 떨어지면 일시적으로 실신할 수 있었다.
준후가 사전에 뇌와 심장을 내공으로 검사한 결과.
대휘에게 별다른 문제점을 찾지 못하기도 했고 말이다.
“선배. 저 바로 근무 투입해도 되나요? 지금은 팔팔한데요?”
대휘가 의욕이 넘치는 눈으로 승혁에게 물었다.
“인마. 팔팔은 64고. 너 최소한 반나절은 쉬는 게 좋아. 그동안 쌓인 게 얼마나 많았으면 실신을 했겠니? 응?”
“…….”
“가끔은 네 몸이 하는 말도 들어.”
“……네.”
“너도 고생이 많다.”
승혁이 준후에게 측은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익숙하디익숙한 눈빛이었다.
외과 전공자.
특히 흉부외과·신경외과 전공자는 동료들에게 항상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승혁이 떠난 후, 준후는 대휘를 억지로 재웠다.
대휘는 잠이 안 온다고 저항했지만 5분도 채 되지 않아서 꿈나라로 떠났다.
잠든 대휘를 쳐다보며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과로로 인한 실신.
더 나아가서는 과로로 인한 과로사.
이 비극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아니, 계속 깊어질 것이다.
외과 지망생은 해마다 줄었으며 해외에서 외과의를 수입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농담이 아닌 시대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무슨 획기적인 방법이 없을까?’
준후의 고민이 깊어갔다.
동료의 과로를 막기 위해서 준후가 할 수 있는 일.
오직 지구 상에서 준후만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준후가 동료의 기력을 보충해 주는 일이었다. 자신의 내공을 동료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법에 애로사항이 있었다.
무림에서 상대에게 내공을 전달할 때는 보통 상대의 등에 손을 얹어 내공을 전달한다.
그런데 그 속도가 무척 더뎠다.
내공이 피술자의 혈관에 잘 퍼지도록 내공을 바른길로 인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숨 쉴 틈 없이 바쁜 외과 생활 도중에 그런 여유는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주변에서 준후를 사이비 기 치료사 같은 눈으로 바라볼 위험도 컸다.
지친 동료에게 빠르게 내공을 전달하는 법.
그러면서 동료가 준후에게 내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방법.
준후는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무림의 기억을 뒤졌다.
하지만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그런 방법이 존재했으면 준후는 진작부터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이이잉.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둔 콜폰이 진동했다. 준후는 침상을 벗어나며 콜폰을 받았다.
예상대로 병동 콜이었다.
준후는 곧바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걸음을 재촉하는 준후의 두 눈에 CPR을 진행하는 침상이 확 들어왔다.
사실 특이할 건 없었다.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듯이.
응급실에서 CPR을 하는 게 놀라운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CPR 하는 장면이 평소와 달리 도장 찍히듯 준후의 가슴에 또렷한 흔적을 남겼다.
가만…….
어쩌면 방법을 찾은 걸지도?
* * *
그 날 오후.
경추 수술을 어시스트를 마친 준후가 휴게실을 찾았다.
덜컹!
자판기에서 뽑은 캔 커피를 들고 준후는 낡고 헤진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평소와 달리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휘가 실신한 후.
앞으로 쓰러질지 모르는 동료들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캔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같이 수술을 했던 치프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치프는 수술 후 집도의의 호출을 받은 탓에 준후보다 다소 늦게 휴게실에 도착했다.
“야. 오늘은 준후 너답지 않게 왜 그랬냐?”
치프도 캔 커피를 뽑아 준후 옆에 앉았다.
“뭔가 수술에 집중을 제대로 못 하는 눈치였는데? 평소답지 않게 어시스트도 빠릿빠릿하지 않고.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대휘 때문에 그런가 봐요.”
“아. 맞다. 대휘 쓰러졌다고 했지. 상태는 좀 어때?”
“별 이상은 없다는데요.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네요.”
“희한하네. 일은 준후 네가 다하는데 왜 대휘가 쓰러지냐?”
치프가 피식 웃으며 캔 커피 뚜껑을 따서 커피를 마셨다.
준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사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건 치프도 마찬가지였다.
치프는 요즘 강행군 중이었다.
하루에 수술을 3건씩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저녁에는 전문의 시험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치프의 인중과 턱이 깎지 않은 털로 푸르스름했다.
피부는 푸석푸석해 보였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3년 차 혁재가 후배들을 때려가며 기강을 잡았을 때.
그것들을 치프가 묵인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까마득한 후배들까지 관리하기에는 치프의 체력과 집중력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치프의 방관이 옳았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준후야. 나 마사지 좀 해주라. 피곤해 죽을 것 같다.”
“제가 새로운 마사지를 개발했는데 그걸로 받아보실래요?”
“마사지가 다 거기서 거기지, 새로운 마사지라고 할 게 있나?”
“제가 하면 다르죠.”
준후가 살짝 미끼를 던졌다.
틈틈이 구상했던 ‘비장의 무기’를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하긴 네 마사지가 그렇게 시원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래, 새삥 마사지 한 번 받아보자.”
“탁월한 선택입니다.”
“난 어떻게 하고 있으면 돼?”
“저한테 등을 보이고 앉으시면 돼요.”
치프는 준후가 시키는 대로 등을 보이고 앉았다.
“몸에 힘 빼고 움직이지 마세요.”
“고급 마사지를 공짜로 받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준후는 심호흡을 하며 치프의 등판을 응시했다.
이 기술이 성공한다면 준후는 과로에 시달리는 동료들을 충분히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구상만 했던 것을 실전에서 펼치려고 하니 살짝 긴장이 됐다.
팔이 희미하게 떨렸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두렵다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변하고 싶으면 일단 행동해야 해.
움직여야 길이 생겨.
그 길이 설령 잘못된 길이라고 해도 경로는 수정할 수 있어.
내겐 그럴 힘이 있어.
스스로를 북돋으며 준후는 단전에 있던 내공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치프의 왼쪽 어깨 부근에 손을 올렸다.
턱!
손바닥이 치프의 왼쪽 어깻죽지에 닿는 순간.
준후는 미리 준비했던 내공을 손바닥에서 치프의 몸 안으로 침투시켰다.
언뜻 보기에는 무림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내공 전수 비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적어도 표면상으론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내공의 방향이었다.
호수 위에 일어난 파문처럼 뻗어나는 내공이, 피부와 근육과 지방을 통과해서 향했던 목적지는 다름 아닌 심장이었다.
‘가라!’
준후는 거침없이 치프의 심장으로 내공을 분출했다.
심장은 거세게 펌프질을 하며 온몸의 혈관에 혈류를 공급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니까 심장에 내공을 전하면 심장이 알아서 혈관에 내공을 공급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그 효율은 무림의 방법보다 떨어질 것이다.
무림의 내공 전달법은 시술자가 막힌 혈관까지 일일이 내공을 보내니까.
하지만 시술 시간.
무공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다는 현대라는 한정된 배경.
이 두 가지를 생각하면 ‘내공 심장술’보다 효과적인 내공 전달법은 존재할 수 없었다.
쿵. 쿵. 쿵.
내공을 받은 심장이 요동쳤다.
거세게 펌프질을 하면서 전신으로 내공을 알아서 전달했다.
치프의 전신으로 뻗어 나가는 내공을 준후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툭. 툭. 툭.
내공을 전달하고 나서.
준후는 일부러 치프의 왼쪽 어깻죽지를 몇 번 더 건드렸다. 사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마사지의 탈을 쓰고 내공을 전달하고 있으니 마사지를 하는 것처럼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치프. 지금 기분이 어때요?”
마사지 시늉을 끝내고 준후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후야, 너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다시 준후를 돌아본 치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공 심장술은 분명 성공적이었는데 돌아오는 치프의 반응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가 있지. 아주 큰 문제가.”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기분이 묘하다? 온몸에서 힘이 넘치는데? 이상하게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어.”
말을 하는 치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치프는 별안간 소파에서 일어나 푸쉬업을 하기 시작했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준후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CPR에서 힌트를 찾아낸 내공 심장술은 대성공이었다.
훈식을 쫓아내기 D-1일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