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16화 (315/424)

316화

제61장 군자의 복수(1)

다음 날 새벽.

당직 근무자였던 준후는 당직실 한구석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운기조식을 펼치는 준후에게 창가의 달빛이 쏟아져 몸이 은은하게 빛났다.

새삼 의사 가운은 도복 같았고 준후는 세상에 잠시 내려온 신선 같았다.

당직실에 거룩한 고요가 번져 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준후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몸을 일으킨 준후가 책상 앞에 앉아 어제 창안한 ‘내공 심장술’을 곱씹어 보았다.

CPR에서 영감을 받은 내공 심장술의 효과는 탁월했다.

비록 어제 하루지만 임상 시험(?) 결과 또한 성공적이었다.

준후의 시술을 받은 사람은 총 5명.

그중 3명은 스태프였고 1명은 병동 환자, 마지막 1명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중환자였다.

건강한 사람들은 ‘내공 심장술’의 효과를 금방 봤다. 도리어 힘이 넘쳐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속시간은 대략 12시간.

동료들에게는 한창 업무로 바쁜 오전 9시쯤 ‘내공 심장술’을 펼쳐주면 효과 만점일 듯했다.

‘내공 심장술’은 환자에게도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단순한 보양을 넘어 치료 및 진통에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고혈압 환자의 혈압이 꽤 의미 있는 폭으로 떨어진다거나, 수술한 부위의 피부가 더 빨리 재생되거나 등등.

놀라울 만한 변화가 있었다.

중환자의 경우는 ‘내공 심장술’로 인한 뚜렷한 변화를 관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눈으로 못 봤다고 해서 ‘내공 심장술’의 성능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톡. 톡. 톡.

준후가 검지로 책상을 두들겼다.

정면에 놓인 우주 바탕의 모니터 배경화면이 준후의 얼굴을 보일 듯 말 듯 반사해서 비추고 있었다.

모니터 속 준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시전 속도.

빠른 효과.

무엇보다 동료와 환자에게 무림 출신이라는 점을 들키지 않는다는 점 등등.

‘내공 심장술’은 분명 획기적인 치료 보조술이었지만 한계도 뚜렷했다.

이것이 오로지 준후의 내공에만 100퍼센트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준후의 내공은 화수분이 아니었다.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었다.

현시점에서는 하루에 6번이 최대치였다.

의국 식구가 총 15명.

중환자실 환자와 병동 환자를 다 합치면 130명.

이를 감안했을 때 ‘내공 심장술’에 횟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메마른 땅을 적시겠다고, 고작 생수 2리터를 들이붓는 꼴이었다.

이건 만년하수오 같은 영약을 먹는다고 해도 해결이 안 돼.

아예 경지를 뛰어넘어야 해.

조화경에서 현경의 고수로 다시 태어나야 해.

보통 무림인은 단전에 내공을 저장한다.

하지만 현경의 고수들은 몸 전체에 단전을 축적한다고 했다.

그러니 현경쯤은 되어야 준후도 ‘내공 심장술’을 여유 있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다는 게 빤히 보여 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에서도 못 오른 경지를 현대에서 오를 수 있을까…….

막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준후야. 인간은 끊임없이 걸어야 한다. 만약 내가 힘들다고 주저앉는다면 그곳이 곧 네 무덤이 될 거란다.

-…….

-산기슭에서 태어난 물 한 방울이 바다가 되는 법을 알고 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방법은 아주 어렵지만 아주 단순하기도 해. 바다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흐르는 것뿐이란다.

현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준후는 무림맹주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무림맹주가 해준 말이 저것이었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참 멋진 말이긴 한데…….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인 것도 사실이었다.

“바다가 된다라…….”

준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보복이 빠른 데다가 한쪽 발이 복도 바닥을 살짝 끄는 진동이 느껴지는 게 누구인지 딱 알 수 있었다.

“대휘 왔냐?”

문이 열리기 직전에 준후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준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대휘가 당직실에 들어왔다.

“무당이세요? 제가 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뭐. 나만의 방법이 있지. 몸은 좀 어때?”

“근질근질해서 도무지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누워 있는 게 오히려 더 고통이었어요.”

대휘가 능청 떨며 준후 옆자리에 앉았다.

당연하게도.

어제 과로로 쓰러진 대휘에게 준후는 ‘내공 심장술’을 펼쳤다.

그 결과가 회춘(?)한 것처럼 쌩쌩해 보이는 대휘였다.

대휘의 혈색이 많이 좋아졌다.

낯이 불그스레한 빛을 띠었고 눈동자에는 활기가 넘쳤다.

어제 과로로 쓰러졌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선배가 어제 해준 등 마사지 효과가 엄청난 것 같아요. 치프 말이에요.”

“갑자기 치프는 왜?”

“치프도 벌써 기상해서 공부 중이에요. 매일 오전 컨퍼런스 직전에야 간신히 기상하던 양반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준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료가 됐든.

환자가 됐든.

생판 모르는 사람이 됐든.

타인이 건강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준후의 근원적인 기쁨 중 하나였다.

그리고 준후의 내면을 사로잡은 단 한 가지 동사는 바로 ‘지킨다’였다.

준후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별의 눈물은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기를 바랐다.

“아, 참. 대휘야. 부탁 하나만 하자.”

“뭐든지요. 선배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이라도 할게요.”

“아침부터 오버하기는. 다른 게 아니라 오전 회진 끝나면 잠깐 홍 교수님 좀 붙들어주라.”

“홍 교수님은 왜요?”

대휘가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작업을 좀 해놓을 게 있어서. 한 10분 정도면 될 거야.”

“으…… 100분 같은 10분이 되겠네요. 근데 설마 오늘이 그 날이에요?”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훈식과의 끈질긴 인연은 오늘에야말로 끊어버릴 것이다.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골프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이니까 이 기회에 평생 골프만 치게 해드리자고.”

“뭔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하네요.”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뭐라고 했지?”

준후의 질문에 대휘가 피식 웃었다.

“선배 걱정이요.”

“알면 됐다. 홍 교수 내쫓고 탈주했던 서진이도 데려오자. 대전 신경외과 의국은 그때부터 전성기가 될 거야.”

* * *

오전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동안 훈식은 힐끔힐끔 준후를 쳐다보기 바빴다.

준후를 향한 눈빛이 곱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논문 정리 때문이었다.

열흘 전에 논문 정리를 맡겼거늘 마감 기한인 어제저녁까지도 준후는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돌아도 단단히 돌아버린 게 분명했다.

감히 하늘 같은 교수의 부탁, 아니, 명령을 개무시해?

눈길이 준후에게 닿을 때마다.

훈식의 뱃속에서 불같은 기운이 치솟았다.

“교수님. 저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오전 회진이 끝나고.

준후를 따로 불러 따끔하게 손봐주려고 하는데.

불청객 대휘가 튀어나와 갑자기 경추·요추 환자들의 치료 계획 및 처방 계획을 물었다.

훈식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훈식의 정신은 아까부터 온통 준후에게 닿아 있었기에 다른 것에는 신경을 둘 수가 없었다.

“됐으니까. 그만 귀찮게 하고 가 봐.”

“교수님. 정말 죄송한데…… 딱 환자 한 명만 더 여쭤보면 안 될까요?”

“김대휘. 계속 까불래?”

훈식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대휘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대휘가 평소와 달리 훈식의 기세를 그대로 받아냈다.

이 자식 아침부터 뭘 잘못 먹었나?

“부탁드립니다. 환자분 사정이 딱해서 그렇습니다.”

“뭐가 궁금한데?”

“환자에게 오늘 써야 할 진통제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하…… 기껏 날 붙잡아 놓고 그딴 헛소리나 해 쌀래? 어제 쓰던 거 그대로 쓰면 되잖아.”

“혹시 더 좋은 게 있나 싶어서 여쭤봤습니다.”

“없어.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바꿨을 거고. 근데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럼 이만.”

“어?”

스테이션 쪽으로 달려가는 대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훈식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뭐랄까.

대휘가 일부러 쓰잘데기없는 것들을 물어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애써 찝찝한 기분을 거두고 마침 지나가던 혁재에게 준후의 위치를 물어봐 훈식은 컨퍼런스 룸으로 이동했다.

준후는 컨퍼런스 룸을 청소 중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인쇄물을 한곳에 모아두고 있었다.

“서준후.”

훈식이 준후를 부르며 검지를 까닥거렸다. 준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쪼르르 달려와 훈식 앞에 섰다.

“논문 자료 정리, 내가 언제까지 끝내라고 했지?”

“어제까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어제 메일 안 보냈더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개겼냐?”

훈식이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솔직히 자료 정리가 급박한 일은 아니었다.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기까지 대략 한 달이란 여유가 있었다.

훈식은 단순히…….

자신이 당직 때 골프 치러 간 사실을 과장에게 보고한 준후가 미워서 엿을 먹인 것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준후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개미처럼 작았다.

“죄송할 짓은 애초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그래서 오늘 중으로는 자료 넘길 수 있어?”

“죄송합니다.”

“이 새끼야 네가 앵무새야? 아까부터 왜 했던 말만 반복하고 지랄인데?”

“죄송합니다.”

“어쭈? 요놈 봐라.”

훈식은 구둣발로 준후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렸다. 이성의 끈이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늘 중으로도 못 보낸다고? 너 그동안 뭐 했냐?”

“절대 놀지는 않았습니다. 쉴 때나 당직 때나 교수님 논문을 정리하느라고 눈이 빠지게 고생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눈이 빠지게 고생했는데 왜 결과가 안 나오냐고 결과가!”

“그게…… 어제 새벽에 실수를 저질러 버렸습니다.”

이어지는 준후의 설명에 훈식은 혀를 찼다.

준후의 말에 따르면.

논문 파일을 따로 저장하지 않고 작업 중이었는데 컴퓨터 시스템이 업데이트되면서 해당 파일이 날아갔다는 것이다.

“하…… 재수도 지지리 없지. 공교롭게 어제 시스템 업데이트가 될 건 뭐냐?”

“교수님. 제 사정을 이해해 주시는 겁니까?”

“아니? 염병 떨지 마. 새끼야.”

훈식의 손가락이 준후의 가슴을 연신 찔렀다. 꽤나 아팠는지 준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구를 호구로 아나. 건방지게 핑계를 댈 게 없어서 컴퓨터 시스템 업데이트 핑계를 대?”

“…….”

“네가 인간 새끼냐? 원래 논문 자료는 클라우드에 시간별로 자동 저장해 놓는 게 기본인 거 몰라?”

“죄송합니다.”

“수술 어시스트랑 환자 관리는 그렇게 잘하면서 논문 정리는 왜 그렇게 개판인데?”

말을 하면 할수록 분노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제 훈식의 얼굴은 만취한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팔다리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훈식은 분노라는 술에 만취해 버렸다.

이성을 잃고 개가 되어버렸다.

“너, 이 새끼, 내가 대충 감은 잡고 있었어. 반지르르하게 논문 정리 중이라고 대답할 때부터 이 꼴이 날 줄 알았다고.”

“…….”

“X발. 과장 라인 탔다 이거지? 내 말은 개X이라 이거지?”

“절대 아닙니다. 과장님. 오해세요.”

준후가 양팔을 허공에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고개도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노여움의 불길은 진화될 줄 몰랐다.

“뭐? 오해? 새끼가 말끝마다 변명이네. 너 좀 쥐어 터져야겠다.”

훈식은 손과 발이 가는 대로, 마구잡이로 준후를 때렸다.

준후의 헛소리를 계속 들어주다간 몸이 폭탄처럼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퍽. 퍽. 퍽. 퍽.

훈식은 준후를 계속 폭행했고 준후는 속절없이 얻어맞았다.

그러던 중 기어이 대형 사고가 터졌으니…….

짝!

경쾌한 뺨 소리가 컨퍼런스 룸에 울려 퍼졌다.

훈식이 훅을 날리듯 준후의 뺨을 후려갈겼다. 준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순간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던 준후가 뾰족한 책상 끝에 머리를 부딪쳤다.

쿵!

준후가 쓰러졌다.

쓰러진 채로 미동이 없었다.

눈동자는 죽은 동태처럼 풀려 있었고 입술은 바보처럼 벌어져 있었다.

“일어나. 개새끼야. 아직 덜 맞았어.”

“…….”

“일어……?”

훈식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화가 살짝 가라앉자 준후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야. 서준후! 서준후!”

쓰러진 준후에게 다가가 훈식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으로 준후의 경동맥을 촉진했다.

순간 하얗게 질리는 훈식의 낯빛.

준후의 경동맥이 뛰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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