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제61장 군자의 복수(2)
신경외과 병동이 아침부터 발칵 뒤집혔다.
4주 연속 당직 근무를 섰던 강철 인간.
환자와 보호자의 워너비.
간호사 스테이션의 아이돌.
의국 정상화의 1등 공신.
레지던트 중에서 별명이 가장 많은 준후가 컨퍼런스 룸에서 심정지로 쓰러진 것이다.
준후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홍훈식 교수였다.
심정지 발생 당시.
훈식은 병동이 떠나갈 정도로 컨퍼런스 룸 문을 옆으로 밀쳤다.
쾅!
문소리가 마치 천둥과도 같았다.
복도를 지나가던 환자와 보호자, 스태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야! 당장 AED(자동제세동기)랑 앰부백(공기 주머니) 챙겨 와! 간호사도 한 명 불러오고.”
훈식이 지나가던 대휘를 콕 찍어서 지시했다.
“가……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너한테 일일이 그런 것까지 보고 해야 돼?! 처맞기 싫으면 빨리 가져오라고!”
호통치는 훈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휘는 영문도 모른 채 스테이션으로 달려갔다.
제세동기와 앰부백을 챙기고 근무 중인 간호사 한 명을 대동해 컨퍼런스 룸으로 이동했다.
“……!”
“……!”
그리고 대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충격적이고도 끔찍한 현장이었다.
준후는 회의 테이블 옆에 쓰러져 있었다.
얼핏 봐도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숨을 쉬지 않는지 흉곽의 움직임이 없었다. 반쯤 뜨고 있는 눈동자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훈식은 준후 곁에서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젖은 앞머리가 미역처럼 늘어져 있었다.
혼자 흉부 압박을 하다가 지친 모습이었다.
선배. 이게 뭐예요!
홍 교수 쫓아낸다고 약속했잖아요?
근데 왜 쓰러져 있는 거예요?
의식을 잃은 준후를 확인한 순간 대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코끝이 뜨겁고 불덩이 같은 것이 가슴으로 치밀어 올랐다.
준후의 사정이 딱하기도 하고.
준후를 이 꼴로 만든 훈식에 대한 분노로 심정이 복잡했다.
“너 빨리 와서 흉부 압박해. 김 간호사는 기도 확보하고 앰부백 짜고. 난 제세동기 사용할 테니까.”
“네. 교수님.”
“네. 교수님.”
세 사람은 숨 바쁘게 CPR을 시작했다.
흉부 압박을 할 때마다 준후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앰부백에 하얗고 뿌연 서리가 끼었다.
수술복 상의를 들어 올리자 준후의 허연 속살이 드러났다. 속살 위로 제세동기 패드와 전선들이 따닥따닥 부착되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그, 잘생기고 일 잘하는 준후 선생님이 쓰러졌나 봐요. 좀 심각한 것 같아요…….
“저런. 참 좋은 선생님인데 왜 그런 일이…….”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컨퍼런스 룸 입구를 서성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안쪽을 훔쳐보려 했다.
사태에 심각성을 인지한 간호사 두 명과 3년 차 혁재도 황급하게 현장을 찾았다.
모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 순간.
다들 조마조마하게 간을 졸이던 그 순간.
유일하게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준후였다.
사실 준후는 멀쩡했다.
의식을 잃지도 않았으며 주변의 자극도 완벽하게 느끼고 있었다.
준후가 펼치고 있는 무공은 ‘귀식대법’이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살아 있는 송장’ 또는 ‘죽은 척하는’ 무공쯤 될 것이다.
호흡을 최소화하고.
심장 박동을 최소화하면.
의도적으로 가사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귀식대법은 주로 자객들이 사용했다.
정체가 발각당했을 때.
일부러 죽은 척을 한 뒤 몰래 현장을 벗어났던 것이다.
무림의 준후도.
무림맹 소속으로 한때 자객 수업을 받았으므로 귀식대법을 펼칠 줄 알았다.
그렇다면 왜 귀식대법을 사용했느냐.
이유라면 간단했다.
훈식의 못된 손버릇을 역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교수가 레지던트에게 가하는 폭행은 윗선에서 쉬쉬하며 묻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병동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일이 커지면 어떻게 될까.
눈 가리고 아웅이 절대 불가능해진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눈이 수십 개나 되었다.
이 수많은 눈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1) 훈식의 논문을 고의로 정리하지 않는다.
2) 훈식의 화를 최대한 돋운다.
3) 훈식이 손찌검을 하면 찰지게 맞아주다가 귀식대법으로 쓰러진다.
이것이 바로 준후가 훈식을 의국에서 쫓아낼 맛깔난 레시피였던 것이다.
준후는 좀 전까지 훈식과 나눈 대화를 전부 휴대폰에 녹음해 놓았다.
책장 위에는 얼마 전 구입한 녹음기를 숨겨두었다.
훈식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확보했으니 훈식의 미래는 지옥행 KTX를 탄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장 리듬 분석 중입니다. 제세동이 필요합니다. 접촉 금지. 제세동을 시작합니다.]
제세동기의 알림이 건조하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제세동기를 속일(?) 만큼.
준후의 귀식대법은 정교하고도 기가 막혔다.
하지만 문제는 심장이 정상인 상태에서 제세동기의 전류를 직방으로 맞았다간 심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다가올 전기 충격에 대비해.
준후는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려 심장 주변을 감쌌다.
보호막을 친 것처럼 심장이 단단해진 느낌을 준후는 받았다.
찌리리릿!
패드에서 전해지는 짜릿함에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하마터면 ‘난 정상이에요’라고 외치며 몸을 벌떡 일으킬 뻔했다.
이 감각을 도무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동시에 지진을 일으킨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오래는 못 버티겠네.
딱 두 번만 더 참자.
준후의 마음이 살짝 꺾였다.
* * *
그 날 오전.
본래 수술 스케줄이 있던 준후는 본의 아니게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사실 몸은 멀쩡했지만.
멀쩡하다고 티를 내면 안 되는 상황이라서 그랬다.
“이제 좀 괜찮냐?”
침상 옆에 선 의대 동기 승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좀 살 만해.”
승혁이 준후를 한참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혀를 찼다.
“이야기는 대충 다 들었다. 홍 교수한테 맞아서 그렇게 됐다며?”
“뭐, 그렇게 됐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지만 준후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벌써 응급실까지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었다.
이번 사건 만큼은…….
발 없는 말이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좋았다.
“트라우마 안 생기겠어? 정신건강의학과 컨설턴트(협진)이라도 붙여줄까? 그게 나을 것 같은데.”
“일 번거롭게 만들 필요 없다. 어차피 물은 다 엎질러졌는데.”
“네 이야기를 왜 남 이야기하듯이 하는데? 너 진짜 심각한 일 당한 거야.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된다고.”
“협진은 천천히 생각해 볼게. 어쨌거나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놈의 신경외과는 왜 그렇게 바람 잘 날이 없는지 몰라. 며칠 전에는 네 후배가 쓰러져서 오더니만.”
“터가 안 좋은가 보지.”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승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준후의 정맥과 연결된 수액의 점적통을 빤히 보다가 점적 속도를 살짝 늦췄다.
똑똑똑 떨어지던 수액이.
또오오옥, 또오오옥 떨어지기 시작했다.
승혁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호출하라고 말하고선 자리를 떠났다.
고개를 끄덕인 준후가 침상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쯤 훈식은 이번 사건이 커질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판이 이렇게 커진 마당에 책임 없이 사건을 묻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낮 레지던트가 교수를 응징하는 일 따위는 허무맹랑한 망상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준후는 생각이 달랐다.
상대가 악인이라면.
반드시 구린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그 구린 부분을 잘 긁어내면.
설령 지위가 낮더라도 상급자 악인을 똥통에 빠뜨릴 수 있었다.
오늘 준후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쁜 놈들을 찍어내야겠어.
물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만큼.
물을 흙탕물로 만들어 버리는 미꾸라지를 제거하는 것도 중요해.
홍 교수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준후는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싸워야 할 대상이 비단 죽음과 질병뿐만이 아님을.
의사의 본분을 저버린 타락한 의사들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술 끝나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 몸은 좀 괜찮니?”
생각에 빠졌던 탓에 기척을 읽지 못했다.
준후의 곁에 어느새 과장 시덕이 서 있었다.
급하게 걸음을 했는지 시덕의 숨이 차 보였다.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
준후의 말을 확인하려는지 시덕이 준후를 위아래로 훑었다.
날카로웠던 눈길이 금방 부드러워졌다.
“다행이구나. 큰 사고를 당한 것치고는 괜찮아 보여서. 근데 말이다.”
“…….”
“혹시 홍 교수를 쫓아내겠다는 방법이 이거였니?”
“정확히 보셨습니다. 조금 무식해 보이죠?”
“무식한 정도가 아니라 한숨이 나올 정도로 무모하게 보이는구나. 너 정말 위험했던 거 알아?”
시덕이 꾸짖는 말투로 물었다.
시덕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준후가 귀식대법으로 CPR이 필요한 상황을 고의적으로 유도했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아마 오늘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준후와 아영이 유일할 것이다.
“의사라면 무릇 자신의 몸을 소중히 다룰 줄 알아야 한단다. 네 건강에 환자와 보호자의 건강도 연결되어 있어.”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적당히 몇 대만 맞으려고 했는데…….”
“했는데?”
“홍 교수 손이 의외로 맵더라고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모서리에 머리를 찧고 말았습니다.”
준후가 어색하게 웃으며 검지로 왼쪽 앞머리를 가리켰다.
현재 준후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책상 모서리에 찍히면서.
상처가 생겼던 것이다.
물론 사전에 내공으로 머리를 보호한 덕분에 두피에 살짝 멍이 든 정도였지만.
“브레인 CT는 찍었니?”
“네. 찍었는데 아무 이상 없다고 합니다. 이상이 있었으면 지금 과장님과 대화도 제대로 못 했을 겁니다.”
“너…… 이 녀석. CPR로 죽다가 살아났는데 너무 활기찬 것 아니니?”
시덕이 혀를 차며 물었다.
“일단 몸이 멀쩡한 데다가 앞으로 홍 교수가 치를 고역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납니다. 과장님은 안 그러신가요?”
“마냥 웃기도 애매하구나. 나도 어느 정도의 문책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
“아 참, 홍 교수는 왔다 갔니?”
“네. 1시간 전쯤에 왔습니다. 그 인간이 할 말은 뻔해서 일부러 잠든 척했습니다.”
“그랬구나.”
“과장님. 앞으로 홍 교수 처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준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지금부터 중요한 건 처벌 수위였다.
준후는 솜방망이나 야구 배트 정도의 처벌 수위는 원치 않았다.
철퇴 수준을 원했다.
“아무리 인맥을 내세운다고 해도 술에 물 탄 듯이 넘어가진 못하겠지. 벌써 원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으니까.”
“제가 과장님께 소스를 드리겠습니다. 그걸로 홍 과장을 완전히 묻어버리시죠.”
준후는 그 자리에서 시덕에게 그동안 녹음했던 파일을 전송했다.
컨퍼런스 룸에 숨겨놓았던 카메라의 위치도 알려주었다.
-X발. 과장 라인 탔다. 이거지? 내 지시는 개X이라 이거지?
-절대 아닙니다. 과장님. 오해세요.
-뭐? 오해? 새끼가 말끝마다 변명이네. 너 좀 쥐어 터져야겠다.
녹음 파일을 재생해 듣고서 시덕은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녹음 파일은 부정할 수는 없는 증거물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폭행 영상을 촬영한 카메라도 있다고?
그렇다면 훈식을 영원한 지옥으로 빠뜨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시덕은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준후를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준후, 너 진짜 무서운 놈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