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제61장 군자의 복수(4)
당직실을 떠난 준후가 간호사 스테이션을 찾았다.
스테이션 뒤쪽에 있는 물품실로 들어가 요추 천자에 필요한 처치 도구들을 드레싱 카트 위에 올려놓았다.
“요추 천자 세트가 필요하면 저희한테 이야기하지 그러셨어요. 굳이 발품 팔 필요 없는데.”
준후는 목소리가 들리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정화 간호사가 준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이트 근무자 특유의 피곤함이 얼굴에 배어 있었다.
“바쁠 때야 부탁을 드리겠지만 여유가 있을 때는 제 손으로 해야죠.”
“역시 준후 쌤은 멋쟁이에요.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마음도 잘 생겼어요.”
“이 정도는 기본 아닌가요?”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다.
“기본을 안 지키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죠. 예를 들면 혁재 선생님이라든가…… 혁재 선생님이라든가…….”
정화가 혁재의 이름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준후에게 단단히 혼쭐이 난 후.
혁재는 제법 온순해졌지만 그 범위는 어디까지나 의국 의사들에게만 한정된 듯했다.
간호사들에게는 여전히 예의 없이 구는 모양이었다.
“제가 이따 만나면 잘 이야기해 볼게요.”
“그 벽창호가 과연 준후 쌤이 말한다고 들을까요? 아, 그게 준후 쌤을 무시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고요. 혁재 쌤이 워낙 고집이 쌔니까.”
“꼭 제 말이어야 들을걸요?”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준후와 혁재의 180도 역전된 관계를 간호사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아 참. 오늘 서진이 복귀한 거 아시죠? 어때요? 일은 괜찮게 하는 편인가요?”
준후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1년 차 대휘 말로는 준후가 오기 전까지 에이스가 서진이라고 했는데 간호사들의 의견은 어떤지 궁금했다.
“일 처리는 깔끔하게 하는 편이었어요. 성격이 좀 유별나서 그렇죠.”
“결벽증 때문인가요?”
“네. 말도 마세요. 준후 쌤은 서진 쌤이 왜 홍 교수님한테 찍혔는지 아세요?”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오래전부터 궁금하긴 했지만 직·간접으로 물어본 적은 없었다.
괜히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서.
“어느 날 수술 방에서 수술 도구가 본인 생각한 것하고 다르게 놓인 거예요.”
“네. 그래서요?”
“그걸 바로 잡는 데 시간을 쓰니까 홍 교수가 머리에 뿔이 난 거죠. 당장 수술해야 하는데 넌 대체 뭘 하고 있냐고.”
“와. 미쳤네요.”
몰랐던 사연을 듣고 준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첫 만남부터 대충 느낌은 왔지만 그래도 결벽증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랄견, 그 자체인 홍 교수 앞에서 당당하게 수술을 지연시키며 수술 물품을 정리했다니.
“그래도 서진이가 없는 것보단 낫겠죠?”
“아마…… 그럴 걸요?”
정화가 애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화를 엿듣고 있었는지 스테이션 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 몇 명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정화가 피곤해 보였으므로.
준후는 마사지를 제안했다. 하지만 정화는 한사코 거절했다.
딱히 준후가 싫은 게 아니라.
자신의 몸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것 자체가 싫다고 했다.
준후는 어쩔 수 없이 내공 심장술을 포기했다.
드레싱 카트를 끌고 병실로 이동했다.
신체를 접촉하지 않고 내공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준후의 머릿속에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신체 접촉을 꺼리는 사람.
또는 수술 중인 환자.
이 둘에게는 준후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손을 댈 수 없으므로 내공을 활용한 검사나 치료나 회복이 불가능했다.
현경의 고수가 된다면 모를까.
신체 접촉 없이 내공을 전달하는 수법은 당장 해결하기 힘든 숙제였다.
그래도 고민하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어떤 문제라도 답은 항상 존재해.
답을 찾으려는 끈기가 부족해서 답을 못 찾는 거야.
준후는 새로운 숙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씨앗으로 가슴에 담아두었다.
관심과 애정을 주면 그 씨앗은 언젠가 싹을 틔울 것이다.
1인실인 607호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환자는 깨어 있었고 보호자도 깨어 있었다.
서진은 전봇대처럼 침상 옆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에서 진동하는 어색함에 괜히 준후가 숨 막힐 지경이었다.
‘이 녀석…… 결벽증도 있는데 사교성도 떨어지네.’
이쯤 되면 서진을 괜히 복귀시켰나, 살짝 후회도 되는 준후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미적 감각이 없어서야.”
서진이 드레싱 카트를 끌고 침상에 다가온 준후에게 핀잔을 주었다.
카트 위에 놓인 물품에 각을 잡았다.
서진이라는 뉴페이스에게 적응하는데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어쩌면 혁재보다 더.
“내 실력이 의심스러우니까 요추천자를 해보라는 거지?”
서진의 도발적인 눈길이 준후를 향했다.
눈치는 의외로 100단이었다.
굳이 부정할 생각이 없었기에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추천자? 그까짓 거 발가락으로도 할 수 있어.”
“선생님. 그냥 선생님이 해주시면 안 될까요?”
잠자코 있던 보호자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서진의 말에서 진한 허세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안심하세요. 능력 있는 친구입니다. 저랑 같은 레지던트 2년 차예요.”
“그동안 한 번도 얼굴을 못 뵌 것 같은데요.”
“잠깐 사정이 있어서 쉬고 있었어요.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준후가 타이르자 보호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못마땅하지만 일단 맡겨는 보겠다는 의미였다.
“환자분. 새우처럼 몸을 웅크려보세요. 턱은 가슴에 붙이고 무릎은 배에 붙이고. 좀 더요. 좀 더.”
서진이 환자에게 필요한 자세를 요구했다.
디렉션이 보통 까탈스러운 게 아니었다.
꼭 영화나 드라마 감독 같았다.
원하는 자세가 만들어지자 서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후 본격적인 요추 천자의 막이 올랐다.
환자복 상의가 훌러덩 말려 올라갔다.
수술 장갑을 착용한 서진이 환자의 등허리를 소독솜으로 문질렀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빨간 소독액이 회오리처럼 나선 형태를 띠었다.
몇 달을 쉬었음에도.
서진의 손놀림은 제법 야무졌다.
고작 소독을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준후는 그 안에서 서진의 실력을 어느 정도 감지했다.
“방포.”
“네. 대령하겠습니다.”
준후가 건넨 방포를 서진이 환자의 허리에 덮었다.
이윽고 서진의 손에 20G 바늘이 손에 들렸다.
푸우우욱.
무심한, 어찌 보면 무성의해 보이는 손놀림과 함께 바늘이 환자의 허리를 관통했다.
천자 부위는 정확히 요추의 4-5번 사이.
바늘의 길이는 대략 8cm.
서진이 처치를 잘할 거란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준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적어도 요추천자만 놓고 보면 그 솜씨는 준후와 크게 차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질서를 추구하는 결벽증이 치료에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요추 천자가 성공하면서 바늘과 연결된 플라스크에서 뇌척수액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치 고로쇠나무에서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것처럼.
드르르륵.
처치가 끝난 후 두 사람이 나란히 병실을 나왔다.
물품 뒷정리를 위해 스테이션으로 가는데 서진의 발걸음이 기묘했다.
자세히 보니 서진은 바닥 타일 선을 밟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이 화상(畫像)을 죽여? 살려?
* * *
그 날 오전 컨퍼런스 룸.
본격적인 컨퍼런스가 시작되기 전 레지던트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치프와 대휘가 활짝 웃는 얼굴로 서진의 복귀를 축하해 주었다.
정작 서진은 별다른 반응 없이 입원 환자의 상태를 요약한 인쇄물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야. 예전에는 내가 정말 미안했다. 너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땐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3년 차 혁재가 조심스럽게 서진에게 사과를 구했다.
“사과하는 건 선배 자유인데요. 저는 선배 사과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받을 겁니다.”
“혁재, 무안하게 왜 그러냐? 혁재도 이제 정신 차렸어. 쑥하고 마늘을 안 먹었는데도 사람이 됐다고.”
순간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치프가 우스갯소리로 중재에 나섰다.
“치프. 말은 바로 하셔야죠. 쑥하고 마늘을 안 먹었으니까 아직 사람이 덜된 겁니다.”
“너 이 새끼…….”
혁재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가 준후의 눈치를 보고 다시 얼굴을 폈다.
혁재의 억제기는 준후였다.
“치프, 방금 혁재 선배 발끈하는 거 보셨죠? 제 말이 틀렸어요?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니까요?”
“질풍노도의 시기라서 그래.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 내 말이 틀렸냐? 혁재야?”
“마…… 맞죠. 점점 좋아지고 있죠.”
잡담이 끝날 무렵, 교수들까지 착석이 끝났다.
이어지는 컨퍼런스는 순조로웠다.
정확히 말하면 과장 시덕의 결정에 따라 업무가 착착 진행되었다.
부교수이면서도 과장처럼 굴었던 훈식이 준후로 인해 의사 면허를 박탈당하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야말로 종이호랑이가 되었다.
이제 훈식은 의국에 그 어떤 형태로도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그래서 훈식을 따르던 교수들도 황급히 시덕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시덕이 말하면 교수들은 귀를 기울여 들었다.
무조건 시덕의 결정이 맞다며 맞장구를 치기 바빴다.
아기새가 먹이 주는 어미를 쳐다보듯, 어떻게든 눈을 한 번 더 마주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준후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꼴사납고 우스웠다.
인간 내면의 밑바닥을 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준후도 언젠가는 저 틈에서 경쟁을 해야 할 것이다.
생각이 그쯤 미치자 살짝 서글픈 느낌도 들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회의 도중 하늘을 가로지르는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닥터 헬기가 출동할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헬기 소리에 정신이 팔린 준후가 맞은편 창가를 응시했다.
구름을 지나치는 헬기가 꼭 거대한 잠자리처럼 보였다.
헬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준후는 대전이 권역 외상센터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저기 컨퍼런스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별안간 회의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외상센터에서 급하게 선생님 한 분을 보내달라고 해서요. 등산객이 다쳤는데 뇌출혈이 의심된다고 합니다.”
간호사의 노티에 컨퍼런스 룸이 순간 숙연해졌다.
레지던트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쉽게 치료하겠다고 나서지를 못했다.
헬기에 탑승하는 것도 고역이고 환자에게 불상사가 생겼다간 본인이 옴팡 책임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준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준후 네가? 넌 오전에 경추 수술 스케줄이 잡혔는데?”
시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수술은 서진이가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스케줄에는 서진이 잡혀 있지 않으니까요.”
“뭐 상관은 없다만. 정말 괜찮겠니?”
시덕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준후가 사서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는 어투였다.
“전 끄떡 없습니다.”
준후의 대답은 용명했다.
사실 준후는 닥터 헬기를 타보고 싶었고 외상외과 환자도 치료해 보고 싶었다.
신경외과 전문의는 나중에 외상외과 전문의도 될 수 있는데.
외상외과는 준후가 정복하고 싶은 과 중 하나였다.
뇌혈관 파트.
뇌종양 파트.
정위 신경 파트.
경추·요추 파트.
소아 신경외과 파트.
외상외과 파트.
수부외과 파트.
신경외과와 관련된 총 7개의 세부 전공을 마스터하는.
국내 유일에 헵타 서전이 되는 것이 준후의 원대한 포부였기에.
“교수님. 죄송한데 외상외과에서 3년 차 이상인 분을 보내달라고 하셨는데요.”
간호사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준후의 지원이 물거품이 되려는 찰나.
과장 시덕은 끝까지 준후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럼 3, 4년 차 같은 2년 차가 간다고 전해주세요. 준후, 넌 빨리 응급실로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