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제62장 하늘을 날아서(1)
‘아이고…… 이러다가 의사가 환자 되겠네.’
가파른 절벽으로 직접 내려가려는 준후를 지켜보며 우성이 절레절레 고갯짓을 했다.
우성은 등산 경험만 20년 차였다.
동네 야산부터 전국 명산 중 섭렵하지 못한 산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4년 전부터는 아내와 자식들이 위험하다고 만류했던 암벽등반까지 수십 번 해봤다.
그런 우성의 눈에 준후가 하려는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넓은 돌판 위에 쓰러진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면 경험 많은 우성이 진작 구했을 것이다.
우성이 가만히 무기력하게 있었던 이유.
그것은 당연하게도 환자를 구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최대한 조심한다면…….
아마 내려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네스, 밧줄, 하강기와 등강기 등등. 장비 없이 다시 올라오는 건 불가능했다.
벼랑의 경사가 너무 가팔랐고 어제 내린 비로 바위들이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이봐요, 젊은 의사 양반. 사람을 구하겠다는 마음은 정말 멋지고 존경스러운데…… 지금은 객기를 부릴 때가 아니…….”
우성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준후가 들은 체도 안 하고 경사가 심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던 것이다.
순간 우성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다리는 초조하게 떨렸고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치며 딱딱딱 소리를 냈다.
곧 들려올 비명에 얼굴을 찌푸렸는데 의외로 들려오는 소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우성은 호기심이 생겼다.
벼랑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포커판에서 자신의 패를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고.
“에잉?”
우성은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벼랑을 내려가는 준후의 몸동작이 유연하고 날렵했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산양을 본 적이 있었다.
산양은 말 그대로 고지대 산에서 사는 양이었다.
벼랑이나 나뭇가지 사이를 토끼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준후가 그 산양처럼 절벽을 내려가고 있었다.
방금 막 뾰족하고 면적이 좁은 바위에 착지했는데 균형 감각이 말도 안 됐다.
체조 선수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착!
바위와 바위 사이를 가뿐하게 뛰어다니던 준후가 환자가 누운 널따란 돌판 위에 착지했다.
그러더니 환자를 번쩍 양팔로 들어 올렸다.
준후는 균형 감각만 좋은 게 아니라 힘도 장사였다.
쓰러진 환자는 덩치가 좋고 살집도 많았다. 눈대중으로 봐도 체중이 100kg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환자를 준후는 아기를 안듯이 안아버렸다.
이후의 펼쳐진 광경은 더 놀라웠다.
양팔로 균형을 잡을 수 없음에도.
환자의 무게를 견뎌야 함에도.
준후는 내려왔던 길을 그대로 등반했다.
그 가파르고 미끄러운 암벽들을 계단 밟듯이 밟고 올라오고 있었다.
‘참나…… 이게 꿈이야, 생시야?’
우성이 두 눈을 비볐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준후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신고자, 맞으시죠?”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우성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 쌍의 남녀가 헉헉거리며 이쪽으로 합류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사이좋게 앞머리가 땀에 절어 있었다.
“먼저 온 의사가 있을 텐데 그 사람은 어디 있나요?”
우성은 대답 대신 벼랑 아래로 턱짓을 했다.
남녀가 벼랑으로 다가와 아래를 살폈다. 그들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이 당장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니……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환자를 두 팔로 안고 이 경사를 오른다고?”
“와. 준후 쌤. 인간도 아니네요.”
두 사람의 감탄이 끝나기 무섭게 준후가 뾰족한 바위를 힘차게 박찼다.
한줄기의 분수가 되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착!
유려한 포물선을 그리며 준후가 지상으로 착지했다. 만화나 영화 속 주인공 같은 멋진 한 장면이었다.
“신고자분,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환자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환자를 들 것에 눕히며 준후가 말했다.
* * *
준후는 한쪽 무릎을 꿇고 들 것에 누운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자상이 존재하는 복부 출혈이 극심했다.
등산복 상의 전체가 피로 새빨갛게 흠뻑 젖어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출혈로 인해 환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연히 의식은 없었다.
칼로 복부를 자해한 후 추락하던 환자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왼쪽 측두부에 기다란 열상(찢어진 상처)이 존재했다.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동안 준후는 환자의 얼굴에 그리운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모용평.
모용세가 출신의 차남이자 한때 준후와 막역한 사이였던 지기.
모용평도 환자처럼 덩치가 크고 살집이 좋았다.
인상은 험상궂었지만 성격은 의외로 꾸밈이 없고 소탈했다.
두 사람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무림맹에 정식 무사가 되어 처음으로 받은 임무에서 모용평은 세상을 떠나 별이 되었다.
녹림의 한 산채를 습격하는 임무였는데 모용평은 녹림을 다 제압하고도 녹림 두목의 아이를 불쌍하게 여겼다.
이게 다 어른의 죄지.
코흘리개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냐는 것이다.
너무 착하고 감성적이어서, 그래서 모용평은 죽었다.
녹림 두목의 아이가 독 묻은 칼로 방심한 모용평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칼은 빗나갔지만 모용평은 죽었다.
지금의 준후라면 모용평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모용평은 자상으로 인한 기흉을 앓았다.
흉관 삽관을 했다면 모용평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독은 내공으로 치료할 수 있었을 테고.
환자에게서 모용평을 보았고.
산 자에게서 죽은 자를 보았으므로.
준후는 환자가 죽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없었다.
그때의 상실감과 무기력감을 되풀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때의 준후와 지금의 준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의 준후가 검으로 악인을 베었다면 지금의 준후는 메스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서 선생. 환자를 이송한 건 좋았는데 너무 무모했어. 그러다가 서 선생까지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성민이 준후에게 다가와 준후를 타박했다.
준후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지금 그딴 걸 따지는 게 중요합니까? 환자부터 살리고 봐야죠.”
“잘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단지 운이 좋았던 거야.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서 선생이랑 같이 못 다녀.”
“아니, 다 죽어가는 환자 앞에서 뭐 하는 거냐고요.”
“그러는 서 선생이야말로 왜 이렇게 고개가 빳빳해?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끝날 일이잖아. 사과하고 같이 치료하면 되잖아!”
“…….”
“출동 경험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굴지 말라고.”
“최 선생님.”
준후가 성난 짐승처럼 성민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감당하지 못해 성민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환자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이 무모해야 하는 상황도 있는 겁니다.”
“…….”
“그쪽 논리대로라면 사람을 살릴 수 있어도 위험한 수술은 아예 안 해야겠네요?”
“…….”
“그만 닥치고 제 말 들으세요. 최 선생님은 환자 복부에 응급처치하시고요. 나 선생님은 빨리 라인부터 잡아주세요. 라인 잡는 즉시 에피네프린부터 써주시고요.”
준후는 카리스마로 두 사람을 순식간에 휘어잡았다. 멀뚱히 서 있던 두 사람이 환자에게 다가왔다.
챙겨온 구급함을 열어 처치 물품을 펼쳐 놓았다.
1초도 아까운 상황.
준후는 헬기를 타고 오는 동안 생각해둔 진료 순서를 그대로 따랐다.
딸칵!
우선 펜 라이트를 켜고.
한 손으로 환자의 눈꺼풀을 들어 올린 후 동공 반사부터 살폈다.
펜 라이트 불빛이 닿자 환자의 동공이 한 차례 커졌다가 작아졌다. 뇌신경에 장애가 왔다는 뜻이었다.
준후는 이번에는 펜 라이트를 입에 물었다.
양손으로 환자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왼쪽 동공에 불빛을 비추면서.
오른쪽 동공의 움직임을 살폈다.
앞서 펼친 것이 직접 대광반사였고 뒤에 펼친 것이 간접 대광반사였다.
준후는 환자의 양쪽 눈에 번갈아 동공 반사 검사를 하고 가슴주머니에 펜 라이트를 집어넣었다.
한 번 굳어진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위기감을 느낀 탓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팔뚝에 솜털이 곤두섰다.
역시 출혈이 있어.
뇌압이 상승한 탓에 눈이 바깥으로 몰려 있다.
이 정도면 굳이 GCS(의식사정) 스코어를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GCS 스코어는 총 15점이 만점인데 환자의 점수는 0점이었다.
올라갈 곳이 없는 밑바닥이었다.
붕대를 잡기 위해 구급함에 손을 뻗으면서 준후는 성민과 지혜가 응급 처치하는 것을 넌지시 살폈다.
성민은 환자의 복부에 탄력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다.
상의를 벗기지 않고.
그 위에 붕대를 감은 것은 잘하는 일이었다.
환자의 복부에 붕대를 다 감은 후 성민은 환자의 복부를 양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직접 압박법이었다.
지혜는 환자의 팔뚝에 라인을 잡고 생리 식염수를 연결하고 있었다.
환자의 팔뚝 혈관이 얇았음에도 어렵지 않게 혈관을 확보하고 준후가 시키는 대로 식염수에 에피네프린을 믹스하고 있었다.
잔뼈 굵은 외상센터 스태프라서 그럴까.
두 사람의 처치는 침착하고 정확했다.
그래서일까.
죽음이라는 어두운 동굴에 새어 들어오는 희망의 빛을 준후는 똑똑히 보았다.
준후만 잘해준다면 승산이 있었다.
“받으세요.”
준후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지혜가 붕대를 건넸다.
고맙다는 의미로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네받은 붕대에 포장을 풀고서 붕대로 환자의 머리를 칭칭 동여맸다.
일차적인 처치를 마치고 준후는 환자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발산했다.
내공이 손바닥에서 두개골로.
두개골에서 다시 뇌를 향해 파문을 그리며 나아갔다.
준후의 전매특허.
아니, 준후만의 전매특허인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펼쳤던 것이다.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내공을 느끼며 준후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좌측 중대뇌동맥의 한 굵직한 분지에 출혈 소견이 있었다.
혈류의 흐름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홍수로 불어난 계곡물 같은 급류였다.
출혈로 인해 뇌압도 극심하게 높았다.
뇌가 압력을 이기지 못해 뇌 속의 빈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뇌탈출증(Brain herniation)의 전조 증상까지 느낄 수 있었다.
계류장으로 이동하는 데 10분.
계류장에서 병원까지 도착하는 데 20분.
수술과 검사를 하는 데 필요한 시간 20분.
환자에게 필요한 최소 시간이 50분이었는데 그때까지 환자가 버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설령 버틴다고 하더라도.
수술이 성공한다고 해도.
환자의 뇌에 남을 극심한 후유증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젠장.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환자의 미래를 훔쳐보고 나니 초조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초조함의 해일을 벗어날 방법이 없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수술실이 아닌 이상.
솔직히 준후가 환자에게 더 해줄 수 있는 처치는 없었다.
이뇨제나 항고혈압제를 추가할 순 있겠지만 그 정도로 환자의 뇌압을 완전히 컨트롤 하기는 어려웠다.
뇌압을 제대로 낮추려면 두개골 절제술(두개 감압술)이 필요했다.
뇌를 감싸고 있는 두개골을 절제하면 뇌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니까.
연기로 가득 찬 방에 방문을 열면 연기가 그쪽으로 빠져나가는 이치와 비슷했다.
서준후.
너만의 무기를 쓰는 거야.
너라면, 아니 너라서 할 수 있어.
좌절하고 있던 준후의 가슴에서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준후는 넘어져 있던 희망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서니 걷을 힘도 생겨났다.
환자의 정수리에 얹고 있었던 손바닥에 준후는 다시 한번 내공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 방식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내공 뇌혈관 조영술’.
이것은 내공을 파동 형태로 발산해서 내공을 뇌 안쪽까지 침투시키는 방법인데.
준후는 그 방법을 두피까지에만 적용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두피를 통과한 내공이 공명음을 내다가 실체화되어 환자의 두개골을 강타했다.
쩌저저적.
내공을 견디지 못한 환자의 두개골이 과자처럼 부서졌다.
두개골을 고의적으로 파괴하면서.
준후는 환자의 뇌압을 낮추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