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23화 (323/424)

323화

제62장 하늘을 날아서(3)

두두두두. 두두두두.

헬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도심 창공을 가로지르던 헬기는 마침내 긴 여정을 끝내고 신원대학교 병원의 품으로 돌아왔다.

옥상 계류장에 헬기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헬기로 다가왔다.

헬기가 만들어낸 광풍에 스태프들의 머리가 봉두난발로 흩날렸다.

의사 가운은 벗겨질 듯 펄럭거렸다.

탓!

준후가 가장 먼저 헬기에서 내려 바닥을 밟았다.

환자를 양팔로 번쩍 들어 대기하던 스태프들이 가져온 스트레쳐 카에 옮겼다.

천하장사 같은 괴력에 스태프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버텨주세요. 최대한 오래. 저희도 최선을 다할 수 있게.’

준후는 환자의 손을 꼭 붙잡았다.

환자의 손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작고 차가웠다.

오는 동안 환자는 2번의 심정지를 겪었다. 비좁은 헬기 안에서 세 사람이 함께 CPR을 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래도 환자는 아직 희미하게 숨이 붙어 있었다.

포기하기는 일렀다.

이윽고 성민과 지혜가 헬기에서 내렸다.

준후와 달리 두 사람은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다.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고.

CPR을 하느라 영혼까지 나간 표정이었다.

“선생님. 수술방은 잡아 놨고 마취의도 대기 중입니다. 이다음에는 어떻게 할까요?”

안경 쓴 스태프가 성민에게 물었다.

“수술방에 바로 보내지 말고 복부 CT랑 브레인 CT부터 최대한 빨리 촬영해. 도중에 피 검사 하고 혈액형 확인하는 대로 수혈 팩 달고.”

“네. 선생님.”

두 명의 스태프가 환자가 누운 스트레쳐 카를 끌고 옥상을 벗어났다.

때마침 헬기의 작동이 멈췄다.

세상이 한순간 고요해졌다. 프로펠러가 만들어냈던 폭풍도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준후는 점으로 작아지는 스트레쳐 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저 살고 싶어요. 혜인이랑 혜인이 엄마…… 그리고 가을이가 보고 싶어요. 잠깐 바보짓을 했나 봐요…….

회광반조로 잠깐 회생한 환자가 했던 말이.

가시처럼 준후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환자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그 가시는 앞으로 영영 준후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휴. 잠깐이라도 숨은 돌리겠네. 서 선생 고생했어요.”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두 분이야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세 사람은 그 길로 수술방으로 이동했다.

환자를 살리는 데 혁혁한 공을 올리긴 했지만 준후의 역할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후 펼쳐질 수술까지 책임져야 했다.

외상외과는 외상 입은 환자의 전신을 책임지지만 일부 장기는 타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대표적인 과가 흉부외과와 신경외과였다.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고 해당 장기만의 특징이 뚜렷해서였다.

외상외과에서 3, 4년 차 레지던트를 요청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3, 4년 차는 되어야 단독 수술을 믿고 맡길 수 있기 때문에.

환자의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세 사람은 수술실 내부에 마련된 작은 휴게실에서 달콤한 여유를 맛보았다.

침묵조차 꿀과 같았다.

“슬슬 2차전 하러 갑시다.”

성민이 앞장서서 휴게실을 떠났고 그 뒤를 지혜와 준후가 따랐다.

성민이 빈 업무 책상에 앉았다.

환자의 차트를 살피는데 마침 환자의 CT 검사 결과가 나왔다.

성민은 브레인 CT부터 살폈다.

“이거 좌측 두개골이 완전 박살 났네. 암벽에 머리를 제대로 부딪친 모양인데?”

성민이 경악하며 중얼거렸고.

준후는 멋쩍게 웃었다.

사실 환자의 두개골을 저 지경으로 만든 범인은 준후였으니까.

“뇌부종 소견이 있고. 좌측 중대뇌동맥 쪽에 거대 혈종이 보이네요. 150cc 정도 되어 보이는데요?”

“이 정도면 뇌압이면 벌써 뇌탈출증이 왔어야 정상 아닌가?”

“두개골이 깨지면서 두개골 절제술 효과를 낸 것 같네요.”

준후가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여러모로 다행이야. 중대뇌동맥이 파열된 건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서 선생 의견은 어때요?”

“저도 선생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분지 혈관들이 터지면서 한 자리에 뭉친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복부 CT를 봅시다”

성민의 클릭으로 모니터에 복부 영상이 떠올랐다.

환자의 복강 곳곳에 널따란 하얀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이에 성민이 눈살을 찌푸리고.

준후는 입술을 깨물었으며.

지혜는 발을 동동 굴렀다.

혈복강(Hemoperitoneum).

복부의 빈 공간을 피가 가득 채운 질환을 말했다.

소화기 외과 질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초응급 질환인데.

여타 다른 혈복강 환자보다 이송된 환자의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 내부에 고인 피가 벌써 장기들을 압박하는 수준이었다.

위와 간, 췌장 같은 장기들이 벌써 복강 안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러면 결정 났군. 혈복강 수술을 먼저 하는데 이의는 없겠죠?”

성민이 고개를 돌려 준후를 응시했다.

하지만 준후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혈복강이 더 응급한 질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복부 수술을 하는 동안, 두개 내 혈종을 방치했다간 혈종이 신경을 짓눌러 신경이 손상될 위험이 컸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환자의 뇌신경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혈복강도 치료할 수 있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뿌옇게 하얘졌다.

팟!

막다른 길에 내몰린 준후는 왼손 검지로 귀밑을 지그시 눌렀다.

‘해마 신경 자극술’을 펼칠 것이다.

촤르르륵.

그동안 읽은 서적과 논문들이 하나의 책이 되어 준후의 머릿속에서 넘어갔다.

해마는 장기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이고.

해마를 점혈로 자극하면.

준후는 원하는 정보를 언제든지 빼낼 수 있었다.

생각해내는 거야.

차선이 아닌 최선의 길을.

이런 순간을 대비해서 열심히 공부해왔잖아?

그렇게 머릿속 책을 뒤지던 도중.

한줄기 섬광이 준후의 뇌리를 번뜩 스쳤다.

“뭐예요? 왜 대답이 없어요?”

“선생님. 혈종 제거술을 먼저 하면 안 됩니까?”

준후의 질문이 메아리처럼 수술실에 퍼져나갔다.

성민이 오만상을 썼다.

“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제 생각에도 이번에는 준후 쌤이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아요. 혈복강 수술을 안 하면 환자는 당장 죽어요. 혈종도 위험하지만 당장 생명이 위급한 일은 아니잖아요.”

지혜도 성민의 손을 들어주었다.

의견의 저울이 성민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신경외과 출신이라서 역시 뇌가 더 중요하다 뭐 이런 거예요?”

성민이 따지듯 물었다.

“아니요. 저도 혈복강 수술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혈종 제거술을 먼저 하자고 해요?”

“혈종 제거술은 10분이면 끝낼 수 있으니까요.”

“10분? 이 사람이 지금 장난하나.”

성민이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비록 신경외과 출신은 아니지만.

혈종 제거술이 그리 간단한 수술이 아니라는 것쯤은 성민도 잘 알았다.

혈종 제거술에 필요한 시간은 최소 1-2시간이었다.

두개골을 절제하고 경막, 지주막 등의 뇌막층을 절제하는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이다.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여요? 이런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나 펠로우 2년 차입니다.”

“…….”

“서 선생보다 짬밥을 먹어도 3년은 더 먹었어요. 사람을 놀리는 것도 유분수지.”

“저도 죽어가는 환자를 두고 농담 따먹기를 할 만큼 한심한 인간은 아닙니다.”

“그럼 뭐, 혈종을 초능력으로 제거하겠다는 거예요?”

성민의 목소리가 시누이처럼 밉살맞았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 보고 판단하셔도 늦지 않잖아요?”

준후는 10분 안에 혈종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성민의 표정이 불신에서 의심으로, 의심에서 기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준후의 의견이 마냥 개소리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그게 가능해요? 2년 차가?”

“네. 저는 3, 4년 차 같은 2년 차라 가능합니다. 비록 직접 해본 건 아니지만 교수님이 처치하는 걸 몇 번 본 적도 있고요.”

“…….”

“제가 벼랑까지 내려가고 환자를 혼자 이송하면서 시간을 대폭 단축한 건 선생님도 알고 계시죠?”

준후는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성민을 압박했다.

준후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준후가 없었다면.

애초에 스태프들은 아직도 산에 머물렀어야 했다.

119 산악 대원들이 환자를 구출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전 반대예요.”

잠자코 있던 지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화에 껴들었다.

“이건 너무 무모해요. 상식에도 안 맞고요. 혈복강보다 두개 혈종을 먼저 제거한다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간호사인 저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어요.”

“…….”

“선생님. 서 선생님한테 혹하지 말고 빨리 결정을 내리세요. 최종 결정권자는 선생님이잖아요.”

지혜가 성민을 독촉했고.

성민은 턱을 쓸어내리며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대화를 엿듣고 있던 주변 스태프들 역시 성민의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럼…… 혈종 제거술 먼저 합시다.”

“선생님!”

“단, 서 선생. 여기에는 조건이 있어요. 시간에 관해서는 타협을 못 봅니다. 수술대 앞에 자리를 잡는 시점을 기준으로 딱 10분을 줄 거예요.”

“…….”

“10분 지나면 바로 복강 수술로 넘어갈 겁니다.”

“얼마든지요.”

준후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 찼다.

예전의 준후라면 망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준후는 호월십이수를 대성(大成)했다.

처치 속도와 정확도에 관해서라면 웬만한 교수들보다 앞섰다.

“하…… 난 몰라요. 어차피 책임은 성민 선생님이 지는 거니까.”

지혜가 냉기를 폴폴 날리며 여자 탈의실로 이동했다.

준후와 성민도 남자 탈의실로 이동했다.

땀에 젖은 수술복을 새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계수대에서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했다.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면서.

벅벅벅벅, 솔로 팔뚝을 문지르는 소리만 요란하게 났다.

“선생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혈종 제거술, 꼭 성공시킬게요.”

준후가 넌지시 고마움을 표했다.

“솔직히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는데…… 최선의 방법이 있다면 최선을 따라야죠.”

“…….”

“난 아직도 환자의 유서가 눈에 아른거려요. 기왕이면 환자가 뇌도 안 다친 채 건강하게 가족과 재회했으면 좋겠고.”

하지만 성민의 눈동자에 맺혔던 감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성민은 금방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약속한 건 단 10분이에요. 11분도 안 되고 10분 30초도 안 돼요. 수술방 들어가서 딴소리하면 내쫓습니다.”

“그럼 9분은 됩니까?”

“2년 차인데 그놈의 몹쓸 자신감은 어디서 샘솟는 거예요?”

“머리하고 가슴하고 손이죠.”

준후가 피식 웃었다.

스크럽을 마친 두 사람은 소독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수술 복장을 갖췄다.

수술 가운, 수술모, 마스크, 장갑을 착용하고 두 사람은 비장한 표정으로 수술방에 들어섰다.

지이이잉.

1번 수술방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천장에서 하얀 소독액이 연기 형태로 한바탕 쏟아지고.

2번째 격벽마저 열리면서 수술방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환자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지혜는 먼저 와서 대기 중이었고 수술대 양옆으로 놓인 드레싱 카트에 각종 수술 도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전신 마취 끝났습니다. 바로 수술 들어가셔도 돼요.”

수술대에서 조금 떨어진 커튼 뒤에서 마취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혈종 제거술이 먼저였으므로.

준후는 집도의 자리에 서서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혈복강이 심해진 탓에 환자의 배가 이전보다 더 남산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혈종 제거술도.

혈복강 수술도.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싸움이라면 지지 않아.

설령 상대가 죽음이라고 해도.

각오를 다진 준후의 눈빛이 비장했다.

“지금부터 중대 뇌동맥에 발생한 혈종 제거술을 시작하겠습니다. 타이머 켜주세요. 시간은 10분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