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제62장 하늘을 날아서(4)
삐빅!
지혜가 의료용 타이머를 10초로 맞추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눈에 보이지 않던 시간이 뚝뚝 깎여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술실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혜는 준후에게 호감이 있었다.
배우 같은 외모.
모델 같은 체구.
다정한 눈빛과 말투.
환자를 위해서라면 벼랑에라도 뛰어드는 용기와 투철한 직업의식 등등.
하지만 준후가 혈복강 수술보다 혈종 제거술을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모든 호감의 콩깍지가 벗겨졌다.
이제 지혜는 준후가 본인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이라고 확신했다.
세상에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이라고 확신했다.
정녕 환자를 위했다면.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으면 안 됐다.
“면도칼 주세요.”
“…….”
“선생님?”
“아. 네. 죄송합니다.”
딴 생각을 하느라 반응이 늦었다.
지혜는 살짝 부끄러워하며 준후에게 면도칼을 건넸다. 하지만 준후는 면도칼을 받지 않았다.
“저보고 수술하지 말라는 거죠?”
준후의 핀잔에 어리둥절하던 지혜는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달았다.
면도칼의 칼날 부분을 준후에게 건넸던 것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혜는 서둘러 면도칼의 방향을 180도 바꿔 면도칼의 손잡이 부분을 준후에게 건넸다.
“제가 미우시죠?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성민 선생님을 꼬드긴 거 같죠?”
지혜는 ‘알긴 아네’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그런데 말입니다. 수술방 바깥에 있던 감정을 수술실까지 끌고 오면 안 됩니다. 저를 미워할 거면 수술이 끝난 다음에 실컷 미워하세요.”
준후가 면도칼을 받고서 지혜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빛은 교수님들의 눈빛이었다. 태풍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은 눈빛이었다.
정말 10분 안에 혈종 제거술이 가능하다고 믿는 눈빛이었다.
“저는 아직도 선생님 판단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음식 메뉴 고르는 걸로도 다투는 게 사람입니다. 사람 살리는 일로 다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죠.”
“이 와중에도 잡담할 여유가 있나 봐요?”
지혜가 타이머를 응시하고 빈정거렸다.
“당장 1-2분을 아끼는 것보다 선생님이 수술에 집중하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누가 보면 선생님이 레지던트가 아니라 뉴스에 나오는 명의인 줄 알겠어요.”
“집도의 자리에 섰을 때, 전 항상 제가 명의라고 생각합니다. 자리에 걸맞은 책임 의식이 있어야죠.”
준후는 여전히 수술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술 시간이 1분이나 지났음에도.
면도칼을 손에 쥐었을 뿐.
아무런 처치도 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성민을 슬쩍 쳐다보니 성민은 별다른 개입 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
오늘만큼은 지혜도 성민의 속내를 알기 어려웠다.
“지혜 선생님.”
“왜요?”
“우린 같은 배를 탄 동지입니다. 선생님, 환자를 살리고 싶죠?”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이 같으니까 동지라고요. 제가 선장 노릇을 하는 것도 딱 9분 동안입니다. 그때까지만 선장 노릇하게 도와주시죠.”
“좋아요. 저도 준후 선생님하고 싸우려고 수술방에 들어온 건 아니니까요.”
준후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쥔 면도칼로 환자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수술 후 머리카락으로 인한 감염을 막기 위한 ‘삭두’라는 과정이었다.
준후의 손놀림이 날렵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손이 허공에서 비행하는 것 같았다.
툭. 툭. 툭.
면도칼이 지나간 자리에는 머리카락 한 올 남아나지 않았다. 숱이 무성했던 환자의 머리는 순식간에 민둥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게 사람이야? 바버야?
지혜는 속으로 감탄했다.
삭두는 중요성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자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평균적으로 5분은 걸렸다.
그런데 웬걸?
준후는 단 1분 만에 삭두를 끝장내 버렸다.
환자의 머리가 가뜩이나 숱이 맡고 풍성했는데 말이다.
머리카락을 받기 위해 깔아놓은 수술포 위로 환자의 잘린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다 모으면 가발을 하나 맞출 수도 있을 듯했다.
그때 준후가 머리카락이 쌓인 수술포를 곱게 접어서 바닥에 던졌다.
“성민 선생님. 두피 절개 준비해 주세요.”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성민이 포피돈 용액에 젖은 솜으로 환자의 맨들맨들한 두피를 소독했다.
그 위에 하얀 방포를 덮었다.
무영등 불빛 덕분에 방포가 더 하얗게 보였다.
“10번 블레이드요.”
“네.”
지혜는 스칼펠(scalpel, 칼대)에 포장을 벗긴 10번 메스를 끼워 준후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손잡이 쪽으로 제대로 건넸다.
산만했던 정신이 이제야 한 점으로 모이고 있었다.
* * *
스으으윽.
준후는 환자의 왼쪽 측두부에 4센티미터 길이의 절개창을 냈다.
종잇장이 갈라지듯 두피가 갈라졌다.
절단면이 깔끔하고 평평했다.
자로 대고 절개한 것만 같았다.
절개가 끝나자 절개창에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절개에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두피는 다른 외피보다 혈관이 더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그랬다.
지혜가 절개창에서 흐르는 피를 거즈로 닦아냈고.
성민은 견인기로 절개창을 상하로 벌렸다.
순간 수술 시야가 탁 트였다.
준후는 절개창 안쪽에 분홍빛 속살을 가로 방향으로 한 번 더 갈랐다.
두피는 세 가지 층으로 존재했다.
두개 외피, 두개 내피, 두개 피하조직.
첫 번째 칼질이 두개 외피부터 두 개 내피의 절반을 갈랐으므로.
아직 남은 부위를 추가로 가르기 위한 것이었다.
스으으윽.
메스가 지나가면서 두 번째 절개창이 생겨났다.
벌어진 살점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치이이익.
지혜가 기다렸다는 듯 썩션기로 피를 썩션했다.
동작이 날다람쥐처럼 잽쌌다.
신경외과 수술 어시스트 경험이 제법 있어 보였다.
비록 극 초반이지만 수술은 순탄했다. 지혜와 성민이 수술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리트랙터요.”
“네.”
준후는 절개창에 고정형 리트랙터를 설치했다. 절개창을 적당히 벌리고 리트랙터의 나사를 조였다.
“우와. 뼛조각이 무슨 과자 부스러기 같네요.”
“눈으로 보니까 더 심각한데. 서 선생 감당할 수 있겠어요?”
환자의 거북이 등껍질 같은 두개골을 확인하고 지혜와 성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죠. 차라리 잘 됐어요.”
“이 꼴을 보고 그런 말이 나와요?”
성민이 혀를 차며 반문했다.
환자 두개골이 박살 났는데 전화위복이라는 단어를 쓰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준후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포셉으로 손바닥 4분의 1 크기 정도 되는 두개골을 드러냈다.
그 뒤에 숨어 있던 우유 지방층 같은 연막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두개골이 바스라져서 두개골 절제술을 따로 할 필요가 없잖아요.”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혈종 제거술 할 때 가장 오래 걸리는 게 두개골 절제술이죠?”
“그럼요.”
준후는 연막 주변에 뼈 부스러기를 썩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뇌수술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두개골 절제술이었다.
그런데 환자의 두개골은 이미 대부분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까지 계산해서 10분 안에 끝내겠다고 한 거네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환자에게 두개골 골절이 없었으면 저도 혈복강 수술보다 혈종 제거술을 먼저 하자고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우와! 정말 3, 4년 차 같은 2년 차 맞네.”
성민이 감탄하며 준후를 치켜세웠고 준후는 피식 웃었다.
사실 3, 4년 차라고 해도 이런 발상을 할 수는 없었다.
혈복강 수술이 시급한 상황에.
어찌 혈종 제거술을 먼저 하자고 배짱을 부릴 수 있겠는가.
설령 운 좋게 발상은 떠올려도.
그들은 10분 안에 혈종 제거술을 소화할 능력이 없었다.
준후는 일사천리로 연막을 제거했다.
그 아래 펼쳐진 지주막에 문제의 혈종이 있었다.
검붉은 혈종의 크기는 무려 100cc 가까이 되었다.
혈종 중에서도 중대형에 속하는 사이즈였다.
주변 혈관에서 터진 피를 집어삼키며 녀석은 지금도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만약 혈복강 수술을 먼저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혈종이 더더욱 커져 인근 신경을 짓눌렀을 것이다.
환자에게 영구적인 뇌 손상을 남겼을 것이다.
위치를 감안했을 때 말하기 영역이 손상됐을 것이다.
준후는 수술 후 말을 더듬었을지도 모르는 환자를 상상해 보고 진저리를 쳤다.
목숨이 가장 중요한 건은 진리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QOC(Quality of life, 삶의 질) 역시 무시되어서는 안 됐다.
준후는 환자에게 목숨뿐만 아니라 삶의 질도 선물하고 싶었다.
“썩션이요.”
“네.”
치이이익.
준후는 썩션기를 사용해 혈종을 흡인하려 했다. 그런데 혈종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혈종은 썩션기 입구에 달라붙을 뿐 좀처럼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부모님 속 썩이는 미운 8살 아이 같았다.
썩션기의 출력을 높여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준후는 썩션을 포기했다.
“아니, 세상에 무슨 저런 혈종이 다 있어? 힘이 장사네. 장사.”
성민의 말은 익살맞았지만 성민의 목소리에는 난감하다는 감정이 묻어났다.
한편 지혜는 무엇을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흡인술이 안 통하는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일단 10번 주시겠어요.”
준후는 지혜에게 건네받은 메스로 혈종을 조심스럽게 세로로 갈라보려고 했다.
그런데 메스는 영 힘을 쓰지 못하고 겉돌았다.
혈종 겉표면이 이미 딱딱하게 굳어 경질화가 진행됐던 탓인 듯했다.
메스를 세로로 그을 때마다.
혈종은 하트 모양으로 중심부가 움푹 파일뿐이었다.
“하…….”
허탈하게 웃으며 준후는 혈종에서 손을 거두었다.
낭패가 따로 없었다.
마라톤을 뛰는데 결승선 코앞에서 다리에 쥐가 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사기로 흡인을 해보는 건 어때요?”
성민에 대안을 내놓았다.
“메스가 안 드는데 주사기 바늘이 혈종을 뚫을 수 있을까요?”
“시도라도 해봐요.”
“50cc 실린저(주사기)에 16G 니들 꽂아서 주시겠어요?”
“네. 선생님.”
준후는 주삿바늘을 바꿔가며 혈종을 찔러댔지만 혈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메스를 사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삿바늘에 닿은 혈종은 터지지 않고 모양만 일그러졌다.
그때마다 준후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신경외과 수술할 때 이런 케이스 없었어요?”
지혜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석회화된 혈종 같은데. 석회화된 혈종 중에서도 이만한 크기의 혈종은 본 적이 없네요.”
준후는 입술을 깨물며 혈종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타이머에도 눈길을 주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40초.
고민하는 시간조차 사치로 느껴질 정도였다.
줄어드는 숫자들이 준후의 마음을 올가미처럼 옥죄어왔다.
다른 곳에서 정답을 찾지 마.
정답은 항상 내 안에 있어.
준후는 3초 정도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에 쥔 메스의 촉감이 문득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무림 출신의 검객이라는 것을 준후는 모처럼 자각했다.
한동안 대부분의 검사와 치료를 내공 위주로 펼쳤던 탓이었다.
이윽고 준후의 손에 들린 메스가 혈종에게 다가갔다.
가로로 누운 메스가 눈부신 빛을 흩뿌려댔다.
“준후 선생님. 뭐 해요?”
“메스로 혈종을 잘라 버리려고요.”
“너무 위험해요! 잘못하다가 신경하고 혈관을 자르면 어떻게 하려고요?”
지혜가 다급하게 준후를 만류했지만.
준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준후는 검과 함께 수십 번의 생사를 넘나들었다.
삶과 죽음으로 담금질을 한 준후의 검세는 그 무엇보다 정교하고 날카로웠다.
파주임풍(把酒臨風).
번쩍!
메스가 허공에 가로의 궤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