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제62장 하늘을 날아서(5)
툭!
악인의 모가지가 떨어지듯.
지주막 표면에 붙어 있던 혈종이 잘려나갔다.
지주막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메스는 정확하게 혈종과 지주막 사이만을 베어냈다.
신경과 혈관의 손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준후의 검격은 그야말로 칼바람과 같아서 날카로우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치이이익.
혈종을 지탱해 주던 뿌리 부분이 잘려나갔으므로 혈종은 가볍게 썩션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맞췄네요. 딱 9분대로 끊고 싶었는데.”
골칫거리를 해결한 준후의 목소리가 산뜻했다.
삐삐삐.
삐삐삐.
때마침 타이머가 젖 달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시끄럽게 울어댔다.
하지만 넋이 나간 지혜는 타이머를 끌 생각도 못 했다.
정신을 못 차린 건 성민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준후만 쳐다볼 뿐이었다.
“다들 잠에서 깨시죠? 수술 아직 끝난 거 아닙니다.”
준후가 직접 타이머를 껐다.
“참나, 하지 말라는 짓을 해도 다 성공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성민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혈종이 특별한 케이스인 걸 감안하더라도.
준후의 칼질은 너무 위험했다.
지주막에도 많은 동맥과 정맥과 신경이 지나가지 않는가.
메스가 조금만 삐끗했어도.
끔찍한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최악의 경우 준후는 뇌를 포 뜰 뻔했다.
“준후 선생님은 신경외과에서도 이렇게 수술하나요?”
“아뇨. 딱히요.”
“그럼 저희가 만만해서 이러시는 건가요?”
질문하는 지혜의 목소리가 앙칼졌다. 준후 때문에 꼬인 마음의 매듭이 여전히 단단했다.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이것뿐이어서 그랬던 겁니다. 지혜 선생님이 저라면 다른 방법이 있었나요?”
“그…… 그건…….”
“수술이 잘못되어도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 제 능력을 온전히 믿는 마음. 저는 오직 세 가지 마음으로만 수술을 합니다.”
준후가 지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혜가 불이라면 준후는 물이었다. 두 사람의 온도 차이는 극명했다.
“세 가지 중에 잘못된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하나라도 있다면 고치죠.”
준후의 추궁에 지혜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는요, 솔직히…… 선생님이 너무 자신만만한 모습이 싫었어요. 자꾸 누가 떠올라서.”
금세 촉촉해지는 지혜의 목소리를 듣고.
준후는 지혜에게 숨겨진 사연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수술 끝나면 들려주세요. 그 사람이 누군지.”
“네.”
산만했던 분위기를 수습한 후.
준후는 서너 장의 거즈를 생리 식염수에 적셨다. 젖은 거즈들을 두피의 절개창 위에 덮었다.
현재 환자의 뇌압은 20mmHg.
정상 뇌압인 5-15mmHg보다 조금 높았다.
뇌압을 떨어뜨리고.
나중에 두개골 성형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절개창을 당장 봉합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성민 선생님. 교대하실까요?”
“좋아요. 드디어 내 차례인가?”
성민이 의욕이 넘친다는 듯 천장에 번쩍 팔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준후와 자리를 교체했다.
고작 10분이 흘렀건만 환자의 복부는 이전보다 조금 더 볼록해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터질 것 같았다.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혈종 제거술은 에피타이저일 뿐.
본식은 혈복강 수술임을 준후는 잊지 않고 있었다.
환자의 목숨은 성민의 손에 달려 있었고 동시에 성민을 돕는 준후의 손에도 달려 있었다.
“선생님. 수술 성공률은 얼마나 될까요?”
질문하는 준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요.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한 가지 확실한 건?”
“환자가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다는 겁니다. 복부가 팽창한 거에 비해 바이탈이 안정적이에요. 심정지도 헬기에서 내린 후에는 한 번도 없었고.”
“…….”
“간 문맥에 빨리 도달할 수만 있으면 승산은 충분해요.”
성민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었다.
믿음직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렇게 혈복강과의 2차전을 준비하면서 준후는 환자가 회광반조 때 했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선생님. 저 살고 싶어요……. 혜인이랑 혜인이 엄마……. 그리고 가을이가 보고 싶어요. 잠깐 바보짓을 했나 봐요…….
어쩌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은 의료진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비록 의식은 없더라도.
환자는 가족과 재회하고 싶어서 안간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시스트가 됐음에도 준후는 소위 말해 얼을 타지 않았다.
환자의 복부를 포비돈 용액에 젖은 솜으로 소독하고 그 위에 방포를 덮었다.
인턴 시절.
소화기 외과에서 수련한 적이 있었다.
기본적인 수술 루틴은 아직 기억했다.
“10번 블레이드.”
지혜에게 건네받은 메스로.
성민이 환자의 복부를 세로로 갈랐다.
부족한 시간이 바짝 뒤를 쫓고 있었기에 성민의 칼질이 다급했다.
스으으윽.
첫 번째 칼질에 피부와 피하조직 근막이 잘려나갔다.
준후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양손에 견인기를 쥐었다. 견인기로 절개창을 좌우로 벌렸다.
참을성 없는 성민이 도중에 두번 째 칼질을 해댔다.
지방층과 복강이 세로로 갈라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돌발 상황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푸슈슈슛!
복강 내부에 고여 있던 혈액들이 압력 차로 인해 절개창으로 솟구쳤다.
피의 분수가 정확히 준후의 안면을 덮쳐왔다.
“꺄아아악!”
지혜가 비명을 지르고.
성민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당황하고 걱정하는 동료들과 달리 준후의 낯은 평온하기만 했다.
준후는 고개를 옆으로 젖혀 핏물을 피해냈다.
무림인이었던 준후에게 이 정도 반사 신경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복강에서 터져 나왔던 피가 곧 멈추면서.
수술대는 피범벅이 되었다.
수술대 아래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고 비릿한 피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아…… 이런! 준후 선생님, 미안해요. 마음이 너무 급해서 피가 분출할 수 있다는 걸 설명 못 했네.”
“선생님답지 않게 왜 그러셨어요? 혈복강 수술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런 케이스를 접한 게 너무 까마득해서…….”
성민이 민망해하며 오더를 내렸다.
인턴에게는 수술대 정리를.
지혜에게는 복강 썩션을.
준후에게는 혈액팩 짜는 일을 맡겼다.
준후는 수액걸이로 다가가 혈액팩을 양손으로 있는 힘껏 짜냈다.
조금 전의 막대한 출혈로 환자의 혈류가 불안정해졌다. 최대한 빨리 더 많은 피를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준후가 혈액팩을 쥐어짤 때마다 남아 있던 혈액이 꿀렁꿀렁 빠져나갔다.
그만큼 악력이 셌던 것이다.
저는 환자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환자분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마세요.
의식 없는 환자를 응시하며.
준후는 속으로, 필사적으로 외쳤다.
* * *
4층 휴게실.
준후와 성민, 지혜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준후 선생님. 특히 고생 많았어요. 환자 이송도 그렇고 수술도 그렇고 다 선생님 덕분에 잘 풀렸어요.”
성민이 준후의 어깨에 친근하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첫 만남부터 준후에게 틱틱거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디 저 혼자 다 한 일인가요? 두 분이 없었으면 어림 반푼 어치도 없었죠.”
“이럴 때는 또 겸손하네?”
“기억에 왜곡이 있으신 거 아닙니까? 전 거만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요?”
“으음…….”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성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민이 느끼기에 준후는 거만한 타입이 맞았다.
“제가 2년 차답지 않게 자기주장이 강해서 거만하다고 느낀 거 아닐까요?”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부디 오해하지 마시고요.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녀도 안 됩니다?”
“뭐, 앞으로 하는 거 봐서.”
성민이 농담조로 단서를 달았다.
목이 바짝 말라서 성민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쭉 들이켰다.
수술 끝나고 마시는 커피는 언제나 꿀맛이었다. 카페인 덕분에 정신도 번쩍 들었다.
화제가 끊겨 침묵이 돌 때.
성민은 곁눈질로 준후를 살폈다.
힘든 일이라고는 1도 모르고 지냈을 것 같은 준후는 의외로 대담하고 힘이 장사였다.
벼랑에 몸을 던지지를 않나.
환자를 두 팔로 안고 혼자 헬기까지 달리지를 않나.
서전으로서의 감각도 탁월했다.
준후는 의학적인 근거를 들어 혈복강 수술보다 혈종 제거술을 먼저 하는 게 좋다고 판단을 내렸다.
1분 1초가 아쉬운 순간에 말이다.
그렇다고 공수표를 던진 것이 아니라 본인이 말한 바를 야무지게 실천하기도 했다.
혈종 제거술을 고작 10분 만에 끝냈으니까.
두개골이 골절되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 속도와 정확도는 경이로웠다.
준후를 보고 있자면.
성민은 자신의 2년 차 시절이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참, 지혜 선생님.”
“네.”
“아까 못다 한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준후가 화제를 바꾸자 지혜가 먼 산을 바라보듯 시선을 멀리 두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에요. 모르셔도 돼요.”
“대단한 게 아니면 말 못 할 이유도 없는 거 아닌가요? 미움을 받더라도 왜 받는지는 알아야 발 뻗고 잘 것 같은데.”
준후가 집요하게 캐묻자 지혜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사실은…….”
지혜가 더듬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 저희 친할머니께서 디스크 수술을 받으셨거든요. 담당 선생님이 큰 수술은 아니고 남들 다 받는 수술이라고, 별 탈 없이 끝날 거라고 했거든요?”
“…….”
“근데 수술 끝나고 할머니 허리가 더 안 좋아지신 거예요.”
지혜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 쥐고 있던 커피 캔이 우그러졌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더니 수술 끝나고 할머니 상태가 악화되니까 뭐라고 한 줄 알아요?”
“…….”
“글쎄. 할머니 상태가 원래부터 너무 안 좋았다고 변명하는 거예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
“그때부터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의심부터 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준후 선생님한테 그 못된 의사가 겹쳐져서 그만…….”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네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준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본래 허풍과 실력은 구분하기 힘든 법이었다.
그리고 악인들은 그 경계를 아주 얍삽하게 잘 써먹었다.
또한 지혜의 지적이 100퍼센트 틀린 것도 아니었다.
무림에서 수많은 동료를 잃은 후 준후는 환자만 보면 눈이 돌아갔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운이 좋은 건지, 실력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전투적인 치료 방식이 언젠가는 화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콜폰.
가운 주머니에서 콜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하니 병동 콜이었다.
“두 분 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슬슬 올라가 봐야겠네요.”
“고생했어요. 준후 선생님.”
“앞으로 자주 부를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준후가 떠나면서 휴게실에는 성민과 지혜만 남았다.
“여러모로 감탄만 나오는 사람이네요, 준후 선생님은. 성민 선생님은 준후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혜가 성민을 쳐다보며 물었다.
외상외과에서 제일 깐깐한, 그래서 심지어 별명이 깐돌이인 성민의 의견이 궁금했다.
“준후 선생님이요?”
성민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레지던트 중에서 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