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27화 (377/424)

327화

제63장 방법(2)

“별일 없어.”

서진이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손에 들었던 휴대폰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헛기침을 하고 정면에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별일 아닌데 왜 그렇게 빨리 휴대폰을 감추실까? 혹시 애인하고 메신저라도 주고받은 거 아니야?”

준후가 서진 옆자리에 앉아 추궁에 들어갔다.

사실 서진의 행동 중에 의심 가는 행동이 없지 않았다.

서진은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픈 미소를 피어 올리곤 했다.

기계 같은 서진을 웃게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은 역시 사랑밖에 없지 않을까?

“애인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남한테 관심 끄고 네 일이나 봐. 오늘 차트 쓸 거 많더만.”

“에이, 연애하는 거 맞네. 연애하는 게 뭐 그렇게 쑥스러운 일이라고 숨기냐?”

“진짜 아니라고.”

서진이 고개를 휙 돌려 준후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살벌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환자 이야기는 그렇게 잘 들어주면서 내 이야기는 왜 귓등으로도 안 듣는데?”

“네가 숨기는 게 있으니까 그렇지. 별일 아니면 그냥 오픈하면 되는 거 아닌가?”

준후가 곧바로 맞받아쳤다.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서진의 비밀을 캐내야만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듯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눈싸움을 했다.

먼저 백기를 든 사람은…….

서진이었다.

서진은 한숨을 푹 쉬더니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

준후는 대답 대신 손으로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서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액정 화면을 준후에게 내밀었다.

액정에 떠오른 것을 준후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오해를 한 게 맞는 것인지.

액정에 떠오른 것은 여성과 주고받은 메시지가 아니었다.

액정에 떠오른 것은…….

놀랍게도 웹소설이었다.

서진의 은밀한 취미가 웹소설 읽기였던 것이다.

소설 제목은 ‘SSS급 대마도사의 귀환 생활’이었다.

결벽증에 끝판왕.

감정 표현에 스크루지라 불리는 평소의 서진 이미지와는 확실히 괴리감이 있는 취미였다.

“조금 의외긴 한데…… 그렇다고 숨길 정도의 취미는 아니지 않나? 요즘 사람들 웹 소설 많이 보이는데.”

“흠…… 그런가?”

준후가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자 서진이 안심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넌 웹소설 좋아해?”

“좋아하는 편이라고 봐야지. 그중에서도 무협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야. 고풍스럽고 인간미가 잘 드러나니까.”

말을 하면서 준후는 조금 민망했다.

허구의 세계인 줄 알았던 무림을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돌아왔으며 무림에서 얻은 능력으로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난 무협은 별로더라. 어려운 한자나 단어도 많고 개방은 거지의 문파라는데 별로 와 닿지도 않고.”

서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용어 같은 건 몇 번 읽다 보면 금방 익어. 그리고 그런 용어들이 오히려 무협에 매력을 높여주는 거야.”

“그럼 너나 많이 읽어라. 난 판타지나 계속 볼란다.”

대화에 흥미가 사라졌는지 서진이 다시 모니터를 보며 차트 업무를 시작했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청명했다.

손가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하여간 업무 스킬은 백점이어도 사교 스킬은 빵점인 서진이었다.

뭐, 어쩌면 이런 모습까지도 서진에 매력인지도 모르겠지만.

준후도 서진 옆에서 경과 기록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에 경추 수술이 있었다.

* * *

그 날 저녁.

당직실에서 당직 근무를 서던 준후는 손에 든 휴대폰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준후의 등 뒤에선 대휘가 후루룩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유혹적인 라면 냄새가 당직실에 진동했다. 냄새가 매운 걸 보니 매운 라면을 먹고 있는 듯했다.

“선배는 저녁 안 드세요?”

“아까 간단하게 먹었어.”

“뭐 드셨는데요?”

“빵하고 우유.”

“새벽에 배고프실 것 같은데. 저기 캐비넷에 컵라면 몇 개 쟁여 놨거든요. 빨리 드세요. 안 그러면 혁재 선배가 쓸어버릴 거예요.”

“그러고 보니 혁재는 요즘 어때?”

준후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혁재는 의국의 기강을 잡는다며 후배들에게 폭언과 구타를 일삼았다.

준후에게도 똑같은 짓을 하려다가 된통 당했지만 말이다.

“예전에 비하면 순한 양이죠. 이러다가 나중에는 음메하고 울 것 같아요.”

“다행이네. 혹시 나 몰래 너나 서진이를 괴롭히고 있나 걱정했거든. 그런 인간들 특징이 갱생이 쉽지 않다는 거야.”

“솔직히 좀 걱정은 돼요.”

대휘가 세면대에 라면 국물을 버리고 준후 맞은편에 앉았다.

대휘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지금이야 괜찮은데…… 선배가 파견 끝나고 돌아가면 그때 또 돌변할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서울 복귀하기 전에 한 번 더 손봐줄 계획이야. 혹시라도 나중에 헛짓거리하면 언제라도 전화해.”

“…….”

“쉬는 날 대전에 내려와서라도 따끔하게 혼내줄 테니까.”

“와. 역시 준후 선배. 에프터 서비스까지 완벽하네요.”

대휘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웹소설.”

준후는 휴대폰 액정 화면을 대휘에게 내밀며 말했다.

준후가 읽고 있는 소설의 제목은 ‘SSS급 대마도사의 귀환 생활’이었다.

서진이 읽는 바로 그 소설이었다.

“선배도 그런 유치한 거 보세요? 완전 의외네요.”

“추리 소설이나 로맨스는 안 유치하고 웹 소설은 유치해?”

“웹 소설이라고 하면 뭔가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하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거 선입견이다. 반지의 제왕도 따지고 보면 판타지 소설이야.”

“에이. 그건 너무 멀리 나가신 거 아니에요? 반지의 제왕을 웹 소설에 비교하시면…….”

대휘의 말에 준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어색했는지.

아니면 본인이 말실수를 했다고 느꼈는지.

대휘가 살살 준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어지는 준후의 말에 대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건 그렇지? 내가 예를 잘못 들었지?”

“네. 빗나가도 완전 빗나갔죠.”

두 사람은 목젖을 드러내며 한바탕 웃었다.

잠시 후 대휘가 떠나면서.

당직실에는 준후 혼자 남았다.

준후는 휴대폰을 책상에 올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대전 의국에 원 탑 빌런이었던 훈식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서진은 복귀했으며.

과장 시덕은 신경외과에 실권을 잡은 채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쌓고 있었다.

준후 역시 원하는 목표를 순조롭게 달성 중이었다.

경추·요추 파트 수술을 집중적으로 수련하며 숙련도를 높이고 있었다.

뇌혈관 파트.

뇌종양 파트.

경추·요추 파트.

서울로 복귀할 때쯤이면.

벌써 이 세 가지 분야에서 교수만큼의 실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제 딱 하나만 해결하면 될 것 같은데…….’

톡. 톡. 톡.

준후는 검지로 의자 팔걸이를 건드렸다.

요즘 들어 부쩍 내공의 고갈을 느끼고 있었다.

신 무공인 내공 심장술.

그러니까 동료나 환자의 심장에 내공을 때려 부어.

그들의 회복력을 단시간에 높여주는 무공을 준후는 자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내공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한의원에서 배송해주는 천산환을 꾸준히 먹고 틈날 때마다 운기조식을 해도 그랬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 근본적인 원인을 꼽자면.

단전에 한계 용량을 들 수 있었다.

그릇이 500ml 밖에 안 된다면.

1리터의 물을 부어도 나머지 500ml물은 흘려버릴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현경에 경지에 오른다면.

온몸을 단전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준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단전의 그릇을 500ml가 아니라 1리터 수준으로 넓힐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준후의 고민이 깊어갔다.

고민이 깊어가는 만큼 이마의 주름도 깊어갔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진동.

아영의 문자인가 하고 봤는데 방금 보고 있던 웹소설에 무료 분량이 생겼다는 알림이었다.

김이 새서 준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발칙한 발상이 준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실마리는 의외로 가까이 있었는데…….

바로 ‘SSS급 대마도사의 귀환 생활’이었다.

소설에서 주인공 크리스는 마나 하트 훈련법을 익혔다.

마나 하트 훈련법.

이것은 심장에 마나의 띠를 둘러 마나를 축적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걸 내가 직접 해보면 어떨까?

준후의 생각이 문득 거기까지 미친 것이다.

만약 성공만 한다면.

준후는 내공 축적하는 공간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일단 시도해 보자.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니까.

준후는 당직실 구석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일단 심법은 청명심법을 그대로 유지했다.

들숨으로 공기 중에 진기를 빨아들였으며.

날숨에 압력으로 내공을 심장 근처로 보냈다. 심장과 가까운 부위에 회오리 모양의 띠를 둘러보았다.

쿵. 쿵. 쿵.

요란하게 뛰는 심장이 준후가 만들어놓은 내공의 띠를 산산이 흩어버렸다.

첫 번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

준후의 미간이 좁아지고 입꼬리는 잔뜩 쳐졌다.

하지만 물러서는 일도, 무릎 꿇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다다익선이라는 사자성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바로 내공이었다.

내공은 많으며 많을수록 좋았다.

그리고 그 풍족한 내공은 준후가 환자와 동료들을 살리는데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다.

준후는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꾸준히 내공의 띠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시도는 번번이 물거품에 그쳤다.

준후가 만든 내공의 띠는 물에 풀어놓은 물감처럼 맥없이 풀어지고 말았다.

문제라면…….

역시 심장 박동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내공의 띠가 거센 심장 박동을 견디지 못했다.

‘역시 소설은 소설인 건가?’

갖은 노력에도 성과가 없자 준후는 마나 하트 훈련법을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마나 하트 수련법이 정말 가능하다면.

무림에서는 왜 마나 하트 수련법을 익힌 사람이 없었을까.

그런 합리적인 의구심이 생긴 것이다.

준후는 가부좌를 풀고 정면에 있는 인체 모형을 응시했다.

마나 하트 수련에 구슬땀을 흘린 탓일까.

모형의 심장 부위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붉고 푸른 혈관이 심장을 중심으로 가지처럼 사방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모형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준후는 그동안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 하트 수련법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심장에만 포커스를 맞췄는데 잘하면 주변 혈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처음부터 내공의 띠를 만들지 않는다.

2) 대신 심장 주변 혈관에 내공의 점을 찍는다. 그 점을 원을 형태로 넓혀준다.

3) 그 점 사이를 내공으로 이어준다.

이것이 준후가 새롭게 떠올린 마나 하트 수련법이었다.

이러면 사전에 확보해둔 내공의 거점이 내공의 띠를 단단하게 고정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아주 황당한 방법이지만…….

당장 해보자.

준후는 의욕에 불타서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