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제63장 방법(3)
다음 날 오전.
숙직실 1층 침대에서 서진은 몸을 일으켰다.
시지프스의 시련과 같은 알람을 끄고 침대 모퉁이에 걸쳐 앉았다.
중력을 거슬러 몸은 일으켰지만 눈꺼풀까지 들어 올리는 건 무리였다.
눈꺼풀이 쇳덩어리였다.
잠이 모자랐는지 머리까지 무거웠다. 여러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꼬였다.
서진은 간신히 눈부터 떴다.
“…….”
당직실은 고요했다.
잠에서 탈출한 사람은 서진뿐이었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커튼 틈으로 한줄기 동녘이 비추어 왔다.
크록스에 발을 구겨 넣고 서진은 세면백을 챙겨 스태프 전용 화장실로 이동했다.
까치집처럼 산만한 머리를 감고.
세수하고 면도를 했다.
거울 속의 서진이 단정하게 변모했다.
사실 외과 레지던트들은 잘 씻지 않았다.
태생이 게으르다거나, 위생 개념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외모와 복장에 신경 쓸 만한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해서였다.
서진은 숙직실로 돌아가 개인 사물함 앞에 섰다.
누렇고 거뭇거뭇한 다른 스태프들의 가운과는 딴판인, 순백으로 하얀 가운을 몸에 걸쳤다.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서진은 병적으로 참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진의 발걸음이 숙직실을 떠나 당직실로 향했다.
병동 복도 바닥에 그어져 있는 실금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는 탓에 걸음걸이가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웠다.
드르르륵.
당직실 안으로 들어가자 업무 책상에 앉아 있는 준후가 보였다.
“좋은 아침.”
준후가 먼저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준후의 옆자리에 앉았다.
곁눈질로 준후를 살폈다.
당직 근무를 섰는데도 준후에게선 손톱만큼의 피로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준후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고 생기가 넘쳤다.
“너 우리 몰래 홍삼이라도 챙겨 먹어? 매일 쌩쌩해 보인다?”
“홍삼은 아니고 매일 챙겨 먹는 게 있긴 하지.”
“뭔데?”
“환자들이 주는 사랑?”
준후의 대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서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환자들이 주는 사랑이 피로 회복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준후가 환자들의 사랑을 먹고 지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레지던트 중에서 준후만큼 환자와 보호자를 잘 챙기고 관리하는 이는 없었다.
준후는 헌신하는 의사 그 자체였다.
서진이 위생에 결벽이 있다면 준후는 환자의 건강과 회복에 결벽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나는 그거 먹어도 별 효과 없던데?”
“사람마다 체질은 다른 법이니까. 그나저나 많이 피곤하겠다?”
“의국에 너 빼고 안 피곤한 사람이 있을까?”
“어제 새벽까지 공부했잖아. 라운딩 돌 때 보니까 컨퍼런스 룸에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더니만.”
“뇌혈관 파트 공부 좀 했지.”
서진의 대답이 무덤덤했다.
“레지던트 끝나면 뇌혈관 파트 펠로우 하게?”
“맞아. 난 뇌에 흥미가 있으니까.”
사람을 살린다, 신경외과 의학계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한다 등등.
서진에게는 그런 거창한 이유가 없었다.
서진은 그저 뇌라는 기관의 신비에 매혹당해서 신경외과를 선택했을 따름이었다.
“뒤나 돌아봐. 등 마사지해 줄 테니까.”
서진은 준후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랐다.
등받이 없는 의자를 90도로 돌려 준후에게 등을 내밀었다.
척!
준후의 손바닥이 서진의 왼쪽 견갑골 아래 부위에 얹어졌다.
손난로라도 되는 것처럼.
준후의 손바닥에서 뜨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열기는 순식간에 심장에 닿았다. 이윽고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조영제가 혈관에 투여되는 것처럼 그 속도가 번개였다.
퍽! 퍽! 퍽!
준후가 손바닥으로 서진의 등허리를 몇 번 두들기더니 ‘끝’이라고 외쳤다.
“어우. 개운해.”
서진은 목과 어깨, 팔을 가볍게 움직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신비한 일이었다.
준후가 등허리에 손을 얹으면 나른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머리가 맑아지고 온몸에 에너지가 샘솟는 것도.
“너는 의사 말고 마사지 샵을 차렸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안 그래도 그 문제로 가끔 진지하게 고민한다.”
준후가 서진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고맙다. 서진아.”
“뭐가?”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사를 해야 하는 쪽이라면 방금 마사지를 받은 자신 쪽이 아닐까.
“그냥 고맙다고.”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봐. 뭐가 감사한지 알아야 또 감사받을 일을 하고 덤으로 마사지도 받지.”
“꼭 이유를 알아야겠어?”
“어.”
“판타지 소설 소개해 줘서 고맙다고.”
“혹시 SSS급 대마도사의 귀환 생활?”
“빙고. 바로 맞췄어.”
“너도 성격 참 특이하다. 판타지 소설 하나 추천해 준 걸로 감사 인사씩이나 하고.”
서진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준후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넌 몰라. 그 책이 나를 어떻게 바꿔놨는지.”
* * *
그 날 오전.
준후는 모처럼 평상복을 입고 병원 본관을 나오는 중이었다.
봄 날씨가 무르익고 있었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포근했다.
병원 곳곳에 위치한 화단에서 노란 유채꽃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병원을 오가는 사람의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지긋지긋한 롱패딩은 어느새 자취를 감춰 버렸다.
병원 입구를 다 빠져나왔을 때.
준후가 뒤를 돌아 병원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파견 나왔을 때만 해도 남의 집처럼 어색했던 건물이 지금은 우리 집처럼 친숙해졌다.
친해진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자주 보면 되는 일이었다.
자주 보는데도 어색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준후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살짝 얹었다.
심장 주변을 띠처럼 감싸고 있는 내공이 느껴졌다.
어제 새벽.
피, 땀, 눈물을 흘린 끝에 준후는 결국 마나하트 1서클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심장 주변 혈관에 내공의 점을 찍고 그 점을 내공으로 연결한다는 발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그와 중에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전에 내공.
마나하트에 내공.
각기 다른 부위에 위치한 내공을 연결하는 도중 하마터면 주화입마에 들 뻔했다.
삼투압 같은 느낌이랄까.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은 단전의 내공이 마나하트 쪽으로 역류하면서 마나하트가 박살 날 뻔했다.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목덜미가 차가워지고 등허리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대만족이지.
현경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겠어.
준후의 양쪽 입꼬리가 귀에 닿을 듯 찢어졌다.
마나 하트에 쌓을 수 있는 내공의 양은 단전에 버금갔다.
수련만 꾸준히 하면 준후는 2개의 단전을 보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전처럼 내공 부족에 시달리는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처럼 쉬는 날인 준후가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대전 용문역이었다.
그중에서도 역사와 한참 떨어진 허름한 주택가였다.
주택가 골목은 한산했다.
사람 구경을 하기도 힘들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노상에 주차된 자동차 아래서 준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고양이의 나른한 눈빛이 ‘넌 뭔데?’라고 준후에게 묻는 듯했다.
덜컹!
녹슬고 칠이 벗겨진 파란 철문을 열고 준후는 다세대 주택 1층으로 들어갔다.
똑. 똑. 똑.
불투명한 유리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이정혜 씨 맞으시죠? 신경외과 의사 서준후라고 하는데요. 저한테 메일 보내셨죠?”
“아,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문이 활짝 열렸다.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준후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늘 오신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아침 일찍 오실 줄은 몰랐어요.”
“혹시 실례가 됐을까요?”
“그럴 리가요. 어서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정혜를 따라 준후는 거실로 들어섰다.
말이 거실이지 거실이라고 부르기에는 퍽 애매한 공간이었다.
창가 쪽에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장이 있었고 그 뒤에 3인용 식탁이 놓여 있었다.
거실은 부엌과 거실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는데 공간이 비좁았다.
1인용 소파 하나 놓을 빈 공간조차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오줌 지린내, 짓무른 살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자극했다.
준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냄새의 근원지인 큰 방을 향했다.
방문이 희미하게 열려 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집이 많이 누추하죠?”
식탁 의자를 권하는 정혜의 얼굴에 민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뇨. 집안 형편이야 좋다가도 나빠질 수 있고 나빠지다가도 좋아질 수도 있죠.”
“커피라도 한 잔 타드릴까요?”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정혜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는 동안 준후는 꼼꼼하게 거실을 살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실 귀퉁이에 놓인 3단 수납장이었다. 기저귀, 소독약, 약국 약, 붕대 등등.
수납장에는 각종 의료용품이 전시된 것처럼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물품들이 다 새 거네요?”
“네?”
“수납장에 있는 물품이 다 새 거라고요.”
“아…… 그게…… 얼마 전에 안 쓰던 물품을 싹 정리하고 필요한 걸 새로 샀거든요.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서요.”
정혜가 커피 믹스가 담긴 잔을 식탁에 올려놓고 준후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준후는 정혜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지 정혜의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메말라 보였다.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으며 긴 머리는 고무줄로 대충 묶어 뒤로 넘겨 있었다.
“네일, 좋아하시나 봐요?”
“아, 보셨구나.”
정혜가 수줍게 웃으며 본인의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정혜의 손톱은 에메랄드빛이었으며 반짝거리는 큐빅이 박혀 있었다.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 많이 쓰잖아요. 그래서 저도 해봤어요. 힘들 때 손톱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요.”
“잘하셨습니다. 뭐라도 기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준후가 씽긋 웃었다.
정혜와의 인연은 열흘 전에 받은 한 통의 메일에서 시작되었다.
정혜는 준후의 뉴튜브 구독자인데 준후의 뉴튜브를 보는 낙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사실 저희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랍니다. 아내로서 남편을 돌보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지만 때로는 너무 버겁네요…….]
정혜는 메일에 본인의 고민과 사연을 정성껏 적어서 보냈다.
그리고 그 정성에 감명을 받은 준후는 오늘 쉬는 날을 맞아 사전에 연락하고 정혜의 집을 방문했다.
정혜를 위로하며 물질적으로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뇌사 또는 식물인간.
이 두 가지 키워드는 준후를 ‘급발진’하게 만드는 카테고리에 속해 있었다.
준후가 정복하고 싶은 질환이자 환자를 간병하는 보호자의 고통 또한 극심한 질환이기도 했으니까.
“환자분이 사고를 당하신 건 언젠가요?”
준후가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1년 정도 됐어요.”
“1년이면…… 고생 많으셨겠네요. 자제분은 없으신 것 같은데, 혼자 간병하시나요?”
“요양 보호사분이 매일 오시기는 해요. 제가 일을 해야 남편도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요.”
대답하는 정혜의 목소리에 기력이 없었다.
“의료 지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살림살이하고 남편 치료비 대는 게 만만치 않네요.”
정혜의 우울한 표정과 화려한 네일은 준후에게 기묘한 위화감을 자아냈다.
네일은 어쩌면 밝은 내일을 꿈꾸는 정혜의 발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 참, 선생님. 이거 한번 봐주시겠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정혜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정혜가 그 무언가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