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31화 (330/424)

331화

제64장 압축(1)

정혜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자신으로 입으로 가져갔다.

앞니로 네일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염료가 벗겨지면서 혀끝에서 화학적이고 인공적인 맛이 느껴졌다.

남편이 가짜 식물인간이라는 사실을 준후가 눈치채 버렸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예상이라도 했으면 다음 단계로 착 넘어갔을 텐데 그럴 수조차 없었다.

사방이 다 낭떠러지였다.

그렇다고 사태를 관망한다고 한들 좋아질 것도 없었다.

디디고 있는 땅도 당장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그 정도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었으면 근육이 거의 다 죽어 있어야 하거든.”

준후의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남편은 뭐라고 반격도 못 하고 준후의 눈길을 피했다.

남편의 몸은 정상이었지만.

남편의 정신은 이미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

정혜는 준후가 들고 있는 휴대폰의 채팅창을 슬쩍 훔쳐보았다.

[부부가 쌍으로 보험 사기꾼이네요. 이런 괘씸한 사람들은 바로 신고해야죠. 요즘 ‘보험 사기’ 관련 집중 신고 기간이래요.]

자신과 남편을 욕하는 수많은 채팅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보험 사기’라는 단어가 들어간 채팅이 유난히 더 눈에 잘 들어왔다.

악화된 상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준후를 등쳐먹은 돈으로 명품 코트를 걸치려고 했건만 이러다가는 죄수복을 걸칠 판국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따지고 보니 정혜는 퍽 억울하기도 했다.

집안을 식물인간 환자가 사는 집처럼 잘 위장해 놓았고.

자신은 식물인간 남편에게 헌신하는 부인의 역할을.

남편은 식물인간 환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빈틈이 있었는가?

아니, 전혀 없었다.

남편이 누워 있다가 뜬금없이 재채기를 한 것도 아니었고.

어디가 가렵다며 긁은 것도 아니고.

그냥 눈 감고 숨만 쉬었다.

그런데 준후는 어떻게 남편이 가짜 식물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그 까다로운 보험 조사원도 남편을 보고 별 말없이 돌아갔는데.

해결하지 못한 질문을 밀어두고 정혜는 오랜만에 말라붙은 입술을 뗐다.

“여보. 잠깐 이리 와 봐요.”

* * *

큰 방의 자리 배치가 바뀌었다.

방바닥에 깔린 이불을 중심으로 준후가 남쪽 창가에 앉았고 부부가 북쪽 문 앞에 앉아 있었다.

부부를 응시하는 준후의 눈빛이 싸늘했다.

이전과 같은 따뜻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눈빛은 준후가 무림에서 극악무도한 사파인들을 상대할 때만 꺼내놓는 눈빛이었다.

“감히 더 변명할 거리가 있나 보지?”

준후가 자연스레 반말을 했다.

상대를 높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할 말도 없는데 사람을 붙잡아두고 있는 건가? 나 꽤 바쁜 사람인데.”

준후가 일어나려고 하자 정혜가 하소연하며 막았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무릎을 꿇고 있던 정혜가 준후에게 먼저 넙죽 절을 했다.

영식이 멀뚱하게 지켜보고 있자 정혜가 한 손으로 영식의 무릎을 때렸다.

영식도 그제야 준후에게 큰절을 올렸다.

하는 짓이 기가 막혀서 준후는 코웃음을 쳤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아니, 편하게 먹고 살고 싶어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

“저희는 많은 사람을 속이고 기만했어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착하게 살게요.”

정혜가 두 손을 싹싹 빌며 말했다.

정혜는 정말 죄를 뉘우쳤을까.

그래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걸까.

아닐 거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정혜가 필사적인 건 필사적으로 처벌을 피하기 위함일 확률이 컸다.

사람은 변할 수도 있지만…….

그 변화는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아주 천천히 변하는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잘못을 뉘우치는 죄인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지금 그 마음, 진심이라고 믿어도 되겠어?”

“무…… 물론이죠. 당신도 뭐라고 이야기 좀 해봐.”

“죄송합니다. 선생님.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고…….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일이 커지는 바람에…….”

부부가 비장한 목소리로 사죄했고 준후는 한동안 말없이 부부를 쳐다보았다.

“그나마 당신들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어 보이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을 텐데.”

“그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부부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래. 용서하지.”

준후가 부부를 눈감아 주겠다고 하자 채팅창에 거대한 쓰나미가 불어 닥쳤다.

[선생님. 저 사람들 뉘우칠 위인이 아니에요. 이 기회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요!!!!]

[돌겠네, 진짜;;;;; 착한 것도 정도가 있지.]

[범죄를 눈감아 주는 것도 범죄입니다. 선생님, 지금 실수하시는 거예요ㅠㅠㅠㅠㅠ]

시청자들이 답답해 죽겠다는 채팅을 쳤지만 불만들은 금방 쏙 사라지고 말았다.

“근데 경찰은 너희 둘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준후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쪽 부부 사기단 사과는 잘 받았어. 근데 내가 사과를 받는 거랑 법적인 영역은 엄연히 다른 거 아니겠어?”

준후의 말뜻을 이해한 정혜가 방바닥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영식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 씨X 새끼. 지금 우리 가지고 논 거 맞지?”

영식이 대답을 구하듯 정혜를 쳐다보았다.

정혜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웃어른을 놀려 먹네. X만 한 새끼가 살살 빌어주니까 지가 뭐 대단한 인간이라도 된 것 같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데 지금이 딱 그 꼴이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이 뭘 잘못 했는지 모르지?”

“그래. 모르겠다. 새꺄. 보험금 좀 타 먹은 게 그렇게 죽을 죄냐?”

영식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영식의 목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정치인들은 몇 십억씩 받아 처먹는데. 씨X 나 정도면 천사지.”

“다른 사람 들먹이지 마. 그런다고 네 죄가 가려지는 건 아니니까.”

“하…… 어린놈이 꼬박꼬박 말대꾸에 반말이네. 넌 오늘 뒈졌어.”

영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큰 방을 나왔다가 돌아온 그의 손에는 번쩍이는 식칼이 들려 있었다.

준후는 별다른 동요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바보 같은 인간은 모르고 있었다. 준후가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게 몸의 대화라는 것을.

“그 X같은 입부터 찢어줄게.”

성큼성큼 다가온 영식이 준후의 얼굴을 향해 가로로 식칼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식칼이 허공을 갈랐다.

준후는 가볍게 고개를 뒤로 빼는 것만으로 공격을 피해냈다.

“어쭈? 피해?”

영식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영식은 준후의 얼굴만을 노리고 무자비하게 식칼을 휘둘렀다. 식칼이 허공에 그리는 궤적이 매서웠다.

지금의 영식은 한 마리의 난폭한 맹수였다.

하지만…….

영식이 맹수라면 준후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준후는 제 자리에서 상체만 움직이며 영식의 식칼을 모조리 흘려냈다.

움직임이 경이롭고 압도적이었다.

두 사람의 체급 차이는 명백했다.

영식이 유치원급이라면 준후는 무제한급이었다. 같은 링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영식과 적당히 놀아주던 중.

준후의 눈빛이 한순간 번뜩였다.

퍽!

준후의 손날이 식칼을 쥔 영식의 손목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아아악!”

영식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가격당한 손목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었다.

식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식칼을 다시 쥐려고 허리를 굽히는 영식의 등허리를 준후는 뻥 걷어찼다.

영식이 뒤구르기를 하는 것처럼 뒤로 데구르르 굴러가서 식탁 다리에 처박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준후는 모처럼 슬쩍 웃었다.

‘이만하면 뉴튜브 각은 충분하네.’

준후는 어느 순간부터 뉴튜버 모드로 각성해 있었다.

* * *

“와…… 세상에 이런 일도 있네요.”

이승호 순경은 준후가 내민 휴대폰 속 영상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지금으로부터 20분 전.

승호는 부부 보험사기단을 현장에서 붙잡았다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보험 사기 신고는 좀처럼 없었기에 별다른 기대 없이 출동했다.

보험 사기는 미끼고 아마 다른 민원이 있는데 보험 사기 핑계를 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현장에 도착하고 신고인인 준후를 통해 믿기 힘든 소식을 들었다.

부부가 식물인간 행세로 보험금을 타 먹었으며 특히 남편 쪽은 폭로를 한 준후에게 앙심을 품고 칼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무슨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준후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뉴튜브 실시간 방송 기록이 확고한 증거물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근데 남편 쪽이 식물인간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말씀드리자면 너무 기네요. 감이었다고 알아두시는 편이 더 낫겠어요.”

“뭐, 갑자기 일어나서 선생님께 칼을 휘두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승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위험하셨던 건 알죠? 가해자가 휘두른 흉기에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요?”

“…….”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신고부터 해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고생 많으셨고요. 나중에 서에서 연락 가면 계좌 번호만 불러주세요. 포상금 지급 있을 테니까.”

승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준후 덕분에 공짜로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셈이었다.

부우우웅!

사기꾼 부부와 경찰을 실은 경찰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준후는 경찰차가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근데 남편 쪽이 식물인간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문득 경찰의 질문이 준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영식의 정체를 의심한 결정적인 순간.

그것은 준후가 두 번째 전음을 날린 후 영식이 보여주었던 이상행동 때문이었다.

딱. 딱. 딱.

영식은 희미하게 윗니와 아랫니를 부딪쳤다.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없는 식물인간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영식은 아마 준후의 전음을 듣고 그 능력이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인 줄 알고 불안함을 느꼈던 게 분명했다.

의심의 쳇바퀴가 한 번 돌자.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1) 너무 새 것처럼 꾸며놓은 의료물품 서랍장.

2) 우리 남편은 식물인간 환자가 맞아요. 그러니까 절대 의심하지 말아요, 라는 의도로 대화 시작부터 내민 진단서.

3) 환자의 몸은 깔끔했는데 환자가 덮고 있는 담요와 이불에서만 났던 노린내와 살 짓무른 냄새(아마 병치레를 하는 노인의 이불을 빨아준다며 이불만 가져왔을 것이다.)

부부의 사기극은 치밀하고 정교했다.

준후가 전음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무림에서 다진 관찰력으로 영식의 이상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부부는 아마 평생 보험금을 타 먹었을지도 몰랐다.

멍하니 서 있던 준후는 지하철역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 부부에게 진단서를 끊어준 문제의 병원도 지나갔다.

경찰이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면 병원도 처벌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단순히 병마뿐만이 아니라 의료 악당과도 한판 승부를 벌일지 모르겠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준후의 다음 목적지는 집 근처 야산이었다.

그곳에서 맑은 정기를 받으며 마나 하트를 축적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더 성장하며.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