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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32화 (331/424)

332화

제64장 압축(2)

준후는 당직실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과 그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하얀 함박눈이 대조를 이루었다.

거기서 자신의 처지를 읽어냈다면 과장일까.

까만 죽음.

그리고 그 죽음에 맞서는 하얀 의사 가운.

준후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곱씹었다.

“너답지 않게 청승 떨고 있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당직실 문이 열렸다.

준후 곁에 선 사람은 4년 차 동기 경수였다.

상처 입은 늑대처럼.

쓸쓸하고 다른 사람을 멀리하던 서진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1년 전부터 경수는 꽤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준후가 서울 의국에 불러일으킨 작은 바람 중 하나였다.

“멍 때리고 있는 거 보니까 오랜만에 너한테서 인간미가 느껴진다. 아주 좋아.”

“누가 들으면 내가 평소에는 로봇인 줄 알겠네.”

“로봇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업무 로봇에 공부 로봇이잖아.”

경수가 기지개를 켜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세월 한 번 빠르다. 이번 달이면 레지던트도 끝나고.”

“그러게. 아직도 인턴 시절이 생생한데 벌써 수련이 끝났다니.”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대전 파견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지도 벌써 2년 가까이 지났다.

세월에 더하기 기호가 붙었던 걸까.

2년 차였던 준후는 눈 깜짝할 사이에 4년 차가 되었다.

전문의 시험도 벌써 치렀다.

1차 시험에 합격했고 이틀 뒤에 2차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2차 시험까지 합격하면.

그때 진짜 신경외과의가 될 수 있었다.

“펠로우 할 거지? 세부 전공은 정했냐?”

경수가 넌지시 물었다.

펠로우는 전문의 자격증 취득 후 1-2년 동안 병원에서 더 수련을 했다.

특정 교수를 한 명 정한 뒤 그 교수 밑에서 한 가지 전공 분야를 집중적으로 배우게 된다.

선택할 수 있는 전공 분야는 총 7개가 있었다.

뇌혈관 파트.

뇌종양 파트.

경추·요추 파트.

정위 신경 파트.

소아 신경외과 파트.

수부외과 파트.

외상외과 파트.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뭔가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야.”

준후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숨은 하얀 입김으로 변해서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구름이 되려는 입김을 바라보는 준후의 눈빛이 아련했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길을 잃긴 뭘 잃어. 천하의 서준후가 가면 그게 길이지.”

“말이라도 고맙네. 넌 전공 정했고?”

“나? 나는…… 뇌혈관 파트 전공할 생각이다.”

“경추·요추 파트 전공한다고 그러지 않았나? 나중에 나가서 의원 차린다고. 의원 차려서 돈 긁어모을 거라고.”

준후가 놀리듯 말했지만, 경수가 경추·요추 파트를 전공한다고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신경외과 세부 전공 중에는 경추·요추 파트만 유일하게 돈벌이가 됐다.

환자들에게 인기 만점인 정형외과와 진료 영역이 다소 겹쳤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의원을 차리고 입소문만 타도 물리치료, 도수치료 같은 것으로 돈을 제법 짭짤하게 만질 수 있었다.

“그새 생각이 바뀌었냐? 이유가 뭔데?”

준후의 시선이 경수에게 머물렀다. 경수가 대답을 못 하고 한참 머뭇거렸다.

“글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뇌혈관 파트가 끌리더라고.”

“세상에는 공짜도 없고 그냥도 없다던데.”

“그러니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니까? 너라도 알면 좀 말해줘라.”

경수가 피식 웃었다.

준후도 경수를 따라 웃었다.

“넌 아직도 욕심 못 버렸어?”

“무슨 욕심?”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내가 네 시꺼먼 속을 모르겠니?”

경수의 말이 잔잔한 호수에 일어난 파문처럼 준후의 가슴에 번져 나갔다.

자신이 세부 전공을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

그 이유를 경수도 알고 있는 듯했다.

이래서 가까운 사람이 무서운 것 아닐까.

티를 내지 않은 것도, 티를 내고 싶지 않은 것도 다 들키고 마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천천히 고민해 봐. 답은 의외로 가까이 있을 수도 있어.”

경수가 준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당직실을 떠났다.

그 후로도 준후는 하염없이 창밖의 풍경만 응시했다.

저 풍경 너머에…….

자신이 찾고 있는 해답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듯.

* * *

다음 날 오전, 수술실에 위치한 3번 로젯.

준후는 집도의 자리에 서서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지의 이름은 주홍민.

나이는 27세.

수술대에 누운 환자는 키가 무려 190센티미터에 달했다.

손바닥은 솥뚜껑처럼 묵직하고 우람했으며 거대한 발바닥에 신발 사이즈는 족히 300mm는 되어 보였다.

전신마취가 끝난 환자는 미동이 없었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무영등 불빛 아래 환자의 얼굴은 밀랍처럼 새하얗게 보였다.

“확실히 농구 선수 피지컬은 남다르네요. 싸우면 그냥 발릴 자신 있습니다.”

맞은편에 있던 스태프가 익살을 떨며 말했다.

박인철.

3년 차로 준후의 직속 후배였다.

별명은 BYC인데 인철의 성과 이름의 영문자에서 앞글자만 딴 것이었다.

어버버했던 1년 차가 벌써 3년 차가 되어 제1어시스트를 맡게 되다니.

준후는 다시 한번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근데 선배.”

“왜?”

“당장 내일 전문의 시험 아니세요? 굳이 이런 어려운 수술을 집도할 필요가 있어요?”

인철이 준후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시험하고 집도가 무슨 상관인데?”

“뭐랄까…… 수술이 잘 안 풀리면 시험에 영향이 갈 것 같아서요. 경수 선배도 일부러 수술 스케줄 다 빼놓으셨던데.”

“인철아. 실패할 생각 말고 성공할 생각을 해야지.”

“그건 저도 아는데요…….”

인철이 준후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수술이요…… 아직, 선배가 집도할 수술은 아닌 것 같아서요.”

인철의 지적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오늘 준후가 집도할 수술은 뇌하수체 선종이었다.

뇌하수체는 나비뼈 안쪽에 위치한 기관인데 다양한 호르몬 분비를 조절했다.

환자의 키와 손발이 유독 긴 이유.

그것은 뇌하수체에 생긴 양성 종양이 호르몬 분비를 항진시켰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뇌하수체 선종은 보통 교수가 집도했다.

아니. 원래 교수가 집도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준후가 예외인 까닭은.

준후의 수술 솜씨가 상식을 초월할 만큼 뛰어났고, 오늘 수술을 지도할 교수인 뇌종양 파트 동훈이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던 탓이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수술방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중년 서전이 수술대로 다가왔다.

한 명은 지도 교수 동훈이었고 다른 이는 준후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쪽은 이비인후과 조 교수 전수환이라고 한다. 인사해.”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안녕하세요.”

동훈의 소개에 준후와 인철이 수환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환은 대답이 없었다.

준후 곁에 서서 준후를 빤히 쳐다볼 따름이었다.

“네가 오늘 집도의니?”

“네. 교수님.”

“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어? 왜 나보고 레지던트 들러리나 서라는 건데.”

수환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동훈을 흘겨보았다.

“준후, 얘가 우리 신경외과 에이스야. 어시스트하다 보면 너도 생각이 바뀔걸?”

“내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 너랑 레지던트의 위치를 바꾸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후학 좀 키우겠다는데 네가 인심 좀 써라.”

동훈이 쩔쩔매며 수환을 타일렀다.

하지만 수환의 눈에는 여전히 심통이 가득했다.

레지던트의 어시스트를 선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한다는 태도였다.

뇌하수체 선종은 그 해부학적 특성상 머리를 절개하지 않고 코를 통해 수술 부위로 접근했다.

그래서 이비인후과 교수가 수술에 동참하는 경우가 잦았다.

“네가 치사하게 나오니까 더 열 받는다고. 레지던트가 집도한다는 걸 수술방에 도착해서 말하면 어떻게 하냐?”

“미리 말하면 네가 어시스트를 섰겠니?”

“이거 순전히 사기꾼이구먼.”

수환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다시 준후를 응시했다.

“동훈이 부탁이니까 어시스트를 서긴 서는데. 너 수술 똑바로 해. 난 타과 레지던트라고 해서 안 봐준다.”

“네. 교수님.”

“대답은 잘해요.”

수환이 준후 곁에 자리를 잡았다.

수환이 삐딱한 자세로 나오면서 수술방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맞은편에 선 인철은 불안한지 자꾸 눈동자를 굴렸다.

인철 옆에 있는 소독 간호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희미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타과 교수와 수술을 함께한다는 것은 실로 어색하고 불편한 동행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준후는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건 실력이었고.

실력이라면 준후는 웬만한 교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난 2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던 게 아니니까.

“수술은 어떻게 할 건데?”

수환이 가시 돋친 말투로 물었다.

준후는 기다렸다는 듯 수술과정을 읊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수환의 미간이 좁아졌다.

“선종을 완전 적출하겠다고?”

“네. 선종은 재발이 잦습니다. 수술할 때 완벽하게 제거해 주는 게 좋습니다.”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르겠니? 문제는 너한테 그럴 능력이 있냐는 거지.”

“…….”

“선종 크기가 3X3cm으로 꽤 큰 편이야. 뇌하수체 주변에 시신경 분포하는 것도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실수하면 환자 시력에 문제가 생길 것도 알고 있겠네?”

준후를 향한 수환의 눈빛이 매서웠다.

수환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수술을 포기하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하지만 수환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밟으면 밟을수록 더 거칠게 성장하는 사람이 준후라는 것을.

무림에서도 그랬다.

준후가 아버지의 원수 적일도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다들 기를 쓰고 말렸다.

극마의 경지에 접어든 패악무도한 살인귀를 네가 무슨 수로 처단하냐고.

그러나 주변의 멸시와 냉대에도 불구하고 준후는 결국 적일도를 저 세상으로 보내 버렸다.

비록 그 과정에서 준후도 목숨을 잃었지만.

어쨌거나 주변의 부정적인 반응과 무시 같은 것은 준후의 열정을 태우는 한낱 연료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연료를 통해 준후는 더 뜨거워졌다.

“야, 넌 왜 수술 전부터 얘 기를 죽이고 난리야. 어시스트하러 온 건지 겁주러 온 건지 모르겠다.”

잠자코 있던 동훈이 대화에 껴들었다.

이젠 동훈의 목소리도 곱지 않았다.

“단순히 겁주는 게 아니잖아. 자기가 뭘 하고 있지는 똑바로 알고 있어야지. 안 그래?”

수환의 공세에 준후는 눈으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가 집도하는 걸 보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실 겁니다.”

“얼씨구. 동훈이보다 한술 더 뜨네. 뭐, 좋아. 네가 한 말에 책임만 질 수 있으면.”

치열했던 입씨름이 끝나고 본격적인 뇌하수체 선종 절제술의 막이 올랐다.

수술 직전에 준후는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고 손목을 풀었다.

그동안 실력을 50퍼센트 정도 숨기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 나머지까지 유감없이 발휘해 볼까 싶었다.

수환의 무시 따위는…….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었다.

“지금부터 뇌하수체 선종 절제술을 시작하겠습니다.”

준후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수술방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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