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제64장 압축(4)
다음 날 새벽.
어두운 하늘에서 굵직한 눈송이가 한 됫박씩 떨어져 내렸다.
유리그릇을 들고 바깥에 나가면 빙수 한 그릇이 뚝뚝 만들어질 것 같은 폭설이었다.
외풍마저 강력했다.
창틀이 덜컹덜컹 움직이며 어설픈 춤을 추어댔다.
하지만 전부 외부 세상의 일일 뿐이었다.
창가 아래서 가부좌를 튼 준후는 새벽보다 깊고 어두운 무의식에 머물러 있었다.
마나 하트를 수련 중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자연 진기가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자연 진기는 십이경맥과 세맥, 마나하트, 단전을 순서대로 이동했다.
그 흐름이 순하고 자연스러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몸속에 쌓여 있던 탁한 기운들이 역순으로 빠져나갔다.
과정을 반복하는 가운데 준후의 마나하트는 더욱 견고해지고 더욱 넓어졌다.
이윽고 무아지경에 빠졌던 준후가 두 눈을 떴다.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었다.
준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나하트를 수련한지도 어언 2년째.
성취는 탁월했다.
심장에 무려 4개의 마나 띠를 두를 수 있게 되었다. 판타지 소설로 치면 4클래스 수준의 마나를 저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단전에 축적한 내공의 무려 절반 가까운 양이었다.
4클래스 마나 하트 덕분일까.
준후는 작년 말부터 내공이 부족해서 곤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는 다소 멍청이 같은 발상이라 주저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결정은 준후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데리고 갔다.
새로워지고 싶다면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새로운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준후는 과거 무림 맹주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가 당연한 소리를 왜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말의 깊이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과 밖의 온도 차로 창가에 뿌연 김이 서려 있었다. 창문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꼭 준후의 앞날 같았다.
-준후야. 그러지 말고 세부 전공은 뇌종양 쪽으로 선택하는 건 어떻겠니?
넋을 잃은 채 서 있는데 귓가에서 동훈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그의 목소리가 달콤했다.
동훈은 오래전부터 준후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어제 집도도 사실 동훈의 작품이었다.
준후가 뇌종양 수술에 좀 더 매력을 느끼게끔, 일부러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눈치 100단인 준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확실히 동훈 밑에서 수련한다면 여러모로 배울 것도 많고 펠로우 생활도 편할 것이다.
의국 교수 중에서 준후가 가장 신뢰하며 능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동훈이었으니까.
하지만 왜일까.
최선의 길이 눈앞에 있음에도 선뜻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교수님.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준후는 즉답을 피했다.
시간을 끈다고 나아질 것이 없는데도 그랬다.
요즘의 준후는 어쩐지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어쩐지 주저하게 되고 어쩐지 답답함을 자주 느꼈다.
신경외과에서 파생되는 8가지 세부 전공을 다 마스터하고 싶은데 그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감도 느꼈다.
정녕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
모든 세부 전공을 단번에 마스터할 기막힌 방법이.
준후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질문들이 메아리가 되어 온몸으로 퍼졌다.
메아리는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앵무새와 비슷해서 답을 줄 수는 없었다.
* * *
그 날 오전 7시.
준후는 동기 경수와 함께 신경외과 병동 복도에 서 있었다.
준후를 훑는 경수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야, 너 뭐 하냐?”
“내가 뭘?”
“뭐가 잘못됐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너와 나의 차이가 안 느껴지냐고.”
어이없다는 듯 경수가 피식 웃었다.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제대로 말을 해.”
“옷은 갈아입어야 할 거 아니야. 그 꼴로 시험 치러 가게?”
경수의 지적에 준후가 헛웃음을 지었다.
경수와 전문의 시험을 치러 가기 직전이거늘…….
준후의 복장이 여전히 수술복에 가운 차림이었던 것이다.
“평소답지 않게 왜 그렇게 얼 타고 그러냐? 너 오늘 조금 불안하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준후는 대충 대답하고 숙직실로 돌아갔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경수와 함께 병동을 벗어나고 병원까지 빠져나왔다.
새벽 내내 내리던 눈이 그쳤지만 세상은 여전히 흰 눈 천지였다.
누군가가 길바닥이며, 나무며, 건물에 새하얀 슈가 파우더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일찍 출근한 직원들의 발자국이 병원을 향해 찍혀 있었다.
쓱싹쓱싹.
경비 직원들은 빗자루로 눈을 쓸어내고 바닥에 소금을 뿌리느라 분주했다.
“오늘은 T.A(교통사고) 환자가 좀 있겠는데?”
“의국 걱정하지 말고 우리 걱정이나 해. 4년간 수련 잘해놓고 정작 전문의 시험에 떨어지면 개망신이니까.”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어?”
“혹시나의 저주 모르니?”
경수가 먼저 눈밭을 걸으며 물었다.
“혹시나의 저주? 그건 또 뭔데?”
“혹시나가 말이다. 혹시…… 나일 수도 있다는 저주지. 사람 일은 하치 앞도 모르는 거야.”
경수의 걱정을 준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준후가 전문의 시험에 떨어질 확률은 순수하게 제로였다.
최근 준후의 의술은 물이 오를 대로 올라와 있었다.
피지컬적인 측면에서도 의학 지식 측면에서도 말이다.
이번 전문의 시험을 굳이 비유하자면 수학 전공을 하는 대학 교수가 초등학교 산수 문제를 풀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까.
“사람이 말하면 귓등으로라도 듣지?”
준후가 집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경수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듣고 있거든?”
“어련히 그러시겠죠. 참고로 불안 요소는 하나 더 있어.”
“그만 불안해하고 이제 편안해지면 안 될까?”
“제일 큰 불안 요소는 바로 너야.”
경수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 할 말만 했다.
“또 왜 나한테 시비냐?”
“너, 둘째가라면 서러운 환타잖아. 시험장 가는 길에 뜬금없이 응급 환자를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그럼 환자를 택할 거야? 아니면 전문의 시험을 택할 거야?”
경수의 질문에 준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확률은 극히 드물지만…….
그렇다고 아예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환자도 살리고 전문의 시험도 봐야지.”
“최악의 상황이라서 환자와 전문의 시험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경수의 질문이 오늘따라 짓궂었다.
준후를 일부러 궁지에 몰아넣는 느낌이랄까.
“자, 너라면 어떻게 할래?”
경수가 다시 한번 준후를 추궁했다.
갑작스레 진지해진 분위기.
준후는 정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그 전에 나도 좀 물어보자. 너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 건데?”
“나라면…… 당연히…… 전문의 시험을 쳐야지. 간단한 응급처치만 하고 119에 신고한 뒤 시험장으로 갈 거다.”
“목숨보다 시험이 우선이라고?”
“야외에서 할 수 있는 처치가 뭐 그리 대단한 게 있겠어? 할 만큼만 하고 빠지면 되지.”
경수의 해답은 현실적이고 계산적이었다.
평소의 경수다웠다.
“그래서 네 대답은?”
“너도 예상은 했겠지만…… 당연히 환자다. 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됐어. 전문의가 되기 위해 의사가 된 게 아니야.”
“환자 때문에 1년을 날려도 상관없다는 뜻이지?”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 1년으로 환자의 평생과 보호자의 평생을 구할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본다.”
“계속 그런 방식을 고집하면 정작 네 인생에는 아예 남는 게 없을 수도 있어.”
경수가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진지한 이야기를 더해보자면. 내가 봤을 때 너는…….”
“나는?”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그것도 말기로.”
메시아 콤플렉스.
이것은 심리학 용어 중 하나로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하면 죄책감이나 무기력을 느껴 강박적으로 타인을 돕는 콤플렉스를 뜻했다.
“…….”
경수의 지적에 준후는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타인을 돕는 일은 무조건 선하고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건만…….
그것이 오히려 콤플렉스의 소산일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 말이 맞다는 건 아니고 그런 식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야. 천천히 고민해 봐.”
* * *
신경외과 전문의 시험은 노원구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에서 진행되었다.
준후와 경수는 시험 시작 전에 간신히 시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길에 도로가 꽉 막혔던 데다가 교통사고로 정체가 더 심해졌던 탓이었다.
타고 있던 버스가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칠 때.
준후는 긴장해서 심장을 졸였다.
하지만 교통사고는 가벼운 접촉 사고에 불과했다.
앞서 경수와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기실에는 대략 30여 명의 응시자가 있었다.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나날이 줄어드는 탓에 신경외과 전문의 시험 응시자는 그 수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바로 옆 공간을 쓰는 정형외과 전문의 응시자는 무려 100여 명이 넘어갔는데 말이다.
다른 응시자들이 예상 문제집을 보는 동안.
준후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경수가 말한 메시아 콤플렉스를 곱씹고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를 향한 준후의 관심과 애정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만약 준후가 환자나 보호자의 입장이었다면.
자신도 자신과 같은 의사를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있지 않은가.
준후는 그저 ‘황금률’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경수가 황금률을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부르겠다면 준후는 기꺼이 메시아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으로 남을 용기가 있었다.
마음이 정리되어서일까.
준후는 가슴 속에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이 마음과 이 각오.
죽을 때까지 지켜 내리라.
“14번 서준후, 응시자 시험장으로 입장하세요.”
감독관이 준후를 호출했다.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경수는 준후를 향해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험장으로 입장했다.
직사각형의 테이블에 시험관 3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선입견 때문인지 세 사람 다 깐깐해 보였다.
특히 가운데 앉은 사람은 심술 난 두꺼비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시험관에게 목례를 하고 준후가 의자에 앉았다.
“서준후 응시자가 구술할 케이스는 이 환자입니다.”
가장 좌측에 앉은 교수가 말을 마치고 프로젝터에 환자의 차트를 띄웠다.
나이 60세.
과거력과 기저 질환은 없음.
C.C(주 호소)는 극심한 두통과 현기증.
혈압은 150mmHg/130mmHg.
GCS(의식사정) 스코어는 15점 만점에 7점.
혈액 검사에서는 글루코스와 수치와 CRP 수치가 특히 비정상.
두개골 X-ray 촬영상 아무 이상 없음.
…….
차트를 훑는 준후의 눈빛이 비장했다.
준후는 단순히 케이스가 아니라 실제 환자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진단 방침을 제대로 못 세우면.
환자에게 큰 참사가 벌어질 거라고 걱정하고 있었다.
준후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거기에는 무공과 내공을 비롯해 다양한 요소가 있겠지만 준후가 늘 연습을 실전처럼 필사적으로 다룬다는 데에도 있었다.
“이번 케이스는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 뭔가 다른 응시자랑 형평성에 안 맞는 것 같은데요.”
“그것도 다 자기 운이고 팔자죠.”
“난이도를 감안해서 채점을 하면 될 겁니다.”
시험관들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렸지만 귀가 밝은 준후는 다 들었다.
뭐라는 거야?
너무 쉬워서 하품이 나올 지경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