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제64장 압축(5)
‘쯧쯧쯧. 불쌍해도 어쩔 수 없지. 넌 무슨 수를 써도 시험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테이블 가운데에 앉은 시험관 박선웅이 준후를 독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준후에게 이번 구술시험에서 가장 까다롭고 복잡한 케이스가 걸린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선웅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케이스를 조작한 덕분이었다.
준후의 시험 순서에 맞춰서 해당 케이스를 교묘하게 배치해 놓은 것이다.
물론 선웅은 준후에게 원한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에게 준후란 오늘 처음 본 타 병원 레지던트에 불과했다. 딱히 싫어하거나 증오해야 할 구석도 없었다.
하지만 선웅의 친구 훈식은 사정이 달랐다.
홍훈식.
2년 전 대전 신원대학교 병원에서 신경외과 부교수를 했던 의대 동기.
레지던트 폭행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며 내년에 출소를 앞두고 있는 바보 같은 녀석.
얼마 전 선웅은 훈식의 면회를 갔다.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 선웅이 전문의 시험 감독관이 됐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훈식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럼 서준후라는 새끼. 반드시 떨어뜨려줘. 제발 부탁이다.
-네가 폭행했던 레지던트가 서준후 아니야? 근데 걔를 떨어뜨려 달라고?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새끼만은 용서 못 해. 그 새끼가 날 함정에 빠뜨렸다고.
-하…… 네 손버릇이 나쁜 거지, 애꿎은 애를 왜 원망하고 있어? 방금 그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한다.
-선웅아.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을 못 들어 주냐. 내가 화딱지 나서 죽을 꼴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 훈식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후로도 눈물로 통 사정을 하길래 마음이 약해진 선웅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선웅은 준후를 탈락시키기 위해 고난이도 케이스를 시험에 포함시켰고 상황이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서준후 응시자, 왜 말이 없습니까? 시험 중이라는 걸 잊었어요? 시험 중에 그렇게 얼빠진 태도라니…….”
“…….”
“그런 마인드로 나중에 집도나 제대로 하겠어요?”
선웅은 일부러 준후를 쪼아댔다.
다른 시험관들이 준후를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하게끔.
일종의 가스 라이팅이랄까.
작전이 통했는지 양옆의 시험관도 준후를 탐탁지 않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라면 우선 Brain Post-contrast CT 검사부터 실시하겠습니다.”
준후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다른 검사는요?”
“하지 않겠습니다. 그 정도면 진단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브레인 MRI나 MRA를 추가해야 하지 않겠어요? CT만으로 환자를 속단하기는 이른 것 같은데.”
선웅이 다시 한번 날카로운 질문의 창을 던졌다.
하지만 준후는 끄떡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의 방패를 들었다.
“MRI나 MRA를 촬영을 하는 것보다 수술방에 빨리 들어가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됩니다.”
“구체적인 이유는요?”
잠자코 있던 성복이 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GCS 스코어가 7점에 불과합니다. CRP 수치와 글루코스 수치도 너무 낮고요.”
“…….”
“이미 뇌출혈은 발생했을 겁니다. 혈종도 굳어가고 있겠죠. MRI나 MRA 촬영으로 소모되는 시간만큼 환자 상태는 악화될 겁니다.”
‘이 자식 제법이잖아?’
준후의 대답에 선웅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정답이었다.
이번 케이스는 선웅이 직접 경험했던 케이스를 가져온 것인데.
그 당시 선웅은 MRI나 MRA 촬영 없이 바로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신경외과 응급 환자의 경우.
때로는 진단보다 처치가 더 우선시 되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바로 이번처럼.
그런데 놀랍게도 준후가 그 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심지어…….
MRI나 MRA를 촬영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미끼를 던졌는데도 물지 않았다.
“서준후 응시자. 좀 흥미로운데요? 의외로 강단이 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박 교수님의 유도신문에도 안 넘어가고.”
성복과 연수가 속삭이듯 의견을 주고받았다.
어쩐지 선웅이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선웅은 훈식과 단단히 약속했다.
준후를 반드시 전문의 시험에서 끌어내리겠다고.
딸칵!
선웅이 다음 화면을 스크린에 띄웠다.
환자의 CT 사진이었다.
“CT 영상 판독해 보세요.”
“Spontaneously SAH, Aneurysm Rupture(자발적으로 발생한 뇌 지주막하 출혈, 뇌동맥류의 파열)입니다.”
준후의 판독은 거침이 없었다.
영상을 띄운 지 1초도 되지 않아서 바로 진단명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선웅이 영상을 줌인해서 뇌의 구조를 세밀하게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더 열 받는 건…….
준후의 판독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답과 일치했다는 점이었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선웅이 희미하게 다리를 떨었다.
“서준후 응시생. 평소에 판독 연습 좀 했나 봐요?”
“네. 판독 영상을 케이스 별로 분류해 놓고 분류한 영상을 통째로 암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세가 되어 있네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영상의학과 판독에 너무 의존하려고 하던데.”
또 다른 시험관 명재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가 단번에 성복과 명재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렇게 구술을 잘해버리면 선웅이 준후에게 정치질을 할 명분이 사라지고 마는데…….
“두 분 다 침착하세요. 아직 시험 끝난 거 아닙니다.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하게 응시생의 능력을 평가해야죠.”
“침착하지 못한 건 오히려 박 교수 아닙니까? 아까부터 다리를 떨던데요?”
명재의 지적으로 선웅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 이건 제 버릇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서준후 응시자.”
“네. 시험관님.”
“지금까지 잘해준 건 사실인데 가장 중요한 건 집도 계획입니다. 집도 계획을 말해보세요.”
지금까지는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갔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선웅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뇌동맥류 수술은 뇌혈관 수술 중에서도 수술법이 가장 다양하고 복잡한 수술이었다.
코일 결찰술.
스텐트 시술.
치료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며 그 안에서도 동맥류의 크기, 위치, 환자의 상태에 따라 무수히 많은 치료법이 가지처럼 갈라지게 된다.
치료법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준후의 머리는 터질 지경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이번 케이스에는 선웅이 몰래 숨겨 놓은 지뢰가 깔려 있었다.
그 지뢰를 밟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너무 어려우니까 시간을 좀 줄까요? 그게 좋겠죠?”
선웅이 자못 준후를 위하는 것 연기를 했다.
하지만 상관없다는 준후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유를 줄 때 곰곰이 생각하는 게 좋을 텐데요? 올해 시험에 떨어지면 내년에 또 쳐야 해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잠깐 뜸을 들인 준후의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저라면…… 이 환자 수술 안 합니다.”
준후의 대답은 시험장을 뒤흔들어놓았다.
* * *
“구술 시험은 어땠어?”
준후가 시험장을 나오자 대기 중인 경수가 준후에게 물었다.
아직 시험을 치르지 않은 경수가 강박적으로 문제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 문제가 살짝 어려운 편이긴 했는데 그게 아마 제일 어려운 문제였을 거야.”
“…….”
“이 정도 수준이면 너는 무조건 합격일걸?”
“혼자 시험 잘 쳤다고 벌써 배부른 소리 하기냐?”
“좋은 말을 해줘도 삐딱하게 듣네. 이래서 사람은 마음이 올곧아야 하는 거야.”
“되지도 않는 훈계는 사양…….”
경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감독관이 경수의 이름을 호명했던 것이다.
격려 삼아 경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준후는 대기실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학교 운동장은 여전히 새하얀 눈밭이었다.
통행로가 따로 있었으므로 운동장에 사람들의 발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다.
휘이이잉.
문득 불어온 겨울 바람이 준후의 앞머리를 장난치듯 희롱하고 떠나갔다.
이걸로 전문의는 확정이고.
세부 전공을 택하는 일만 남았구나…….
준후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방금 끝난 전문의 구술 시험을 회상했다.
준후는 놀랍게도 수술을 안 하겠다고 대답했는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보통 코일 결찰술은 신경외과가 하고 스텐트 시술은 영상의학과에서 진행한다.
이번 케이스에 경우.
후자가 환자의 치료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우선 CT상에 발견된 출혈과 혈종은 크지 않았다.
약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했다.
환자의 나이.
환자의 신경학적 상태.
뇌동맥류의 위치 등등을 감안하면 코일 결찰술보다 스텐트 시술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훨씬 컸다.
‘뭔가 함정을 파 놓은 것 같은 느낌인데 착각인가?’
비록 정답은 맞췄지만 준후는 찜찜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만약 다른 응시자가 준후의 케이스로 시험을 봤다면 어떤 대답을 했을까.
그들은 아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코일 결찰술이 필요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고?
신경외과 전문의 시험 중이니까.
신경외과 전문의 시험이니 신경외과에 방식대로 환자를 치료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준후는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미끼를 물기에 준후는 너무 노련했다.
스승 박재현의 자료집을 완벽하게 정복하고, 요즘은 다른 해외 논문까지 두루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경수가 준후에게 합류했다.
시험을 잘 치렀는지 표정이 개운해 보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인근에 있는 중학교로 이동했다. 거기서 아영과 합류했다.
흉부외과 전문의 시험이 근처에서 있었다.
오후 5시.
시간이 다소 일렀지만 세 사람은 역에서 가까운 호프집을 찾았다.
전문의 시험을 안주 삼아 도란도란 술과 대화를 나눴다.
“아영이, 넌 세부 전공 정했지?”
준후가 맥주잔을 비우며 물었다.
알콜 따위야 내공으로 단숨에 증발시킬 수 있었기에, 다른 서전들과 달리 준후는 음주에 딱히 구애를 받지 않았다.
“나야 뭐…… 흉부외과 지원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무슨 전공하게?”
사정을 모르는 경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폐 쪽 말고 심장 전공이지. 동생이 어렸을 때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거든.”
“아…… 미안. 나 몰랐어.”
“미안할 게 뭐 있어. 어쨌든 시험 잘 끝나서 기분 좋다. 심장 쪽 세부 전공하면 나중에 심장 이식 수술도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난 하루라도 빨리 심장 이식 수술을 해보고 싶어.”
아영이 오히려 씩씩하게 말했다.
아영의 동생은 심장이 제 기능을 제대로 못 하는 중증 심부전증 환자였다.
이식 순서를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준후는 곁에 앉은 아영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고맙다는 듯 아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때마침 탁자에 올려놓은 준후의 휴대폰이 떨었다. 경수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놈의 환타 기질은 개한테도 못 주겠네. 거봐. 병원 나올 때 환자 많을 것 같다고 불길한 예언을 하니까 딱 그런 상황이 생기잖아. 말이 씨가 되는 거라고.”
“경수 씨. 진정하세요. 의국 전화 아니거든요?”
준후는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며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의국 전화가 아니라서 더 당황하고 말았다. 발신자가 스승 박재현이었던 것이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 게.”
준후는 자리를 벗어나서 통화를 연결했다.
이 시간에 스승님께서 웬일로 연락을 주셨을까?
전문의 시험을 축하해 주려고?
아니면 다른 용무가 있어서?
어느 쪽이든 추측은 의미가 없었다. 열쇠를 쥔 사람은 준후가 아니라 재현이었다.
“네. 교수님.”
-…….
“네? 지금 당장 제원대 병원으로 와 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