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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36화 (334/424)

336화

제65장 타지(1)

밤 8시.

준후는 제원대학교 병원 정문에 도착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회백색 본관 건물이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생명의 등대였다.

스승님은 하필 전문의 2차 시험 당일에 왜 보자고 했을까.

오는 내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스승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준후에게 쓸데없는 일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예전처럼 수술 일손이 부족해서 호출했을지도 몰랐다.

“여기가 빅5중 하나인 제원대 병원이구나. 처음 와 봐.”

곁에 있던 아영이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훑었다.

술자리가 느닷없이 깨진 뒤.

경수는 집으로 돌아갔고 아영은 준후와 동행했다.

“난 몇 번 와봤는데 시설이나 장비는 우리보다 조금 나아 보이더라. 외과 사정은 양쪽 다 절망적이지만.”

“빅5가 이러면 중소병원 처지는 말할 것도 없겠네.”

“그런 셈이지. 암울하게도.”

아영과 대화하며 준후는 응급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스태프도 환자나 보호자도 아닌지라 응급실 입구 근처를 서성이는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갸름한 얼굴과 턱선.

깨끗하고 새하얀 피부.

윤기가 흐르는 짙은 흑발.

여전히 30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내가 바로 스승 박재현이었다.

“교수님.”

“준후 왔구나. 옆에 있는 친구가 애인인 아영이니?”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아영이라고 합니다.”

자기소개를 한 아영이 재현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영과 재현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둘 다 준후에게 소중한 사람이라서 준후가 간접적으로 소개를 했던 것이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준후가 강인해 보여도 사실 외강내유형이란다. 아영이 네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야.”

“역시 준후를 오래 봐주신 분이라서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계시네요.”

두 사람이 짝짜꿍을 맞추곤 서로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어리둥절한 건 준후뿐이었다.

어쩐지 준후만 묘하게 따돌림을 당하는 분위기랄까.

“스승님. 제가 언제부터 외강내유형이었습니까? 외강내강형 아니었습니까?”

“아니지.”

“절대 아니야.”

재현과 아영이 동시에 대답했다.

수적인 열세를 느낀 준후는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 시간에 호출하신 걸 보면 역시 응급 환자가 발생한 거겠죠? 쓸 만한 스태프가 없으신 거겠죠?”

준후의 목소리가 래퍼처럼 날렵한 리듬을 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적어도 의사들 사이에서는 그 말이 진리였다.

“준후, 네 머릿속에는 온통 환자뿐이구나. 나도 너 정도까지는 아닌데 말이야.”

“연구실이 아니라 응급실에 계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환자 때문에 콜 하신 거 아닙니까?”

“응급실은 다른 볼일 때문에 왔단다. 느긋하게 긴장 풀고 있으렴.”

재현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재현의 눈빛은 차분했다.

환자 콜이 아니라면 스승님은 대체 무슨 용건으로 연락했을까.

준후의 호기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실은 좋은 소식이 있어서 직접 알려주려고 연락했단다.”

“좋은 소식이요? 딱히 좋은 소식이라고 할 게…….”

“준후 너. 세부 전공 결정하는 데 애를 먹고 있지?”

“그걸 어떻게…….”

준후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고민을 재현이 알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평소 네 성격을 알고 있으면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세부 전공을 전부 다 배우고 싶은데 하나만 택해야 하니까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야.”

“솔직히…… 맞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메이유 클리닉으로 가보렴.”

“메이유 클리닉이요?”

되묻는 준후의 목소리가 커졌다.

메이유 클리닉.

그곳은 자타공인 미국 최고의 의과 대학 병원이었다.

근 10년 동안 미국 최고의 병원이라는 왕좌에서 내려와 본 적이 없는 꿈의 병원이었다.

하지만 메이유 병원과 준후의 세부 전공 선택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는 카페에서 김치찌개를 주문하는 것처럼 황당해 보일 따름이었다.

재현의 설명이 이어졌다.

얼마 전 미국에서 해외의사 수입법에이 통과했다는 것이었다.

해당 법에 따르면…….

세계 100위권 안에 드는 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의사는 별도의 시험 없이 미국에서도 의사 면허를 인정해주는 법안이었다.

미국도 인구수에 비해 의사가 부족한지라 궁여지책으로 내린 결정인 것이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치고는 이야기가 빙빙 도는 것 같았지만 준후는 입을 꼭 다물었다.

스승의 말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이런 배경에서 매우 공교롭게도 메이유 클리닉에서 부스트업 프로그램 을 새로 개설했더구나.”

“부스트업 프로그램이라면…….”

“외과 세부 전공 통합 교육 프로그램이란다. 쉽게 예를 들어주마. 만약 준후 네가 메이유 클리닉의 신경외과 부스트 프로그램에 지원한다면 말이다.”

재현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뇌혈관, 뇌종양, 정위신경, 경추·요추 파트, 소아신경외과, 외상외과, 수부외과 파트를 한 번에 배울 수 있단 말이지.”

“정말입니까?”

“그래. 수련 시간도 파격적으로 짧단다. 각 세부 전공마다 수련 시간은 1년이야. 우리나라 펠로우 과정이 보통 2년이니까 거기 가면 수련 시간을 2배로 단축할 수 있겠지.”

재현이 정해준 정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메이유 클리닉의 신경외과 부스트업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합격한다면…….

지금까지 준후를 속 썩이던 고민을 깡그리 해결할 수 있었다.

우선 신경외과와 관련된 세부 전공을 모조리 익히고.

동시에 그 속도와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수련 장소가 메이유 클리닉이라니…….

그만한 영광이 또 있을까.

“나도 메이유 클리닉에서 수련한 적이 있단다.”

“그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출간하신 에세이를 봤거든요.”

“굳이 그런 쓸데없는걸…….”

본인 에세이 이야기가 나오자 재현이 쑥스러워 했다.

준후의 시선을 피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니퍼라고 지인에게 미리 연락을 해뒀어. 준후는 넌 결정하고 비행기만 타면 된단다. 어때?”

재현의 질문에 준후는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일까.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건만.

왜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너무 꿈만 같아서?

깜짝 놀란 심장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해서?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무언가를 준후는 분명히 느꼈다.

하지만 답답하게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허…… 이게 그렇게 뜸을 들일 일이니? 오늘따라 준후 너답지 않은걸?”

재현이 세상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준후라면 당연히 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준후는 몇 번이나 입술을 들썩거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교수님. 죄송한데 하루 정도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안 될까요?”

* * *

그 길로 준후와 아영은 제원대 병원을 떠나 집 근처까지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준후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좌우로 맥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메이유 클리닉의 부스트업 프로그램에 지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것이 새로운 고민이었다.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그 위로 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현의 제안에 준후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크게 실망했던 얼굴이었다.

준후가 재현을 실망시킨 건 아마 오늘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현의 그런 표정을 오늘 처음 봤기 때문이다.

“좋은 기회가 찾아왔는데 당연히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왜 그 자리에서 대답 안 했어?”

아영이 준후에게 넌지시 물었다.

“나도 이상해. 내 마음을 내가 모르겠어.”

“사실 난…… 알 것 같은데?”

“내가 내 마음을 모르는데 아영이 네가 안다고?”

준후가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문득 마주친 아영의 눈빛이 깊고 차분했다.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알면 말해줘. 답답해 죽겠어.”

“이번 답은 준후 네가 직접 찾았으면 좋겠어. 준후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 돼. 아주 쉬워.”

아영이 준후의 볼에 입을 맞추곤 우측으로 뻗은 갈림길로 총총 달려갔다.

“아영아.”

준후가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아영은 이미 점이 되어 사라져 있었다.

쓸쓸한 달빛을 받으며 소금에 녹아 질척해진 눈을 밟으며 준후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영은 아는데 자신이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

질문을 던졌는데 정작 받아주는 이는 없었다.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공이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정처 없이 걷던 준후가 이내 도착한 곳은 집이 아니었다.

집 근처 공원이었다.

날씨가 쌀쌀하고 눈이 다 녹지 않아 공원은 황무지처럼 황량했다.

사람 말고 가끔 길고양이가 보일 뿐이었다.

준후는 벤치에 내려앉은 눈을 손으로 털고 앉았다.

허리를 반쯤 숙인 채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미국으로 가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

준후의 영어 스피킹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해외 유학을 미리 예상하고 영어 스피킹 연습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영어 스피킹을 내려놓은 지 꽤 되었지만 마음먹고 공부한다면 금방 기량을 되찾을 것이다.

준후는 미국 의사들과 경쟁하는 것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준후에게는 내공과 무공이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벌써 교수급 솜씨를 갖췄다.

그렇다면 왜?

대체 왜?

부스트업 프로그램을 망설이는 걸까.

준후는 끈질기게 이유를 파고들며 마음 저 깊숙한 곳까지 내려갔다.

진실은 그곳에 감춰져 있었다.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고 나니 복잡하게 엉켜 있던 실타래가 단숨에 풀려 버렸다.

“하…….”

준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진실은 이랬다.

부모님.

아영.

신원대학교 본원의 선·후배와 교수들.

준후가 7-8년간 미국으로 떠난다면.

자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또는 자신의 활약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켜야 한다는 것.

준후는 그것이 싫었던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준후에게는 버겁고 고통스러웠다.

역시 한국에 남아 있어야 하나.

시간은 걸리더라도 천천히 실력을 쌓아야 하나.

인연을 다 끊는 것처럼 미국에 가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한국에 남는 것이 옳은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준후의 마음은 금방 미국행으로 쏠렸다.

미국에 준후의 오랜 꿈이 있었다.

신경외과 세부 전공을 전부 마스터해서 그 어떤 응급 환자라도 직접 치료할 수 있는 기적의 경지가.

이제 그곳에 손만 뻗으면 움켜쥘 수 있건만…….

질문이 끝난 자리에서 고통스러운 이지선다의 갈림길이 생겨났다.

벤치에서 일어난 준후가 다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준후가 강인해 보여도 사실 외강내유형이란다. 아영이 네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야.

-이번 답은 준후 네가 직접 찾았으면 좋겠어. 준후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 돼. 아주 쉬워.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진지한 이야기를 더해보자면. 내가 봤을 때 너는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그것도 말기로.

스승 재현의 말.

아영의 말.

동기 경수의 말이 차례대로 준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말들을 따라가다 보니 가야 할 길이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 아들 왔어? 저녁은 챙겨 먹었고?”

“시험은 잘 봤니?”

집 현관에 들어서자 부모님이 준후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모님 뒤에는 반려견 똘똘이가 꼬리로 신나게 프로펠러를 돌리고 있었다.

어쩐지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준후는 아주 사소한 말투로 말했다.

“저녁도 먹고 시험도 잘 쳤어요. 근데 저 미국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해외의사 수입법’과 ‘부스트 업 프로그램’은 극의 빠른 전개를 위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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