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37화 (335/424)

337화

제65장 타지(2)

발 없는 말이 천리로 퍼져 나갔다.

부모님을 시작으로, 준후는 아영과 주변 지인들에게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널리 알렸다.

그에 따른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엇갈렸다.

하나는 걱정이었는데.

준후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굳이 타지에 나가서 개고생을 해야 하느냐.

음식이 입에 안 맞을 게 뻔하고, 말도 제대로 안 통할 거고, 문화는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일 테고.

심지어 동양인을 향한 인종차별도 극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대부분이 준후의 앞날을 걱정하며 이구동성으로 준후의 선택을 뜯어말렸다.

단지 미국으로 수련으로 가는 것뿐이거늘 사람들은 준후가 북한 탄광에 사상범으로 끌려가는 듯한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소수의 사람은 준후에게 노골적으로 실망을 드러냈다.

주로 교수들이었다.

교수들 중에서도 준후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동훈이 대표적이었다.

-준후, 네가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네게 거는 기대가 컸다……. 너라면 한국에 남아서 박재현 교수의 바통을 이어받을 차세대 스타 서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

-그런데 갑자기 미국행이라니. 그것도 미국에서 무려 7-8년이나 수련을 하겠다니. 안타깝기도 하고 뒤통수를 얻은 맞은 기분도 드는구나. 시설이나 장비적인 측면이라면 몰라도…… 한국 서전의 솜씨만큼은 결코 미국 서전에게 뒤처지지 않는단다.

동훈의 지적에 준후는 주절주절 핑계를 대지 않았다.

죄송하고 또 감사했다며 짧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주변의 끈질긴 반대에도 준후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준후의 마음은 곧았다.

곧게 메이유 클리닉 부스트업 프로그램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가슴 뛰는 일이 있다면.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내면의 목소리가 말해주었다.

나는 나일 뿐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 할 수 없다.

나는 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내면의 목소리가 준후를 보호해 주었다.

수많은 지인 중에 준후의 선택을 지지해 준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아영과 스승 재현이었다.

두 사람은 오히려 준후의 선택을 순수하게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

재현은 의술의 멘토였고, 아영은 마음의 안식처였다.

자신의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과 자신이 곁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준후는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게 한 달이 쏜살같이 질주하는 동안.

준후는 차근차근 출국을 준비했다.

비자를 발급받았고 잔뜩 녹슬었던 영어 스피킹 실력에 기름칠을 했다.

재현에게 소개받은 제니퍼, 메이유 클리닉 소화기 내과 교수와 개인적으로 연락도 주고받았다.

그 와중에 전문의 2차 시험 결과도 발표되었다.

1, 2차 시험을 통틀어서 준후는 만점으로 시험에 합격했다.

당연한 결과라서 딱히 기쁠 것은 없었다.

대망의 출국 전날 저녁.

준후는 모처럼 집 근처 야산을 찾아 산책을 즐겼다.

원래는 아영을 보러 신원대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아영이 극구 반대했다.

혼자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꼭 필요할 거라며.

산책을 하는 동안 준후는 여전히 실감을 못 했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무려 7-8년은 지나야 다시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준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경외과 세부 전공을 전부 마스터한, 유일무이한 서전으로 거듭나 있을 테니까.

나는 더 강해진다.

환자와 보호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꼴도.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꼴도 더는 보지 않아.

모든 비극을 내 손으로 끝내겠어.

밤이 깊어지는 만큼 준후의 각오도 깊어졌다.

* * *

인천 국제공항은 오늘도 분주했다.

수많은 사람이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개중에는 외국인도 있었고 자기 몸통보다 큰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젊은 여성도 있었다.

일부 항공편에 운행 지연이 발생했다는 안내 방송도 흘러나왔다.

“몸 건강하고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연락하렴. 시차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기왕 판을 벌였으면 크게 먹어야지. 목표를 이룰 때까지 집 생각은 하지 말거라.”

어머니의 말은 따뜻했고.

아버지의 말은 차가웠다.

언어의 온도는 달랐지만 두 분의 말에는 준후를 향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구 아들인데요. 그리고 알아보니까 미국 생활도 별거 아니더라고요.”

준후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차례대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 곁에 서 있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준후를 배웅하기 위해 특별히 오프를 낸 아영이었다.

아영은 준후를 바라보며 방긋 웃고 있었다.

진짜 미소는 아닐 것이다.

준후가 편하게 떠날 수 있도록 아마 안간힘을 써서 만든 가짜 미소일 것이다.

그 증거로 아영의 주먹은 힘껏 쥐어져 있었다.

손등에 정맥이 도드라질 만큼.

“아영아. 미안하고 고마워. 나는…….”

“됐어. 더 말 안 해도 돼.”

아영이 오히려 준후를 안아주고는 준후의 등허리를 툭툭 토닥여 주었다.

“준후 넌 뭔가에 도전할 때 가장 멋있어. 더 멋있어지려고 미국에 가는데 내가 그걸 왜 말리겠어?”

“…….”

“원하는 걸 손에 쥐고 돌아와. 내가 항상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입 밖으로 무언가를 내뱉으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아영과의 포옹이 끝난 후.

준후는 소중한 이들을 등지고 게이트로 향했다.

사람들의 발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

캐리어 바퀴가 덜그덕 거리는 소리.

공항에 수많은 소리가 넘쳐났지만 준후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속에 섞여 있는 아영이 흐느껴 우는 소리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 뒤를 돌아보면.

미국으로 떠날 자신이 없어서.

* * *

탑승 수속을 밟고 긴 통로를 통과해 준후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광야처럼 넓은 활주로와 푸른 하늘이 환상적인 지평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적어도 하늘은 준후의 미국행을 축복하는 듯했다.

오늘따라 날씨가 기가 막혔다.

준후의 목적지는 미네소타인데 직항편이 있어서 번거로운 절차는 겪지 않아도 됐다.

한참 창밖을 바라보던 준후의 시선이 기내 통로로 옮겨졌다.

한 외국인 사내가 승무원과 대화 중이었다.

정장 차림에 외국인 사내는 키가 컸으며 덩치가 곰처럼 우람했다.

얼굴은 인자했는데 하얀 수염만 길렀다면 영락없는 산타클로스였다.

본래 땀이 많은 체질인지.

뒤늦게 비행기에 타기 위해 달려왔는지 얼굴에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준후는 금방 사내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을 도화지 삼아 앞으로 펼쳐질 파란만장한 미국 생활을 그려보았다.

일단 의사소통은 별걱정이 안 되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영어 스피킹 공부를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백지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었던 만큼 실력은 콩나물 자라듯 쑥쑥 자라났다.

미국 생활에 있어서도 큰 불편함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스승 재현이 소개해 준 제니퍼가 일상적인 부분은 다 케어해 준다고 장담했으니까.

가장 큰 문제라면…….

역시 부스트업 프로그램에 합격하는 일이었다.

제니퍼의 정보에 따르면 부스트업 프로그램의 경쟁률은 무려 100 대 1에 가깝다고 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레지던트를 거쳐 전문의 자격증까지 딴 사람들이니 다들 실력이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준후라도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또한 메이유 클리닉의 부스트업 프로그램은 베일 안에 꽁꽁 숨겨져 있었다.

제니퍼조차 담당 교수진과 커리큘럼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고 전했다.

메이유에서 야심차게 또 처음으로 선보이는 교육 과정인 만큼 정보 보안에도 크게 공을 들이는 듯했다.

그나저나 궁금하네.

지원자들 실력을 어떻게 가려낼지.

전문의 시험 때처럼 케이스 분석을 시키려나?

아니면 실제로 집도를 시키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비행기가 이륙했다.

비행기가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지상의 것들이 보이지 않거나 점차 작아졌다.

준후는 이내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총 4겹의 띠로 이루어진 마나 하트에 5번째 겹의 띠를 두르기 시작했다.

조화경에 경지를 뛰어넘어.

현경에 경지에 오르는 게 최선이긴 했지만.

현경의 경지는 아직 준후에게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열심히 달리고.

아무리 필사적으로 팔을 뻗고.

아무리 힘껏 손을 움켜쥐어 봐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초조해하지 말자.

내 것이라면 결국 가지게 될 테니까.

혼란한 마음을 정리하고 준후는 운기조식에 몰두했다.

주변이 부산하고 소란스러웠지만 준후는 이미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접어들어 있었다.

차원이 달랐으므로 방해를 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내에서 안내 방송 드리겠습니다. 현재 비행기에 탑승한 의사분이 계시면 신속하게 화장실 구역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현재 비행기에 탑승한…….

기장의 다급한 목소리만큼은 준후도 차마 걸러낼 수가 없었다.

오늘 비행기를 처음 타봤는데 바로 닥터 콜이라니.

확실히 환자복은 타고난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준후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나왔다. 후방 화물칸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과연 화장실 근처에 불안에 떠는 승무원 몇 명이 몰려 있었다.

주변 승객들은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그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닥터 콜 듣고 왔습니다. 신원대학교 병원 신경외과 의사 서준후라고 합니다. 환자 분은…….”

“여기요.”

승무원 한 명이 자리를 비켜주며 검지로 바닥에 쓰러진 환자를 가리켰다.

환자는 준후가 아까 눈여겨본 외국인 환자였다.

환자는 복도 바닥을 침대 삼아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의식이 전혀 없었다.

“환자 분이 쓰러진 경위를 아시는 분 있습니까?”

“제가 알아요.”

토끼 같은 이미지의 승무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환자 분이 화장실에서 나오시는 걸 봤는데요. 갑자기 어지러운지 한 손을 이마에 대고 다른 손으로는 화장실 문을 짚으시더라고요.”

“…….”

“이상하다 싶어서 다가갔는데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지셨어요.”

말을 마친 승무원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승무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승객이 각종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는 잦아도 이렇게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현장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준후뿐이었다.

준후는 환자가 의식을 잃었음에도 허둥대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환자는 왜 쓰러졌는가.

쓰러진 이유를 알아냈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최대한의 냉정함을 유지했다.

마음이 흔들리면 진단과 치료도 덩달아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일단 환자분 자리로 이동해서 가방이나 다른 소지품이 있는지 확인하고 가져와 주시겠어요?”

“그건 왜…….”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준후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환자 쪽으로 몸을 숙였다.

진료는 지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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