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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38화 (336/424)

338화

제65장 타지(3)

준후는 눈으로 잽싸게 환자의 몸을 훑었다.

환자의 얼굴은 하얀 종이처럼 창백했다.

체온을 측정하기 위해 환자의 이마에 손을 올렸더니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저 체온일 리는 없을 테고…….

땀이 식으면서 차가워졌을 것이다.

요란하게 사지를 떨거나 입에 게거품을 물지 않는 걸 보면 간질 발작도 지워낼 수 있을 듯했다.

의식은 없지만 호흡은 멀쩡하고 피부에 두드러기가 없는 걸 보면 아나필락시스도 배제해도 되겠어.

관찰의 결과를 통해 준후는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진단명을 순식간에 지워냈다.

하지만 범위가 좁혀질수록.

준후의 미간도 동시에 좁아졌다.

뭐랄까.

환자가 쓰러진 이유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 숨어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환자가 외국인이었으므로 준후는 영어로 물으며 환자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환자는 손톱만큼의 반응도 없었다.

CPR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데도 좀처럼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선생님. 환자분이 왜 쓰러지셨을까요?”

준후가 묻고 싶은 질문을 승무원이 먼저 던졌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선생님. 여기 환자 짐 가방이요.”

때마침 자리를 떠났던 승무원이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준후에게 환자의 백팩을 건넸다. 준후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하고 백팩을 건네받았다.

다급히 백팩의 자크를 열어 내용물을 거꾸로 쏟았다.

와르르르!

수첩, 영어 원서, 과자, 초콜릿, 헤드셋, 안경 등등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불행하게도 준후가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백팩에 있는 작은 주머니들을 일일이 뒤졌다. 주머니나 작은 보관함에서도 준후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일이 점점 꼬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찾으세요? 선생님?”

“복용하고 있는 약이 있는지 확인해본 겁니다. 약하고 처방 봉투가 있으면 기저 질환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아…… 그러셨구나. 그래서 가방을…….”

“근데 소득이 전혀 없네요.”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사실 소지품을 통해 진단에 필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환자가 독서를 좋아하고 달콤한 간식을 좋아한다는 영양가 없는 정보만 얻었을 따름이었다.

“우리 혹시 회항해야 하는 겁니까? 저 비즈니스 미팅 있어서 제시간에 도착해야 하는데요.”

한 승객이 승무원에게 불만 섞인 한마디를 던졌다.

주변 승객들도 상황이 달갑지 않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1시간이 지났다.

인천 공항으로 돌아가는 데 소모되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승객들까지 준후에게 은근한 압박을 가하는 상황.

하지만!

승객의 불평은 오히려 준후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굳이 환자가 쓰러진 이유를 찾아야 할까.

질문을 바꿔 보면 어떨까.

환자가 회항을 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태인가, 아닌가를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질문을 바꾸자 환자를 진료하는 준후의 태도도 180도 달라졌다.

호흡은 잘하고 경동맥도 멀쩡히 뛰고 있으니 응급 심장 질환은 배제하자.

그럼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은 역시 그건가?

준후는 지금까지 살펴보지 않았던 환자의 머리를 살폈다.

머리카락까지 꼼꼼하게 훑다 보니.

좌측 옆통수에 퍼런 멍과 약지 손톱 길이만큼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지윤 씨.”

준후가 토끼 같던 승무원을 불렀다.

그녀의 가슴에 이름이 적힌 명찰이 달려 있었기에 가능했다.

“네. 선생님.”

“환자가 화장실에서 나와서 쓰러질 때 머리부터 떨어졌나요? 아니면 넘어지면서 어디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나요?”

“잠시만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 지윤이 비행기 천장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찬장에 머리를 부딪친 것…….”

찬장을 바라보던 지윤이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눈을 깜빡거리다가 검지로 찬장을 가리켰다.

찬장 뾰족한 모서리에 환자의 피가 묻어 있었다.

“어머! 어떻게 하죠! 머리를 크게 다치셨나 봐요.”

“정말 회항을 해야 하나 봐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시는데…….”

찬장에서 발견된 피 때문에 승무원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승객들도 덩달아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그 사이 준후는 환자의 머리에 손바닥을 올렸다.

마나 하트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손바닥으로 뿜어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바닥에서 분출된 내공이 두피와 두개골을 통과해 환자의 뇌로 퍼져 나갔다.

내가 기공을 이용한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펼친 것이다.

내공 뇌혈관 조영술 덕분에.

준후는 걸어 다니는 CT이자 MRI이자 angiography였다.

‘희한하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반사되는 내공의 공명을 느끼며 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의 머리는 멀쩡했다.

두개골 골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혈관에 출혈이나 파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병인은 아직 미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중요한 사실은…….

환자의 머리가 멀쩡하다는 사실이었다.

심장에도, 머리에도 문제가 없다면 환자의 증상은 당장 회항을 해야 할 만큼 응급 상황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당장 비행기부터 돌리시죠. 사람 목숨이 우선입니다.”

현장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승객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준후 쪽으로 다가왔다.

사내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한국인이었다. 운동장처럼 넓은 이마가 인상적이었다.

“누구세요?”

승무원의 질문에 승객이 대답했다.

“김태원이라고 한국에서 의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 *

“아직까지 의식을 못 차릴 정도면 머리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게 분명합니다. 기장한테 연락해서 비행기를 돌리세요.”

태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환자가 머리를 다쳤고 천장에서 환자의 피가 발견되었기 때문일까.

승무원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장실로 달려가려는 순간.

한 사내가 승무원을 막았다.

“저기 고객님. 길을 비켜주셔야 합니다. 지금 급하게 볼일이 있어서…….”

“나도 급한 볼일 있다고요. 아까 말했잖아요. 급한 비즈니스 미팅 있다고.”

승무원의 앞을 가로막은 승객은 비킬 생각이 없다는 듯 두 팔을 벌려 승무원을 막았다.

“급한 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사람의 목숨이 더 소중한 것 아닐까요?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번 미팅 성공 못 시키면 내 목숨도 날아갑니다. 내 목숨은 목숨도 아닙니까?”

“손님, 이러시면 안 돼요.”

“의식만 못 차렸는지 겉으로 봤을 때는 멀쩡해 보이는데 뭐가 그렇게 문제입니까? 조금 있으면 금방 정신을 차릴 수도 있잖아요. 천천히 기다려 보자고요.”

“의사 승객분이 비행기를 돌리자고 말씀하셨어요. 그만큼 환자 상태가 위독하다는 뜻이에요.”

승무원이 애절한 목소리로 부탁했지만 통로를 막은 승객은 들은 체도 안 했다.

“당신은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서 난리야?”

“음악을 듣느라 기내 방송을 못 들었습니다. 나중에 상황을 파악했더니 저분께서 먼저 진료를 보고 있었고요.”

태원이 담담하게 대답하고 턱짓으로 준후를 가리켰다.

“빨리 비키세요. 환자분 병원으로 이송해서 수술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아니,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니까요. 의사란 양반이 이렇게 사람들 겁이나 줘서 되겠어요?”

승객의 항의에 태원이 불쑥 걸치고 있던 외투를 허물 벗듯이 벗었다.

나이와는 걸맞지 않은 탄탄한 몸매가 드러났다.

“좋은 말 할 때 비켜요.”

“노인네. 뭐야?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그쪽이 계속 길을 막고 서 있겠다면 피할 수 없겠죠.”

태원이 승객 쪽으로 다가가면서 상황은 일촉즉발이 되었다.

두 사람이 일으킨 긴장으로 기내 공기가 팽팽하게 압축되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준후가 나섰다.

“두 분 다 진정하시죠.”

승객과 승무원, 태원의 시선이 일제히 준후에게 향했다.

“지금이 진정할 상황입니까? 환자는 수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회항을 방해 중이라고요.”

태원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저도 승객분 의견에 동의합니다. 굳이 회항할 필요는 없어 보여요.”

“무슨 근거로요?”

태원의 질문에 준후는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내공 혈관 조영술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준후와 태원.

젊은 의사와 나이 지긋한 의사의 충돌에 전개는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저는 신경외과 의사입니다. 신경외과 의사 소견으로…… 환자는 그리 위독하지 않아요.”

“환자가 머리 다친 걸 확인하고 여태까지 의식을 잃은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

“신경외과 의사라면 오히려 회항하자고 주장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태원이 가당치도 않다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몇몇 승객들이 태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론이 단숨에 태원 쪽으로 기울었다.

태원의 주장도 틀린 건 아니었다.

두개 외상이 있는 환자가 쉽사리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최악의 상황인 두개 내 출혈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역시 아무 말도 못 하는군요. 당신도 결국 저 이기적인 사람이랑 똑같습니다. 본인 스케줄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

“의사 자격이 없는 사람은 빠져 있어요.”

준후를 응시하는 태원의 눈빛에 혐오가 담겨 있었다.

답답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준후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돌고 돌고 또 돌아서.

결국은 환자가 쓰러진 이유를 찾은 뒤 환자를 회복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해 보였다.

솔직히 회항해도 문제는 없었지만.

기왕이면 환자를 기내에서 살리고 다급한 미팅 스케줄이 잡힌 승객도 구해주고 싶었다.

방법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준후는 필사적인 각오로 환자의 짐들을 재점검했다.

놓치거나 빼 먹은 것은 없었기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기존 물건들로 환자의 병명을 추론하기로 했다.

역시 가장 거슬리는 점은…….

환자의 가방에 간식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과자, 초콜릿, 사탕 등등.

준후는 환자의 수첩을 손에 쥐고 재빠르게 넘겨보았다.

혹시나 수첩에 질병에 관한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수첩에는 환자의 단편적인 생각들만 적혀 있었다.

이를테면…….

인간은 여행을 통해 성장한다, 전혀 다르고 낯선 환경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자아상을 재조립한다는 따위의 글이었다.

끝까지 봐도 건질 것이 없어서 준후는 수첩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환자가 쓰러지던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막 화장실에서 나온 환자가 현기증을 호소하며 비틀거리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지는 장면을.

무언가가 잡힐 듯이 잡히지 않았다.

그 사이 태원은 승무원을 지나쳐 통로를 막고 있는 승객에게 저벅저벅 다가가고 있었다.

“진짜 붙어보자는 거죠? 내가 옛날에 복싱 좀 배웠거든요?”

승객이 이죽거리며 잔망스럽게 상체를 흔들었다.

태원은 그런 승객이 하찮다는 듯 비웃음을 날렸다.

그렇게 주먹 다툼이 발생하기 일보 직전.

준후의 외침이 기내를 뒤흔들었다.

“잠깐! 두 분 다 싸우지 마세요. 제가 10분 내로 환자를 회복시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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