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제65장 타지(4)
“잠깐! 두 분 다 싸우지 마세요. 제가 10분 내로 환자를 회복시킬 테니까.”
준후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 자신감이 발목을 붙잡아 태원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준후를 응시했다.
준후가 꿇릴 게 전혀 없다는 눈빛으로 태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맹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빛이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환자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의원에서 숱하게 환자를 진료해 온 나조차 해낼 수 없는 일을, 저 새파란 애송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혹시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건가?
그사이에 회항을 반대하는 승객들의 여론을 모아보겠다는 건가?
눈 깜짝할 사이에 태원의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은 생각과 추측들이 스쳐 지나갔다.
“환자가 위급하다면 10분이라도 빨리 회항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헛소리야. 고작 10분 차이로 사람이 죽고 산다고?”
“무식한 사람아. 골든타임도 몰라? 골든타임? 사람을 살릴 때는 시간이 금이라고.”
“깐깐하게 굴기는. 그 10분을 다른 데서 안 까먹는다는 보장이 있어? 그리고 만약 그 10분 안에 정말 환자가 의식을 차리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승객 두 명이 회항을 두고 얼굴을 붉히며 말다툼을 벌였다.
그들의 다툼은 금방은 승객들을 두 갈래로 분열시켰다.
이른바 회항파 VS 반회항파의 대립 구도였다.
기내 분위기는 점점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들 조용히 하세요!”
태원이 우렁찬 목소리로 호령했다.
그 호령이 주변의 크고 작은 말소리들을 블랙홀로 빨아들였다.
승객들의 시선이 다시 태원에게 집중되었다.
“방금 10분 내로 환자를 회복할 수 있다고 했어요?”
“네. 물론입니다.”
“설마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그쪽은 혹시 거짓말로 환자를 치료합니까?”
준후의 매서운 역공에 태원이 한 방 먹었다는 듯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요놈 봐라?
눈빛뿐만 아니라 입담도 수준급인데?
태원은 언젠가부터 준후가 내뿜고 있는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해졌다.
“그럼 어디 마음껏 치료해 봐요. 단, 허튼 소리를 했다는 게 밝혀진다면…….”
“…….”
“나뿐만 아니라 다른 승객들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저도 조건 하나를 걸죠.”
“뭡니까?”
“아까 저를 환자보다 개인 스케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매도했던 일, 사과하세요.”
“얼마든지요. 환자만 치료할 수 있다면 큰절이라도 올려드리죠.”
“그 약속, 꼭 지키세요.”
준후와 태원.
회항파와 반회항파의 수장(?)이 극적으로 타협하면서 기내의 공기가 한순간 느슨해졌다.
이제 사람들의 이목은 죄다 준후에게 쏠렸다.
준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과연 어떤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할 것인지에 일거수일투족이 쏠렸다.
“지윤 씨.”
“네. 선생님.”
준후의 부름에 승무원 지윤이 준후에게 다가갔다. 준후가 귓속말을 전하자 놀란 지윤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눈이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졌다.
“정말 그걸로 될까요?”
“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준후가 미소를 지었고 지윤은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래 어디 한번 확인이나 해보자. 환자를 살리겠다는 네 발칙한 치료방법이 무엇인지.
태원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내려다보았다.
또각. 또각.
잠시 후 태원의 등 뒤에서 승무원의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사태의 마침표를 찍어줄, 아니면 새로운 분란을 불러일으킬 무언가를 들고서.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씀해주신 거 가져왔어요.”
지윤은 준후에게 음료병을 내밀었다.
준후가 그 무언가의 뚜껑을 열었다.
펑!
안에 든 노란 액체가 병 안에서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젊은 친구가 장난이 심하네. 고작 그걸로 사람을 살리겠다고?”
“저 사람 의사 맞아요? 의사인 척하는 돌아이 아닙니까? 누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승객들 사이에서 불신의 해일이 거세게 일어났다.
준후가 지윤에게 부탁한 것은 바로 오렌지 주스였기 때문이다.
머리 외상을 입은, 의식 불명의 환자에게 주스를 처방하다니?
승객들이 황당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편 준후는…….
주변에서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한 손으로 환자의 목을 받치고 다른 손에 쥔 오렌지 주스 병을 환자의 입가에 가까이 대었다.
환자에게 조심스레 오렌지 주스를 먹였다.
연하 반사는 없는지.
주스가 넘어가면서 환자의 목젖이 출렁거렸다.
“차마 더는 못 보겠네요. 제가 나서서 막겠습니다.”
한 승객이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준후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태윤이 팔을 쭉 뻗어 승객의 진로를 방해했다.
승객의 눈썹이 뾰족하게 솟구쳤다.
“뭐 하세요? 저 꼴을 보고 계실 겁니까? 그쪽도 의사라면서요. 당장 헛짓거리를 못 하게 막아야죠.”
“치료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네요. 굳이 회항할 필요도 없겠어요.”
“진심입니까?”
태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자신의 완벽한 패배였다.
* * *
준후가 호언장담했던 대로 환자는 단 10분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으으으, 신음을 흘리다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와, 뭐야. 말도 안 돼. 정말 환자가 의식을 되찾았잖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오렌지 주스에 무슨 약이라도 탄 거 아니야?”
“난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예상을 한참 초월한 준후의 치료법에 승객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탰다.
화제의 중심에 있음에도 준후는 오로지 환자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머리가 멍하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머리가 뿌예지면서 중심을 잃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
“그 이후로는 도통 기억이…….”
환자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푹 쉬시죠.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준후는 환자를 부축해서 기내 통로를 가로질렀다.
환자가 편하게 앉는 것을 확인한 후.
승무원이 챙겨온 구급함으로 환자의 머리에 난 상처를 소독하고 그 위에 거즈를 덧대고 붕대를 감았다.
이걸로 소동은 종료였다.
개운한 마음으로 준후는 화장실 구역으로 복귀했다.
갈등이 치열했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결론이 났지만 에필로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한편 준후가 복귀하자 승객들과 승무원, 태원이 준후를 무대에 선 주인공처럼 쳐다보았다.
“다들 환자가 무사한 걸 보셨을 겁니다. 이제 회항을 두고 서로 물고 뜯는 일은 하지 마세요.”
“근데 선생님. 환자분은 애초에 왜 쓰러진 건가요?”
지윤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환자가 다 마신 오렌지 주스 병이 아직 들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유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일단 환자분은 당뇨병성 저혈당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뇨병이 있다면 왜 가방을 뒤졌을 때 약이 안 나왔나요?”
“여행을 하다 보면 중간에 약이 떨어질 수도 있죠. 아마 그 대신으로 간식거리를 준비해두신 것 같아요.”
준후의 검지가 아직 기내 바닥에 깔려 있는 환자의 초콜릿, 사탕 등등을 가리켰다.
“환자분은 당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거기에 악재가 하나 더 겹쳤습니다.”
“악재라면…….”
“환자가 화장실 앞에서 쓰러졌다는 부분에 힌트가 있어요.”
“답은 기립성 저혈압입니다.”
잠자코 있던 태원이 대화에 껴들었다.
기립성 저혈압.
이는 오랫동안 누워 있거나 앉아 있다가 일어날 때 순간적으로 혈압이 떨어지는 증상이었다.
준후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혈당과 기립성 저혈압이 겹치면서 환자가 쓰러진 겁니다. 그래서 증상이 더 심하게 보였던 거고요.”
“…….”
“마침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쳤고 환자가 빨리 깨어나지 않으니 다들 뇌에 문제가 생겼다고 착각을 했던 거고요.”
준후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가 풀리면서 사람들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준후도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당뇨병성 저혈당과 기립성 저혈압.
이 두 가지 진단을 내리기까지 준후도 꽤나 애를 먹었다.
태원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엄포를 놓지 않나.
승객들은 서로 헐뜯지를 않나.
정작 내공 뇌혈관 조영술을 펼쳐도 환자에겐 아무런 이상이 없지를 않나 등등.
주변의 압력이 극심한 와중에도.
준후는 무림에서 기른 침착함.
환자의 소지품과 환자가 처한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관찰력.
이 두 가지를 무기 삼아 치료를 성공시켰다.
즉, 무림에서 얻은 보물은 비단 무공과 내공뿐만이 아닌 것이다.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는 태도 또한 소중한 유산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뇌를 다쳤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검사를 해본 것도 아닌데요?”
한 승객이 손을 번쩍 들고 이의를 제기했다. 몇몇 승객들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준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뇌출혈이라면 환자의 상태가 저렇게 극적으로 호전될 수 없습니다.”
“…….”
“그럼 신경외과 의사가 왜 있겠습니까? 편의점에서 오렌지 주스만 사서 마시면 되는데.”
준후의 재치 있는 답변에 승객 몇몇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만큼 기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져 있었다.
환자가 건강을 되찾았으니 회항을 두고 서로 치고받고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솔직히 저도 회항을 반대하면서 양심에 좀 찔리긴 했는데요…….”
“…….”
“덕분에 차질 없이 미팅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경을 낀 승객이 준후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고 준후도 승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승객이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승무원들도 준후에게 감사를 전하곤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이제 긴 통로에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는 이는 준후와 태원뿐이었다.
두 사람이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 내가 졌어요. 환자가 워낙 의식을 못 차렸던 데다가 머리에 외상 흔적까지 있었잖아요?”
“…….”
“그러니까…… 내가 외상으로 인한 뇌출혈이라는 오류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이기적이라고 했던 말도 진심으로 사과하죠.”
“이제라도 제 진심을 알아주셨으니 다행이네요.”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태원과 언성을 높이며 다투긴 했지만 태원에게 원한은 없었다.
둘 다 각자의 관점에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니까.
“어이쿠.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시면 어떻게 합니까?”
준후가 번개처럼 앞으로 달려 나가 두 팔로 허리를 숙이는 태원의 몸을 지탱했다.
“약속은 지켜야죠. 지면 큰절을 올리기로 했는데.”
“저도 중간에 약이 올라서 해본 말입니다. 선배님께 절을 받아봐야 제가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끽해야 버릇없다는 소리나 듣지.”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미안한데요? 젊은 선생님을 너무 나쁜 놈으로 매도한 것 같아서…….”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리신다면…… 나중에 주변에서 실수한 분이 있을 때, 그분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빚은 그걸로 갚겠습니다.”
“나라면 기어이 절을 받아냈을 텐데…… 젊은 선생님이 말도 참 곱게 하는군요.”
“아닙니다. 저도 인격을 닦으려면 아직 멀었는걸요.”
말을 하는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사실 태원의 실수는 양반이었다.
준후는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로 수많은 동료를 죽음으로 내몬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