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340화 (338/424)

340화

제65장 타지(5)

초승달이 날카롭게 번뜩이던 어느 날.

사천성과 섬서성 지역의 경계에 있는 한 야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무림맹에서 청룡단주를 맡고 있던 준후는 산 중턱에 서 있었다.

휘이이잉.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장포가 펄럭거리고 길게 묶어 뒤로 넘겨진 머리가 휘날렸다.

준후의 맞은편에는 스무 명 남짓한 청룡단원들도 서 있었다.

준후와 청룡단원의 눈빛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충돌했다.

바람이 그치면서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다들 물러서라. 비키지 않으면 하극상으로 죄를 물을 것이다.”

준후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준후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드디어 찾았다!

아버지의 원수 적일도의 은신처를!

그래서일까.

아까부터 검이 계속 속삭여 대고 있었다.

일각이라도 빨리 적일도의 피로 몸을 적시고 싶다고.

“단주님.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하십시오. 이건 지나가던 개가 봐도 함정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부단주 황보철이 애원하듯, 아니,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보통의 이야기가 너무 구체적이라서 오히려 구린내가 납니다. 적일도의 인상착의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도 그렇고. 지난 십 년간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적일도의 은신처를 며칠 만에 이리도 쉽게 찾아냈다는 것도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

“지금 저곳에 들어가는 건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의 대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입니다.”

“녀석은 숨어 지내다가 진이 빠졌을 거야. 그래서 꼬리를 밟힌 거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준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준후는 아까부터 황보철의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아마 무림맹주가 설득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때의 준후는 복수에 귀와 눈이 멀었다.

악인의 냉혹한 칼날에 아버지의 가슴이 꿰뚫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피 흘리는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채 제발 살아나라고 오열해 본 적이 있는가.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서.

그날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한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준후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최소한 무림맹 사천지부에 도움을 청하고 그들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그때까지 적일도가 이곳에 머문다는 보장이 없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준후의 목소리는 대나무처럼 굽혀질 줄 몰랐다.

그 빳빳함을 감지한 청룡단원들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몇몇은 체념한 표정으로 산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황보철.”

준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단주를 불렀다.

“네. 단주님.”

“적일도는 무림맹에 수배를 받는 도망자다. 도망자가 추적자에게 함정을 파놓는다는 게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느냐?”

“악독하고 종잡을 수 없는 놈입니다. 다양한 경우를 계산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입씨름으로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구나. 비켜라.”

준후가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하지만 황보철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준후를 바라보는 황보철의 눈동자가 어쩐지 애처롭고 쓸쓸해 보였다.

황보철은 황보세가 출신의 무인으로 준후와 동갑이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서로 말을 편하게 하며 종종 술잔을 기울이며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다.

사실 준후도 황보철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꼬리를 밟은 적일도를 놓치는 건 더 싫었다.

“못 갑니다. 더 나아가고 싶다면 저를 베고 나아가십시오.”

황보철이 양팔을 활짝 펼친 채 준후의 진로를 막아섰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에 청룡단원들이 소란스럽게 술렁거렸다. 준후와 황보철의 갈등이 파국을 향해 치닫는 순간.

때마침 근처에 있던 올빼미가 구슬프게 울어댔다.

“적일도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단주님 손에 죽겠습니다.”

“비켜라.”

“못 비킵니다.”

준후가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황보철을 피하려고 하자 황보철이 그림자처럼 성가시게 따라붙었다.

준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마에는 지렁이 주름이 생겨났다.

“이런다고 부단주가 나를 막을 수 있을까? 자네와 나의 무공 격차를 벌써 잊었나?”

“남은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 준후야, 나를 봐서 딱 이번 한 번만 마음을 돌려다오.”

황보철의 간절한 목소리에 준후는 화들짝 놀랐다.

황보철이 단원들 앞에서 준후에게 말을 놓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즉 황보철의 부탁은…….

부단주로서의 부탁이 아니라 친구로서의 부탁이었던 것이다.

준후는 잠깐 멈칫했지만 가슴으로 황보철의 팔을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에 서 있던 청룡단원들도 좌우로 벌어져 길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준후는 혼자서 산 정상으로 향했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을 이겨내면서.

* * *

‘내가 어리석었지……. 그때 조언을 들었어야 했던 건데.’

준후는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며 씁쓸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론부터 말해서.

정보원이 건네 준 정보는 덫이 맞았다.

정보원은 적일도와 내통하고 있었으며 적일도는 준후와 청룡단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준후가 비록 혼자서 적일도를 상대하겠다고 했지만 청룡단원들은 금방 준후의 뒤를 따랐다.

단주인 준후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신뢰의 대가로 그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잠적해 있던 적일도.

그리고 그가 키운 마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적일도는 왜 함정을 파놓았는가.

적일도와 생사결전을 벌이면서 준후는 숨겨진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네가 아직도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넌 살아남은 게 아니라 내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다.

-뭐라고?

-네가 네 아비를 부둥켜안고 꼴사납게 우는 꼴을, 그날 내가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대체 왜…….

-바보 같은 질문이군. 당연히 재미있어서잖아. 난 이날을 오래도록 기다려왔지. 먼 훗날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온 너를 내 손으로 죽인다면 그만큼 짜릿한 일이 또 있을까? 크크큭.

그러니까 적일도는 준후를 키워서 먹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제 꾀에 넘어가 준후와 양패구상하고 말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준후의 판단은 짧았고 어리석었다.

복수라는 괴물에 잡아먹혀 동료들의 소중한 목숨마저 잃게 만드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그때의 실수는 지울 수 없는 흉터로 준후의 가슴에 남았다.

준후가 위기일수록 더 냉철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 흉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마음에 흉터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뼈아픈 추억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비행기는 어느새 클리블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사람들이 짐을 챙겨 비행기를 떠나기 시작했다.

주저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거야.

그들에게 속죄하는 길은 그것뿐이니까.

괴로웠던 추억을 기내에 두고 준후는 인파를 따라 입구 게이트로 향했다.

“닥터 서, 바쁩니까?”

덩치 큰 사내가 준후 곁에 서서 말을 걸었다.

그 주인공은 당뇨병성 저혈당과 기립성 저혈압으로 쓰러졌던 리차드였다.

리차드와는 한 시간 전쯤에 간단한 통성명을 나눴다.

리차드가 준후 자리로 와서 응급처치에 대해 감사 인사를 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나중에는 안 괜찮다는 소리예요?”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건 조금 아쉽군요. 감사 인사만 하고 보내긴 아쉬워서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했는데.”

리차드의 목소리에 섭섭하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너무 부담스러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당연한 일만 일어나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겠습니까?”

리차드가 피식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펼치고서 지갑 안에 들어 있던 명함 한 장을 준후에게 내밀었다.

명함을 확인하는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첩을 보고 글을 잘 쓴다 싶었는데 설마 이런 직업을 가졌을 줄이야.

“클리블랜드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닥터 서.”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리차드가 환대를 해주고 준후와 멀어졌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되찾은 수화물 검사를 받고서 준후는 곧장 입국장 게이트를 향해 나아갔다.

위이이잉.

게이트가 자동으로 열렸다.

* * *

위이이잉.

공항 자동문이 느릿느릿하게 열렸다가 닫혔다. 자동문을 빠져 나온 준후의 곁에는 어느새 금발의 장신 여성이 서 있었다.

“닥터 서는 미국에 온 적이 있나요?”

“아뇨. 처음입니다. 아예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어요.”

준후가 신기하다는 듯 인근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외국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외국인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피부색이 제각각이었다.

공항 차도에 뱀처럼 길게 택시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건너편 차도에는 막 셔틀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먹구름이 껴서 우중충했다.

날씨는 꽤 추운 편이었다.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날카로웠다.

“클라라는 혹시 한국에 와 본 적이 있나요?”

준후가 금발 여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성의 이름은 클라라였다.

메이유 클리닉 소속 외과의이자 스승 재현과 아는 사이며, 준후의 입국 절차를 도왔고, 또 앞으로 준후가 당분간 신세를 져야 할 은인이기도 했다.

외국 사람이라 외모로 나이를 판단하기 어려웠고 나이를 따로 묻지도 않았다.

한국에서처럼 나이를 묻는 건 실례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딱 한 번 가 봤어요. 삼겹살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네요.”

“삼겹살 맛있죠.”

“그나저나 닥터 서는 영어가 유창한데요? 평소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나 봐요?”

클라라가 의외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클라라의 호수처럼 맑고 파란 눈동자에 준후의 모습이 다 비치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거든요.”

“영어를 잘하는 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동양 의사들이 미국에 적응을 잘 못하는 건 대부분 회화 문제 때문이거든요.”

준후도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의학 용어는 공통일지라도.

차트를 읽고 쓰는 건 문제가 없을 지라도.

일상에서 말이 안 통하면 의사노릇을 할 수가 없었다.

의사는 환자나 보호자, 나아가서 다른 스태프들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했다.

준후는 클라라와 공영 주차장으로 이동해 클라라의 차를 타고 도심으로 향했다.

“오늘은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가 될 겁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거든요. 우선 사회 보장 번호를 받아야지, 통장도 개설해야지, 휴대폰도 개통해야지. 아, 운전면허증은 여기서 취득할 건가요?”

“그건 걱정 없습니다. 한국에서 국제 면허증을 받아왔거든요.”

준후는 지갑에서 국제 면허증을 꺼내 허공에 흔들었다.

“준비성이 철저해서 좋네요. 역시 닥터 박의 지인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네요.”

클라라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준후는 차창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국과는 달리 도로 옆은 넓고 황량한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타지에 왔다는 사실이 새삼 피부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준후가 물었다.

“클라라.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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