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제66장 적응(1)
낯선 타지, 미국에 와서야 준후는 오히려 한국의 드높아진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놀라움의 시작은 도로에서 비롯되었다.
도로를 달리는데 익숙한 로고를 단 자동차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현대 차였다.
미국에서 현대 차의 판매율이 높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현지에서 조국의 차를 보니 반가우면서도 신기했다.
도심 중심가로 들어서자 몇몇 매장에서 방탄 소년단의 신나는 음악이 들려오기도 했다.
준후가 사회 보장 번호를 받기 위해 social security 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준후가 한국인임을 알게 된 직원이 본인은 한국 여행을 여러 번 갔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았다.
준후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국뽕인가 싶었다.
클라라의 차를 타고 이동하며 잡일을 보는 동안.
준후는 클라라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화제를 꼽으라면 단연 메이유 클리닉과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었다.
현직 메이유 소속 외과의답게 클라라는 메이유 클리닉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이 세계 최고의 병원에서 수련하고, 가르치고, 환자를 돌본다는 사실을 자긍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기분을 준후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후도 무림맹 소속이 되었을 때 기라성 같은 정파 무림의 중심축이 되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었다.
“클라라는 어떤 과목이 전공인가요?”
“저요? 전 소화기 외과예요. 세부 전공은 간, 담낭, 췌장 분야고요.”
“그럼 휘플 수술도 해보셨나요?”
준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휘플 수술은 소화기 외과 수술의 꽃이라고 불리는 수술이었다.
환자 케이스에 따라 다르지만 위, 췌장, 담도, 대장 등의 부위를 각각 절제하고 또 문합해 주어야 했다.
소화기 외과 수술의 종합세트랄까.
“당연하죠. 휘플 수술이 제 전문이거든요. 닥터 서가 소화기 외과 전공을 택했다면 내가 잘 봐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
“저 머저리 같은 새끼. 운전을 개한테 배웠나. 방향 지시등도 안 켜고 차선에 끼어드네.”
지금까지 사근사근하던, 클라라의 목소리가 한순간 걸죽해졌다.
본인도 본인이 한 말에 놀랐는지 클라라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곤 호호 웃으며 준후의 반응을 곁눈질했다.
“방금 한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준후가 눈치 있게 클라라의 말을 받아주었다.
외과의를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보통 외과의는 내과의보다 성격이 화끈하고 직설적인 부류가 많았다.
“소화기 외과도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진행하죠?”
“물론이에요. 외과 계열은 올해부터 전부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운용하기로 계획되어 있어요.”
“지원자는 어떻게 선발하나요?”
준후는 한국에 있었을 때부터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누구나 세계 최고로 꼽는 메이유 클리닉.
그들은 과연 신규 프로그램 지원자를 어떤 방식으로 골라낼 것인가.
준후의 시선이 한동안 클라라의 입술에 고정되었다.
클라라는 설명에 앞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시험 방식을 유출해 달라는 건가요? 그건 좀 곤란한데요.”
“대략적으로는 말씀해 주실 수 있지 않나요? 면접이 있다거나 실기가 있다거나.”
“방금 말한 대로 면접도 있고 실기도 있어요. 근데 실기가 만만치 않을 거예요.”
차가 신호에 잡혔을 때 클라라가 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클라라의 목소리는 경고를 하는 것 같기도 했고 겁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신경외과는 더더욱.”
“신경외과만 유독 시험이 어려운 이유가 있나요?”
“아주 간단한 이유가 있죠. 지원자가 가장 많으니까요. 시험에 분별력이 있으려면 아무래도 시험이 어려워야겠죠?”
어려운 실기 시험이라…….
준후는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테스트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차서 뿌옇게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예요? 다른 병원에 들어갈 건가요?”
“아뇨.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요?”
“네? 그 정도는 미리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요?”
클라라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어떻게 보면 한심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녀의 이마에 어느새 주름이 잡혀 있었다.
“영어로 소통이 자유롭고 실력도 좋은데 제가 왜 떨어지죠?”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지원자 중에 얼간이는 없어요. 자신감은 좋지만 자만은 금물이에요.”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저 지금 엄청 겸손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준후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무공과 내공으로 무장한 것도 모자라서.
준후는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의학 지식을 쌓아 왔으며 다양한 수술을 실전으로 또 상상 수련으로 단련해 왔다.
그런 준후가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서 탈락한다?
이는 하늘이 두 쪽 나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정 못 믿겠으면 내기라도 하실래요?”
준후가 먼저 클라라를 도발했다.
* * *
잡무를 한꺼번에 마치고.
이른 식사까지 하고 나니 밤하늘이 캄캄해졌다.
클라라의 자동차는 중심지와 하렘가의 경계에 있는 한 주택가에 멈춰 섰다.
해가 진 지 얼마 안 됐음에도 주택가는 으쓱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깜빡- 깜빡-
일부 가로등은 위태롭게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흑인 몇몇이 자동차 쪽을 힐끔거렸다.
“저기 5층 빌라 보이죠? 501호실이 닥터 서가 지낼 곳이에요.”
클라라가 방 열쇠를 건네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은 집을 찾아봤는데 마땅한 곳이 없더라고요. 금전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열흘만 지내면 되는데요. 시험에 통과하면 기숙사를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맞죠?”
“물론이에요. 그리고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요…….”
클라라가 슬쩍 턱짓으로 흑인 무리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준후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흑인들을 향했다.
“웬만하면 여기 사람들하고 시비는 붙지 마세요. 한국하고는 전혀 다른 살벌한 동네에요.”
“…….”
“총은 기본이고 마약을 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미 각오를 했겠지만 인종 차별도 있을 거고요.”
“…….”
“테스트 합격하고 기숙사 들어갈 때까지는 집에만 있는 것도 추천 드려요. 무슨 뜻인지 알죠?”
“충분히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클라라. 신경 써 준 덕분에 일 처리가 빨랐네요.”
준후의 감사 인사에 클라라가 찡긋 윙크를 날렸다.
원래 성격이 쾌활한 건지…….
준후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건지 파악하기 힘든 미묘한 느낌의 윙크였다.
부르르릉.
멀어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준후는 앞으로 머물게 될 빌라를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배관이 녹슨 허름한 빌라였지만 별 다른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캐리어를 끌고 준후는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없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준후는 캐리어를 한손으로 번쩍 들고 층계를 올라 501호실 앞에 섰다.
딸칵!
열쇠로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혼자 살기에는 넓은 집이었다.
방은 2칸이었고 거실과 화장실, 부엌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벽지가 누렇고 어디선가 곰팡이 낀 퀘퀘한 냄새가 난다는 것만 제외하면 흠잡을 곳이 없었다.
바쁘게 짐을 풀고서 준후는 가부좌를 튼 채 심법 수련을 시작했다.
부스트 업 시험 전까지 마나 하트를 5겹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 * *
준후의 일상은 평화, 그 자체였다.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지 않다 보니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준후는 내공을 쌓는 데 보냈다.
눈을 감고 ‘내공 시신경 자극술’을 사용해 상상 수련을 하는 데 보냈다.
최근에는 상상이 정교해져서 수술 중 다양한 변주를 주기도 했다.
갑자기 CPR을 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거나, 느닷없이 뇌혈관이 터진다거나, 가상의 스태프가 황당한 실수를 저지른다거나 등등.
현실과 똑같은 상상 속에서.
준후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지구상에서 오로지 준후만 가능한 수련법이었다.
안에만 있는 것이 답답해서 준후는 가끔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준후가 산책만 하면 사방에서 눈초리가 쏟아졌다. 인근 주민들은 꼭 준후를 동물원 동물 보듯이 했다.
새롭게 등장한 동양인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가족과 아영에게는 꾸준히 연락을 했다.
최소한 이틀에 한 번은 했다.
떠난 자와 남겨진 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가슴 아픈지 준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림에서도.
현대에서도.
숱한 사람과 길고 짧은 이별을 해왔으니까.
도중에 비행기에서 응급처치를 해주었던 리차드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명함에 적혀 있던 대로.
리차드는 클리블랜드에서 잘 나가는 지역 기자였다.
식사 자리에서 그는 자랑스럽게 준후에게 신문을 건넸다.
그날 지역 신문 2면에는 준후의 사진과 함께 준후의 응급처치에 대한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지면에 어지간히 힘을 준 모양이었다.
공항에서 연락처를 주고받을 때.
잠깐 사진을 찍자고 해서 의아했는데 이런 속셈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생명의 은인을 돕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 리차드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준후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처음 사귄 친구가 든든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대망의 부스트 업 프로그램 전날 밤이 찾아왔다.
준후는 후끈하게 달아오른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서 계속 거리를 걸었다.
방금까지 뉴튜브 촬영을 했다.
미국에 왔다고 해서 뉴튜브 촬영에 소홀할 수는 없었다.
뉴튜브가 커지고.
뉴튜브 수익이 늘어나야.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환자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늘어난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의사 생활’이라는 테마로 동영상을 찍어 담당자에게 넘기고 있었다.
반응이 꽤 뜨거웠다.
지금까지 총 3편을 올렸는데 평균 조회수가 40만에 육박했다.
-선생님. 그냥 앞으로 미국에 눌러 사실래요? 조회수가 너무 달달한데요? ㅋㅋㅋㅋ
얼마 전 연락을 주고받은 담당자는 그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준후는 큰 길을 따라 걷다가 건물 사이에 난 비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뒤를 돌아보았다.
“미행은 이쯤 하시지?”
준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까칠했다.
준후의 두 눈은 골목 한 편에 놓인 초록색 거대한 쓰레기통을 노려보고 있었다.
휘이이잉.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준후의 앞머리가 흩날렸다.
골목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쓰레기들이 바람에 날아가거나 쓰러졌다. 골목에 드리운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뭐야? 어떻게 눈치챘지? 분명 감촉같이 따라붙었는데?”
“멍청아. 그러게 내가 그 병신 같은 부츠 신지 말라고 했잖아.”
쓰레기통 뒤에서 희미한 대화가 들려왔다.
준후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잠시 후 두 명의 흑인이 준후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가왔다.
준후와 적당한 거리를 벌리고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질겅질겅 껌을 씹어 댔다.
강도인가?
총을 가지고 있나?
준후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흑인들을 경계했다.
하필이면 부스트 업 프로그램 테스트가 내일이었다. 곤란한 일에 휘말리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하지만 키 큰 흑인이 꺼낸 첫 마디는 의외였다.
“이봐. 너 의사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