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제66장 적응(2)
키 큰 흑인이 던진 질문에 준후는 눈을 치켜떴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준후의 직업을 어떻게 알았을까.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혹시 저 사람이 자신의 방에 도청기를 숨긴 건 아닌지 싶은 황당한 망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놀란 것은 찰나뿐.
준후는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려 전신으로 분출했다.
무형의 기운에 압박감을 느꼈는지 흑인들은 불편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미행을 한 것도 모자라 남의 사생활까지 캐고 다닌다라…… 너희들 대체 정체가 뭐지?”
“…….”
“제대로 된 설명이 없으면 이 골목에서 무사히 나가지 못할 거야.”
“워- 워- 친구 진정하라고.”
“네가 내 처지라면 진정하겠나?”
“기분이 나쁜 건 이해하는데 우리 이야기도 들어볼 순 있잖아?”
키 큰 흑인은 자신을 말릭, 옆에 있는 흑인을 자말이라고 소개했다.
솔직히 두 사람의 이름에는 별관 관심이 없었다.
준후의 관심사는 오로지 총이었다.
둘이 언제 총을 꺼낼지 몰랐기에.
그들의 팔을 주목하고 언제든지 보법으로 튀어 나갈 준비를 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오해를 풀어보자고. 첫째 우린 너를 미행하고 있었던 게 아니야.”
“스토킹 하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말하지.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어디서 조잡한 변명을.”
“널 미행해서 우리가 얻는 이득이 뭐지?”
“돈.”
“우리가 가난하긴 하지만 강도짓 따위는 안 해. 나랑 동생의 철칙이야.”
대답하는 말릭의 눈동자가 소처럼 순박했다. 말투에는 희미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원래 성격이 솔직한 건지 아니면 타고난 거짓말쟁이인지 준후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럼 왜 내 뒤를 밟았지?”
“네가 의사니까 아는 사람의 치료를 부탁하려고. 솔직히 이렇게 말다툼 할 시간도 아까워.”
“…….”
“우린 당장 네 도움이 필요해.”
“형. 이 녀석 좋은 말로 해서는 안 통한다니까.”
잠자코 있던 자말이 언성을 높였다. 그는 말릭과 의견이 다른 듯했다.
“처음 보는 하렘가 흑인을 왜 공짜로 치료해 주겠어? 의사 놈들은 돈 밖에 모른다고.”
“…….”
“힘으로 끌고 가서 억지로 치료를 시켜야 해.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이러다간 마이클이 죽어버려.”
형제의 다툼을 준후는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의심의 여지도 없는 강도라고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두 사람에게는 뭔가 다급한 사연과 사정이 숨어 있는 듯했다.
“시궁창 밑바닥에 살더라도 긍지는 잃지 말자. 폭력은 안 돼.”
“나라고 폭력이 좋은 줄 알아?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이러지.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이 거지 같은 세상이라고.”
“이봐. 너희들끼리 싸울 거면 난 간다?”
준후가 모처럼 대화에 껴들었다.
엄지로 어깨 뒤로 뻗은 골목을 가리켰다.
이에 형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준후를 쳐다보았다.
낭패라는 표정이었다.
“친구, 매정하게 그냥 가지 마. 우릴 도와달라고.”
“도움이 필요하면 내 질문에 대답부터 똑바로 해. 내가 의사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지나가다가 전화 통화하는 걸 들었어. 메이유 클리닉 이야기를 하길래 의사인 줄 알았지.”
말릭의 해명에 준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근 며칠 산책하는 동안 클라라와 종종 통화를 나눴다.
통화를 할 때 주변에 있었다면 준후가 의사라고 유추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준후가 주택가에 몇 안 되는 동양인이고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준후의 통화 내용에 호기심이 생겼다는 것도 충분한 개연성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호기심이 해결되자 또 다른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형제가 대화 도중 언급한 마이클은 누구이고.
그는 왜 죽어갈까.
어쩌면 마이클은 가상의 인물이고.
이 모든 것은 준후를 납치하기 위해 형제가 꾸민 계략 같은 것은 아닐까.
질문이 질문의 꼬리를 물었다.
타다다닥.
그 순간 말릭이 준후에게 달려오면서 준후의 생각은 멈췄다.
준후는 기감을 곤두세워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위협에 대비했다.
저기 뒤에 뚱한 표정으로 있는 서 있는 자말도 놓치지 않고 경계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말릭이 덥석 준후의 손목을 붙잡았다.
“친한 친구가 총에 맞았어. 이대로라면 죽어버릴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해.”
* * *
준후와 자말과 말릭이 나란히 서서 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밥의 총기상이라는 상점이었다.
출입문 상단에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곳에 적힌 ‘Bob’이라는 글자에 알파벳 o가 사격 조준점 모양을 띠고 있었다.
가게의 투명한 유리창에는 자동권총이 30퍼센트 세일 중이라는 살벌한 광고지가 붙어 있었다.
“마이클이라는 친구가 여기 있어?”
“그래. 지하 창고에.”
말릭이 입에 가져간 손톱을 연신 물어뜯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치며 딱딱 소리가 났다.
“친구가 다쳤으면 바로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알지도 못하는 의사에게 치료를 부탁하지?”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넌 아직 이 땅을 하나도 모르는 구나?”
자말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보험이 없으면 감기 치료를 받는 데만 150-200달러가 들어. 근데 총상으로 수술을 받는다?”
“…….”
“그 수술비를 갚으려면 이번 생도 모자라서 다음 인생까지 바쳐야 할걸?”
“…….”
“아니, 애초에 보험이 없으면 병원은 환자를 받으려고도 안 해. 치료를 한다고 해도 돈을 떼어먹힐 가능성이 높으니까.”
자말이 전해준 미국의 의료 현실에 준후는 허탈하게 웃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미국의 의료제도가 가난한 자들에게 생지옥이라는 것을.
감기에만 150달러(대략 20만 원)를 지불해야 한다면 아마 총상 수술에는 10억 정도를 지불해야 하지 않을까.
[당장 죽을 것처럼 아파도 돈 문제로 치료를 받을 수 없다.]
그 가혹한 현실을 새삼 깨닫자 준후는 미국이라는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위험천만한 모험처럼 느껴졌다.
질병과 외상은 언제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었고.
거기서 예외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럼 빨리 가지.”
준후가 오히려 말릭의 등을 치며 말릭을 재촉했다.
말릭이 떠밀리듯이 앞장섰고 그 뒤를 준후와 자말이 따랐다.
딸랑!
출입문이 열리면서 도어벨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출입구 좌측에 있는 진열장에 서 있던 배가 남산만 한 흑인 남성이 일행을 쳐다보았다.
“뭐야? 맥스는 어디다 팔아먹고 처음 보는 동양인을 데려왔어?”
“맥스는 출장 갔대.”
말릭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근데 이 친구가 정말 마이클을 치료할 수 있겠어? 생긴 게 영 믿음이 안 가는데?”
상점 주인이 팔짱을 낀 채 준후를 위아래로 훑더니 얼굴을 구겼다.
“이 친구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야. 벌써부터 기죽이지 마.”
“알았어. 알았다고. 이봐 친구. 어디서 왔지?”
“노스 코리아.”
상점 주인의 태도가 불량해서 준후가 살짝 장난을 쳤다.
장난이 먹혔을까.
상점 주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준후를 특공 부대원 같은 걸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가게 정면에 있는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좁고 어두운 지하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이 나무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삐걱삐걱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준후에게 처음 보는 흑인을 치료할 의무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모른 척하고 갈 길을 가는 게 정상적인 판단이었다.
심지어 내일 부스트 업 프로그램 테스트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준후는 참새가 방앗간을 모른 척 지나갈 수 없는 것처럼 환자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
병원 안에 있든.
병원 바깥에 있든 환자는 환자가 아닌가.
환자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고, 환자를 소중히 생각하는 보호자와 지인들의 고통도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미국 의료 체계의 현실을 깨닫고 나니 연민은 더욱 깊어졌다.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돈이 없어서 죽어야 한다니.
그런 삶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끼이이익.
먼저 계단을 다 내려간 말릭이 철문을 열었다.
준후는 열린 문을 통과해 낯선 공간에 발을 디뎠다.
그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신세계였다.
숨을 들이마시자 독한 알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정면에는 수술대 같은 것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환자가 누워 있었다.
이곳은 간이 수술실과 같았다.
좌측 약장 안에 있는 약통에는 수기로 약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옆에 수납장에는 바드(수술 도구를 담는 통)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드르르륵.
준후가 수납장으로 이동해 수납장 서랍을 열었다.
붕대, 거즈, 커튼 볼, 블레이드 등등.
다양한 소모품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냉장고를 확인해 보니 혈액형 별로 정리된 혈액팩도 보관 중이었다.
환자 감시 장치가 없을 뿐 썩션이나 소작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기계 장비 또한 갖추고 있었다.
총기상 지하 창고에 이런 의료 환경이 갖춰져 있을 거라고 준후는 상상도 못 했다.
“많이 놀랐나 보군.”
방을 신기해하는 준후를 보고 자말이 피식 웃었다.
“놀랄 수밖에…… 개인이 이런 환경을 갖추기가 쉽지 않은데. 이곳이 맥스라는 의사에 아지트인가?”
준후가 주변을 매의 눈으로 살피며 물었다.
준후는 벌써부터 수술에 필요한 도구가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암기하고 있었다.
“눈치도 빠르네. 맞아, 맥스는 하렘가 의사야. 마약을 취급하다가 면허를 박탈당했지만 그래도 엄연한 의사는 의사지.”
“그러니까 내가 맥스라는 사람의 대타라는 건가?”
자말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으…….”
신음이 들리는 쪽으로 준후는 고개를 돌렸다.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가 파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준후가 황급히 수술대로 이동해 환자 곁에 섰다.
그 양옆을 자말과 말릭이 보디가드처럼 지키고 섰다.
“…….”
환자를 내려다보는 준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환자의 왼쪽 어깨에 붕대가 둘둘 감겨져 있었는데 붕대가 벌써 피 투성이었다.
축축하고 빨갛게 젖은 붕대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다행히 복부나 가슴, 머리 같은 급소는 피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출혈량이 극심한 걸 보면 쇄골하동맥에 손상이 있는 듯 했다.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과다 출혈로 사망할 위험이 존재했다.
환자의 얼굴은 벌써부터 핏기 없이 하얬으며 고산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호흡이 가빴다.
총상이 출혈성 쇼크로 넘어가는 단계로 보였다.
“참고로 말해두겠는데 마이클도 나쁜 녀석이 아니야. 하렘가 갱단이 총질하는 곳에 서 있다가 우연히 총에 맞았을 뿐이야. 개새끼들, 쏘려면 자기들 대가리나 쏠 것이지.”
말릭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후는 당장 시급한 응급처치에 나섰다.
팟! 팟! 팟! 팟!
준후의 손가락이 번개처럼 환자의 어깨 주변을 짚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말과 말릭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이봐. 뭐하는 거야? 다친 어깨를 손가락으로 찔러서 뭘 어쩌자고?”
“형. 내가 말했잖아. 이 인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고.”
“욕을 할 거면 상처나 제대로 확인하고 욕을 하지 그래?”
준후가 담담하게 검지로 환자의 어깨를 가리켰다.
형제는 마이클의 어깨를 살피더니 다시 한번 기겁했다.
붕대의 중심부에서 바깥으로 퍼져 나가던 피가 느닷없이 전진을 멈췄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자말이 놀란 부엉이 눈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준후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간단하게 오리엔탈 큐어라고만 알아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