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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45화 (342/424)

345화

제66장 적응(5)

어두컴컴했던 방에 동녘이 차오르고 있었다.

방바닥쯤에서 찰랑거리던 오렌지 빛 햇살은 이윽고 개울물처럼 불어나 방 한 쪽 벽면을 완전히 잡아먹었다.

창가 아래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준후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햇살에 물든 벽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30분 정도 가볍게 운기조식을 할 계획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낯선 타지에 와서 그런지 아니면 온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그런지.

요즘 준후는 운기조식이나 심법 수련을 시작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극단적으로 낮과 밤이 바뀐 적도 종종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후는 창문을 열고 아침 햇살과 아침 바람을 동시에 맞이했다.

다소 무리한 감이 있었지만.

목표를 달성해내고야 말았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 테스트 전까지 5겹의 마나 하트를 만들기로 스스로에게 한 목표를.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마나의 띠에서 강한 울림이 느껴졌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지는 몰랐다.

하지만 최소한 내공이 부족해서 곤란에 처하거나 환자를 구하지 못할 일은 없을 듯했다.

준후는 그거면 족했다.

창문을 닫고 준후는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물줄기를 맞으면서 어제 있었던 에피소드를 다시 생각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총상 환자 수술. 미국 하층민들의 터무니없이 열약한 의료 환경 등등.

경험을 하고서 깨닫는 것이 많았다.

환자가 또는 병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축복이자 선물일지 모른다고.

준후가 모르는 세상에는 병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채 아파하거나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것도.

그래서일까.

난생 처음 ‘의료 봉사’라는 것을 준후는 고민해 보았다.

분쟁 지역.

전쟁 지역.

난민촌 등을 찾아가 그들의 괴로운 육신을 달래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실제로 준후의 능력은 의료 환경이 열약하면 열악할수록 돋보일 수 있었다.

엑스레이?

CT?

MRI?

초음파 검사?

이런 고가의 장비 없이 준후는 내공으로 각종 검사를 혼자 실시할 수 있었다.

준후야말로 걸어 다니는 최상급 검사 장치였다.

또한 내공은 환자의 치유력을 돕는 수액의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무공으로 다져놓은 피지컬은 환자를 직접적으로 치료하는 데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언젠가 될지 모르겠지만…….

의료 봉사에 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어.

아픈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찾아갈 필요도 있잖아?

물줄기가 그쳤을 때 준후의 생각도 그쳤다.

타월로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준후는 방으로 돌아가 옷을 입었다.

검은색 면바지에, 하얀 와이셔츠.

그 위로 두툼한 패딩 점퍼를 걸쳤다. 시험 복장은 자유라고 들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단정해 보였다.

[오늘 메이유 클리닉 시험 보는 날이지? 솔직히 시험에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노파심에 한마디만 할게. 만약에 출근하다가 환자를 마주치면 웬만해서는 911에 신고만 하고 갈 길 가. 환자만큼 네 꿈도 소중하니까.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시간 될 때 연락해. 사랑해.]

휴대폰을 확인하고 준후는 피식 웃었다.

아영이 장문의 당부 문자를 보냈다.

준후에게 아영은 애정 충전소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아영을 통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부모님을 제외하면 말이다.

준후도 장문의 안부 문자를 보내고 집을 나섰다.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보도로 걸었다.

걷던 도중 준후는 지갑을 꺼내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쳐다보았다.

준후 손에 달린 지폐는 평범한 지폐가 아니었다.

네잎 클로버와 비슷한 느낌으로.

미국인들이 행운의 상징으로 여기는 2달러짜리 지폐였다.

어제 말릭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이걸 나한테 줘도 돼? 그럼 네 행운이 다 나한테 오는 거 아니야?

-넌 내 행운을 받을 자격이 있어. 소중한 친구의 목숨을 구해줬으니까. 물론 실제적인 가치는 없겠지만…….

말릭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너의 앞길을 축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지도 몰라.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땐 그걸 보고 힘내라고. 뭐, 혹시 시간되면 여기 와서 환자도 좀 봐주고.

말릭이 이를 드러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준후는 지폐를 도로 지갑에 넣고 계속 걸었다.

성호 형의 유품인 팔찌.

말릭이 선물로 준 2달러 지폐.

무려 두 사람이나 자신을 돌봐주고 있다는 사실에 준후는 든든함을 느꼈다.

분명 오늘 시험도 문제없을 것이다.

* * *

메이유 클리닉 입구에 멈춰 선 한 청년이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 스태프들이 걸음을 재촉하기 바쁜 와중에 청년의 두 다리는 땅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청년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메이유 클리닉의 전경을 살폈다.

고급 호텔처럼 멋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본관.

그 주변을 둘러싼 크고 낮은 별관들.

본관과 별관을 이어주는 스카이 브릿지.

메이유 클리닉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료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 듯 했다.

병원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압도되었던 청년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청년은 바로 준후였다.

준후는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처럼 주변을 훑으며 걸었다.

실제로 보니 모든 게 신기하긴 했다.

‘그러고 보니 무림맹에 처음 왔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지.’

무림에서의 비슷한 기억을 떠올리며 준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병원부지가 워낙 넓어 준후는 면접장에 도착하는 데 무려 20분이 걸렸다.

면접장은 병원 건물이 아닌 병원에서 한참 떨어진 의대 건물의 B동 별관에서 이루어졌다.

5층은 벌써 시험 지원자로 발 디들 틈이 없었다.

일찍 온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챙겨온 의료 서적을 보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복도나 엘리베이터 앞에 한 자리씩 차지한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책을 봤다.

준후가 전해들은 바로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지원자는 대략 200여 명이고 전부 신경외과 지원자였다.

또한 이중에서 단 7명만이 합격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아니. 한 자리는 이미 정해졌으니 6명이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준후의 눈길이 손목시계로 향했다.

현재 시간은 오전 8시 30분.

잠시 후 베일에 감춰졌던 부스트 업 시험에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심장.

하지만 그 두근거림은 긴장이나 불안이 아닌 기대와 흥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준후가 자판기 음료가 있는 쪽으로 향하는데 먼저 음료를 뽑고 있었던 한 무리가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초면인데도 준후를 향한 눈길이 곱지 않았다.

“뭐야? 너 같은 것도 시험을 치러 왔냐?”

키가 훤칠하고 금발이 곱슬거리는 청년이 준후에게 시비조로 물었다.

지원자 목걸이를 보니 이름이 레이먼드였다.

레이먼드가 시비를 걸자 같이 있는 패거리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킬킬 거리기 바빴다.

“야,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대답을. 혹시 귀머거리냐?”

“어디서 개가 짖지?”

준후는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녀석들을 무시했다.

이에 레이먼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준후의 앞을 가로막았다.

준후가 옆으로 비켜 가려고 하자 또 앞을 가로 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충돌했다.

“방금 개라고 했냐? 다시 말해봐. 이 원숭이 새끼야.”

레이먼드가 양 손을 눈가에 가져간 뒤 눈가를 좌우로 길게 찢었다.

처음 시비를 걸 때부터 알아봤다.

레이먼드와 일행들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너 제스쳐가 조금, 아니, 많이 잘못됐다?”

“무슨 의미지?”

“눈은 내가 너보다 훨씬 커. 그러니까 그 제스쳐는 내가 해야 한다고.”

준후는 레이먼드가 했던 제스쳐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는지 레이먼드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레이먼드 뒤에 있던 무리들도 당장 준후에게 덤벼들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드러냈다.

시비가 붙은 걸 감지한 지원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또한 사방에서 준후 쪽으로 몰려들었다.

“꼴깝 떨지 마, 원숭아. 네가 있을 곳은 메이유가 아니라 동물원이라고.”

레이먼드의 거듭되는 폭언에 준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에 새긴 참을 인자가 벌써 세 개를 넘겼다.

“뭐야? 그렇게 노려보면 어떻게 할 건데? 날 한 대 치기라도 할 거야? 그 솜주먹으로?”

레이먼드가 주제도 모르고 계속 깐족거렸다.

“그만 까불어. 머저리 같은 놈아. 오늘 시험 무사히 치르고 싶으면.”

“이 새끼, 내가 입만 놀리니까 만만해 보이지? 시험 전에 정신 번쩍 들게 만들어줄게.”

준후가 고분고분하게 나오지 않자 화가 났던 걸까.

레이먼드가 다짜고짜 준후를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뺨을 후려치려고 한 것이다.

턱!

그러나 준후는 레이먼드의 손목을 중간에 금나수로 낚아챘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레이먼드가 새된 신음을 지르며 통증을 호소했다.

“아! 아! 이거 안 놔? 원숭이 새끼야?!”

그러거나 말거나.

준후는 레이먼드의 손목을 가볍게 자신 쪽으로 당겼다.

레이먼드의 몸이 속절없이 준후 쪽으로 기울었다.

바로 그때!

팟! 팟!

준후의 왼손 검지가 번개처럼 움직여 레이먼드의 양쪽 경동맥 인근을 점했다.

귀신같은 손놀림이라서 누구도 준후의 수법을 알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손목이 붙들린 채 고통 받고 있었기에 레이먼드 본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기, 무슨 일이에요?”

때마침 감독관이 준후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레이먼드의 앓는 소리를 듣고 온 듯했다.

“이 친구가 인종차별 발언을 해서 시비가 붙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지원자들도 다 들었습니다.”

준후가 구경 중이던 지원자들을 훑으며 말했다.

지원자들 몇 명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눈을 찢는 제스쳐를 하고 뺨을 때리려고도 했어요.”

“심지어 옐로우 몽키라는 말도 했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준후의 편을 들기도 했다.

정의는 아직 살아 있었다.

“레이먼드, 방금 제가 들은 말이 전부 사실인가요?”

감독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레이먼드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레이먼드는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릴 뿐, 뭐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북처럼 두들겨 댔다.

“지금 뭐라고 하는 겁니까? 설마 나랑도 장난치는 거예요?”

“…….”

급기야 레이먼드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야, 레이먼드. 설명은 제대로 해야지. 이러다가 너 시험도 못 치겠다.”

“감독관까지 왔는데 뭐 해. 빨리 사과해.”

레이먼드 뒤에서 멀뚱거리던 일행들도 레이먼드에게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이먼드는 여전히 말을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입술은 오물오물 움직이는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상하게 목소리가 안 나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레이먼드는 급기야 휴대폰 메모장에 타이핑을 해서 말을 대신했다.

이에 감독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지원자들이나 레이먼드 일행도 반응은 비슷했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방금 전까지 각종 저질적인 말들을 쏟아냈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못한다니.

“레이먼드. 메이유 클리닉이 우습게 보입니까? 이렇게 하찮은 방법으로 본인 실수를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요?”

-아니라니까요. 정말 목소리가 안 나와요. 미치겠네, 진짜.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일단 감독관실로 따라와요.”

감독관이 앞장서고 그 뒤를 레이먼드가 따랐다.

한편 준후는 팔짱을 낀 채 작아지는 레이먼드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켰다.

조금 전 레이먼드와 몸 다툼을 벌일 때.

준후는 레이먼드의 아혈을 짚었다.

아혈을 짚으면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도 입이 거치길래 말을 못하도록 특별한 벌을 준 것이다.

점혈의 지속시간은 대략 3시간이고 시험 종료 시간도 대략 3시간이었다.

레이먼드는 시험이 끝날 때까지 말을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시험을 조졌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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