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제67장 메이유 클리닉(1)
“넌 왜 동양인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응? 동양인을 볼 때마다 급발진 하는 액셀 페달이라도 있는 거야?”
감독관 케빈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목소리에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피부가 누런 게 마음에 안 들잖아요.
레이먼드가 휴대폰 메모장에 글을 쳐서 케빈에게 보여주었다.
“그딴 걸 이유라고 대? 피부가 허여멀건 건 괜찮은 거고? 피부색에 우위는 없어.”
케빈이 따끔하게 꾸짖었음에도, 레이먼드는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었다.
레이먼드는 눈을 쳐다보지도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왜 잔소리를 하냐며, 불만 섞인 얼굴로 뚱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 속 터지는 꼴 보기 싫으면 장난은 이제 그만둬. 갑자기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돼?”
-…….
“갑자기 인어왕자라도 됐다는 거야?
-진짜 속 터지는 건 나예요. 장난이 아니라 정말 목소리가 안 나와요. 그렇다고 면접이 코앞인데 병원을 갈 수도 없잖아요.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 면접은 볼 수 있고?”
케빈이 빈정거리며 물었다.
케빈은 메이유 의과 대학에서 이비인후과 레지던트 자격증을 취득한 의사였다.
몇 년 전부터 현장은 완전히 떠난 채 임상 연구에 몰두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케빈이 알기로…….
아니,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이비인후과의가 알기로.
목소리가 갑자기 안 나오는 질환 따위는 없었다.
굳이 꼽자면 실어증(Aphasia) 정도인데…….
실어증에 걸리려면 외상 또는 뇌졸이라는 선행 조건이 발생해야 했다.
-어떻게든 봐야죠. 1년을 통째로 날릴 순 없잖아요.
“똥은 네가 싸고 치우는 건 내가 해라?”
-말을 왜 그렇게 심하게 해요? 학교 선후배가 이래서 좋은 거 아닌가요?
레이먼드가 부탁한다는 듯 애절한 눈빛으로 글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사람이 갑자기 말을 못한다니?
하지만 이쯤 되면 레이먼드가 말을 못한다는 핑계로 일을 축소시키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넌 꼭 네가 불리할 때만 선후배 타령이더라?”
-마음이 옹졸해서 그래요.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선배가 이해해 주세요.
“쓰읍. 일단 교수님들한테 이야기는 해볼게. 면접이 30퍼센트, 실기 비중이 70퍼센트니까 말을 못해도 돌파구는 있을 거야.”
-…….
“그래도 네가 합격한다는 장담은 못 해. 그건 알지?”
-왜 장담을 못 해요? 일단 시험만 치를 수 있으면 합격은 확정인데?
레이먼드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다소 오만한 발언처럼 들렸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메이유 의과대학 수석 입학과 수석 졸업.
그것도 모자라 레지던트 수련 말미에 최우수 레지던트로 선정된 레이먼드다.
이번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서 가장 주목 받고, 가장 활약이 기대되는 인재였다.
동양인만 보면 발작하는 나쁜 버릇을 빼면, 외과의답게 성격도 시원시원한 편이었다.
-그나저나 그 동양인하고 시비 붙었던 건 어떻게 해결해요?
“이제 좀 머리가 차가워졌나 보지?”
-하필 사람이 다 보는 앞에서 일이 커져서…….
“인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잘못했으면 반성부터 해야지!”
-알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아까 보니까 휴대폰으로 영상 찍은 사람도 있던데.
레이먼드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영상이 퍼지면 돌이킬 수 없었다.
레이먼드는 순식간에 인종차별 하는 의사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판이 곤두박질치고.
앞으로의 커리어에 지우기 힘든 오점이 생길 것이다.
그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었다.
“내가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 줄 알았지.”
-뻔한 소리하지 말고 도와주세요. 목소리도 안 나와서 미칠 지경인데 선배까지 이러깁니까?
레이먼드의 글을 읽고서 케빈이 팔짱을 끼었다.
사무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레이먼드는 침묵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제일 좋은 건 시간을 뒤로 돌리는 건데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딱 하나뿐이지.”
케빈이 검지를 치켜들었다.
* * *
“이야. 너 아까 좀 멋있더라. 지켜보는 내가 다 속이 후련했어.”
준후가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막 뽑았을 때였다.
한 동양인이 준후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준후가 고개를 돌려 청년을 응시했다. 훤하게 드러낸 청년의 넓은 이마가 인상적이었다.
응시자 명찰 목걸이를 보니 청년의 이름은 다케다였다.
하지만 준후는 명찰을 보기도 전에 청년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일본인 특유의 영어 발음 때문이었다.
“인종차별이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전하고 비교했을 때니까. 흑인 차별 대신 동양인 차별이 늘었으니까.”
“그러게. 만나서 반갑다. 서준후라고 해.”
“난 다케다. 거꾸로 해도 다케다지.”
다케다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 사람은 내성적이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다케다를 보면 그것도 편견 같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다친 건 그 레이먼드란 녀석이지. 갑자기 말을 못하던데?”
준후가 오리발을 내밀며 말했다.
“이번 사건을 무마하려고 치사한 술수를 쓰는 것 같은데 어림없지.”
말을 마친 다케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검지로 본인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그 녀석 만행이 여기 전부 담겨 있거든.”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 너한테 시비를 걸기 전에 나한테도 시비를 걸었거든. 안 그래도 이를 갈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었지.”
“…….”
“이 영상 올리면 저 자식 엿 좀 먹어야 할걸?”
생각만 해도 기쁘다는 듯 다케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혹시 촬영한 동영상 나한테 공유해 줄 수 있어?”
“굳이 그럴 필요 있나? 내가 SNS에 올린 거 퍼 가면 될 텐데?”
“혹시 까먹을까 봐.”
“뭐, 안 될 건 없지.”
준후는 메일을 통해 다케다에게 해당 영상을 받았다.
나중에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딸칵!
준후는 뚜껑을 젖히고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졸지에 인종차별에 시비가 붙었지만 불쾌함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인종차별을 당할 거라는 건 미국으로 건너올 때부터 각오한 바였다.
그리고 비단 레이먼드뿐 아니라 앞으로 수많은 이들이 준후를 피부색으로 판단하려고 들 것이다.
이 정도 사건에 흔들려서는 곤란했다.
인종차별?
어디 하고 싶으면 정성을 다해서 마음껏 해봐.
내가 다 박살 내줄 테니까.
너희들이 무시하는 내가 메이유의 정점에 올라서 너희들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설 테니까.
준후에게는 내심 그런 생각도 있었다.
모든 일은 결국 돌고 돌아 실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불가능한 서전이 된다면.
‘준후는 차별’이 아니라 ‘특별’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
“…….”
다케다와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고 해도 주변이 너무 고요했다.
면접실에 침묵의 소용돌이가 생겨난 듯했다.
그리고 소용돌이의 중심에 레이먼드가 있었다.
사무실에서 빠져 나온 레이먼드가 응시자들을 홍해처럼 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표정 한번 살벌하네. 너한테 복수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설마 제정신이면 그러겠어? 뭐, 복수를 한다고 하면 나야 더 감사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레이먼드가 준후에게 바짝 접근했다.
당사자는 준후인데 어쩐지 주변 사람이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다리를 떨었고.
누군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누군가는 아까 다케다가 그랬던 것처럼 이쪽을 향해 휴대폰을 겨누고 있었다.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팽팽한 대치 상황.
레이먼드가 대뜸 준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준후가 아닌, 준후 곁에 서 있던 다케다가 겁을 먹고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주먹이 닿는 거리가 아니었을 뿐더러.
레이먼드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을 따름이었다.
-아까는 미안했다. 시험을 앞두고 너무 긴장한 상태였는데 그게 괜히 너한테 불똥이 튄 것 같다. 너를 무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한다.
레이먼드가 공손하게 또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사과하는 매너로 볼 때 흠잡을 곳이 없었다.
준후는 사과를 받지 않고 주변부터 훑었다.
개중에 감독관이 있었다.
감독관 역시 휴대폰으로 사과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거기서 준후는 몇 가지 사실이 짐작됐다.
1) 감독관과 레이먼드는 구면이다.
2) 레이먼드를 구제하기 위해 감독관이 직접 발 벗고 나섰다.
둘 사이의 불쾌한 연결고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이먼드가 영악한 지인을 곁에 두었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인 대처 방법은 공식적인 사과였다.
1 대 1로 사과하면 그 의미가 반감될 수도 있는데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 앞에서 사과하면 그 의미가 증폭된다.
준후 입장에서도 사과를 거절할 명분이 줄어들고 말이다.
심지어 그 영상을 기록으로 남긴다?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는 전형적인 무림 정파 스타일의 정치질이었다.
이걸 반가워해야 하나.
준후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레이먼드는 한 번 굽혔던 허리를 아직도 펴지 않았다.
준후가 사과를 받아줄 때까지.
허리를 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이딴 녀석, 내버려두고 시험 준비나 하자. 미안하다는 말로 죄를 다 덮을 순 없어.”
다케다가 자리를 피하자는 듯 준후의 팔을 끌었다.
하지만 준후는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켰다.
“뭐 해? 가자니까?”
준후는 손을 뻗어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그제야 레이먼드가 허리를 폈다.
레이먼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시비를 걸었던 당시를 감안하면 죄책감 때문에 표정이 구린 건 아닐 것이다.
아마 억지로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못 마땅할 확률이 높았다.
레이먼드 같은 부류를 준후는 무림에서 수 없이 마주쳤다.
“네 사과가 진심이라고 생각은 안 해. 넌 상습범이야. 여기 있는 다케다한테도 시비를 걸었다던데?”
준후의 지적에 레이먼드의 눈이 부엉이 눈처럼 휘둥그레졌다.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이었다.
-그…… 그게……. 그때도 시험 때문에 긴장을…….
“이쯤 되면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수학 공식 같은 거 아닌가? 긴장할 때마다 시비를 거는데 그게 전부 동양인이라니 말이야.”
-그건 오해라고. 여러 인종을 치료해야 하는 의사가 인종 차별 같은 걸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다급해진 레이먼드가 속사포로 휴대폰에 문장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는데 앞으로는 이러지 마라. 그땐 상상도 못 할 재앙이 벌어질 테니까.”
레이먼드가 가짜 사과를 한 것처럼 준후도 가짜 용서를 했다.
왜냐고?
이래야 준후가 대인배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준후가 사파 출신이었다면 레이먼드의 낯짝에 다짜고짜 주먹부터 꽂았을 것이다.
하지만 준후는 정파 출신이었다.
자신의 체면을 높이면서 상대를 말려 죽이는 방법을 알았다.
저벅. 저벅.
준후는 레이먼드를 스쳐 지나가며 레이먼드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럼 시험이나 잘 봐라. 그때까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길 빌어줄 테니까.”
스쳐 가듯 내뱉은 한 마디는 명백한 농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