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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47화 (344/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347화

제67장 메이유 클리닉(2)

오전 10시.

신경외과 부스트 업 프로그램 시험의 닻이 올랐다.

응시자들은 기존에 받은 응시 순서대로 복도에 일자로 늘어섰다.

그 줄은 꼭 놀이공원에서 인기 많은 어트랙션 앞에 선 줄처럼 한 없이 길고 복잡해 보였다.

응시 순서는 목걸이 명찰에 이미 적혀 있었다.

준후는 44번째였다.

평소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숫자가 주는 불길한 기운이 아예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준후의 손가락이 명찰을 툭 건드렸다.

명찰이 핑그르르 돌며 목줄이 배배 꼬였다가 다시 풀렸다.

준후의 눈길이 앞줄을 향했다.

테스트는 5인 1조로 치러졌는데 방금 막 한 무리의 응시자들이 면접실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숙인 채 복도 바닥을 응시했다.

“이봐. 대체 테스트 내용이 뭐야? 살짝 언질 좀…….”

한 응시자가 막 면접을 끝낸 응시자에게 다급히 묻다가 입을 꼭 다물었다.

감독관이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던 것이다.

“시험 내용은 발설해서도, 미리 들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조건이 공평해야 해요.”

감독관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는 테스트 내용이 1급 군사 기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덕분에 준후의 호기심만 돋우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몰려온 신경외과 서전들을 분별해낼 시험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테스트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였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응시자들이 면접실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대기 줄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짧아지고 있었다.

다른 응시자들이 잔뜩 긴장한 것과 달리 준후는 느긋하기만 했다.

아니,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스승 박재현을 비롯해서.

따라잡아야 할, 또 존경할 만한 서전들이 많았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응시자들 중 준후의 적수는 없을 테니까.

“시험이 꽤 만만해 보이나 봐요?”

다다음 차례를 앞둔 준후 앞에 감독관이 서서 말했다.

준후를 향한 그의 눈빛이 못마땅해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방금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길래요. 다른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가 챙겨 온 교재를 보느라 정신없는데. 오직 서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요?”

감독관 케빈이 본인 말을 확인해 보라는 듯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테스트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다른 응시자들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응시자들이 늘어선 복도의 공기가 무겁고 팽팽했다.

물론 준후가 알바는 아니었다.

“시험장에서 바짝 정신 차린다고 달라질 게 있습니까? 중요한 건 평소 공부와 연습량이죠.”

“시험이 만만한 게 아니라 본인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준후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주변에 있던 응시자 몇몇이 준후를 쳐다보았다.

‘이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야?’하는 눈빛이었다.

“그건 너무 오만한 판단 아닐까요? 시험관도, 여기 있는 응시자들도 다 만만한 사람들 아닙니다.”

“애초에 자신이 없었으면 먼 미국 땅까지 응시를 보러 오지도 않았겠죠. 안 그렇습니까?”

“으음…….”

케빈이 턱을 쓸어내리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들썩거렸지만 끝내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요?”

“저 친구는 시험을 어떻게 치르나요?”

준후가 검지로 80번대 줄에 있는 레이먼드를 가리켰다.

“그게 좀 난감하기는 한데…….”

케빈의 손가락이 볼을 긁적거렸다.

“일단 다른 응시자들하고 똑같이 봅니다. 말 대신 메모장을 써야겠지만요. 살다 살다 갑자기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케이스는 처음이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아혈을 알고.

또 아혈을 점혈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준후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어찌 됐든 레이먼드의 시험이 녹록치 않을 거라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메이유 차원에서 저 응시자에게 페널티를 주지는 않습니까? 인종차별을 서슴지 않고 했는데요?”

준후가 따지듯이 물었다.

“서가 불쾌한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요.”

“이해하지만요?”

“일단 보는 사람들 앞에서 사과를 하기도 했고 아까 이야기를 나눠 보니까 본인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일단 한 번 더 기회를 줘보는 게 좋겠어요.”

케빈이 준후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

이에 준후는 확신했다.

케빈이 레이먼드의 뒷배라는 불편한 진실을.

개망나니 짓을 해도.

용서 받는 걸 보면.

케빈을 훌쩍 넘어서 메이유 클리닉 윗선과도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미국이라고 해서 학연·지연·혈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인데…….

“그 문제는 끝난 거 아닌가요? 서도 통 크게 용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상처는 빨리 아물지 않습니다. 그게 몸에 생긴 것이든, 마음에 생긴 것이든.”

할 말을 다했기에 준후는 입을 다물었다.

케빈도 준후에게 관심을 거두고 면접실 앞으로 이동했다.

“40번부터 45번 응시자, 입장하세요.”

케빈의 외침에 준후가 목을 좌우로 가볍게 꺾고 면접실로 이동했다.

그 잘난, 베일에 꽁꽁 숨겨놓았던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정체를 확인할 때가 왔다.

* * *

면접실은 단출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중앙에 ‘ㄷ’자 모양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세 명의 시험관이 매의 눈으로 응시자를 탐색하고 있었다.

시험관들 뒤쪽에 의학 서적이 가득 꽂혀 있는 원목 책장 3개가 나란히 비치되어 있었다.

창가 옆에는 거대한 보드판이 벽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준후를 비롯한 응시자들이 의자에 앉았다.

“41번부터 차례대로 자기소개 해보세요.”

왼쪽에 앉은 교수의 질문에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자기소개에서 미끄러지는 응시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용을 앵무새처럼 외우고 또 외워 왔을 테니까.

변별력은 질의응답을 할 때부터 드러났다.

주로 영어권이 아닌 서전들이 애를 먹기 시작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41번 챙이 시험관 쪽으로 귀를 내밀며 물었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이루고 싶은 것을 3가지 말하고 그 이유를 대라고 했습니다.”

“아…… 그게. 하나는 열정이고. 열정이 중요한 이유는…….”

챙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고개는 내려가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챙이 한참동안 횡설수설하자 시험관이 됐다는 듯 휘휘 손을 내저었다.

42번인 프랑스 출신 린나도 챙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들었으며 말도 계속 더듬었다.

의학적인 재능과 지식과는 별개로 그들은 언어의 벽을 넘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

43번은 흑인이었는데 그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능숙하게 시험관과 대화를 나눴다.

단 몇 분 만에 응시자의 희비와 명암이 갈려 버렸다.

“44번 준후 서. 메이유 클리닉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설명해 보세요.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건지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어보세요.”

시험관의 발음이 준후의 귀에 쏙쏙 박혔다.

바로 어제 들었던.

할렘가 친구들의 거칠고 뭉개지는 영어 발음에 비하면 시험관의 발음은 선녀나 다름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스피킹과 리스닝을 빡세게 해놓았고.

메이유 클리닉 지원 전에는 ‘두뇌 영역별 점혈법’으로 영어 공부에 매진한 준후였다.

점혈법으로 ‘청각’을 관장하는 측두엽.

‘말하기’를 관장하는 브로카 영역을 자극한 채 공부하니 효율이 300퍼센트 가까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까? 다시 설명해 줘요?”

준후가 말이 없자 한 시험관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영어가 잘 안 되는 응시자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퍽 많이 쌓인 모습이었다.

“아니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잠깐 고민했습니다. 바로 말씀드리죠.”

잠시 숨을 고른 준후가 래퍼처럼 속사포로 대답했다.

“메이유의 핵심 가치는 언제나 환자를 최우선으로입니다. 환자가 없으면 병원도, 의사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겠죠.”

“…….”

“의사로서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환자와 라포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라운딩을 오전에 2번, 오후에 2번 돌겠습니다. 환자의 상태는 물론이요 속 깊은 대화도 나누겠습니다.”

“…….”

“환자를 향한 배려 깊은(considerable) 대화가 있어야, 메이유의 핵심 가치를 약속하는(deliverable)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준후는 일부러 단어의 운율까지 맞췄다.

임기응변치고는 꽤 괜찮은 대답이었을까.

시험관들의 눈빛이 180도 달라졌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준후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준후 서, 비영어권 응시자 중에서는 발음이나 내용이 가장 좋네요?”

안경을 낀 시험관이 손가락을 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다른 시험관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메이유에서 수련 받는 동안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패기 넘치는 대답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문진 테스트를 해볼까요?”

문진 테스트.

쉽게 말하면 진찰 능력을 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진 테스트의 숨은 의도 역시 영어 솜씨의 확인이었다.

의사가 환자와 질문하고 대화할 때.

의사는 어려운 의학용어를 섞지 않는다. 일상적이고 생생한 단어로 문답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내가 머리가 아픕니다. 어떻게 진료를 볼 거죠?”

“머리가 언제부터 아팠죠?”

“어제 저녁부터요.”

“머리의 어디가 아프죠? 전체적으로 울리는 느낌이 듭니까? 아니면 관자놀이나 뒤통수 쪽만 아픈가요?”

“…….”

“띠가 머리를 압박하는 느낌이 듭니까? 바늘로 머리를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어요?”

준후는 의학용어를 일체 섞지 않으며 일상 언어로만 진찰을 해나갔다.

이에 다른 응시자들이 귀신에 홀린 듯 준후를 쳐다보았다.

준후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시험관들도 이만하면 됐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준후는 훈훈한 공기와 분위기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군계일학이 됐음을.

“이만하면 의사소통 때문에 걱정할 이유는 없겠군요. 다음 45번 응시자.”

45번 응시자는 캐나다 출신 서전이었다.

준후와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대답도 제법 야무지게 잘했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메이유의 부스트 업 프로그램 시험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거라고 착각한 사람은 없겠죠?”

중앙에 앉은 시험관이 피식 웃었다.

마치 누군가를 약 올리고 싶어 안달이 난 악동 같은 미소였다.

“크리스.”

시험관이 면접실 쪽문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벌컥!

의문의 쪽문이 거칠게 열렸다.

크리스라 불린 사내가 드레싱 카트를 끌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언가를 테이블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

“……!”

순간 응시자들의 눈동자가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의문의 물체는 다름 아닌 봉합사와 니들홀더, 포셉이 담긴 수쳐(suture) 세트.

그리고 실리콘으로 제작된 봉합 모형이었던 것이다.

모형과 수쳐 세트가 응시자 앞자리에 각각 놓였다.

준후도 흥미롭게 모형을 훑었다.

사람과 똑같은 살색 실리콘 모형에는 일자(-), 파도 문양(~), 곡선(⁀)모양의 상처가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상처의 길이는 대략 5cm정도 되었다.

“지금부터 실기시험입니다. 6-0 vicryl 봉합사로 그 상처들을 봉합하면 됩니다. 시간은 5분 드립니다.”

“실례합니다만…….”

45번 캐나다 서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따로 궁금한 게 있습니까?”

“상처 길이가 5cm나 되고 상처 모양도 다 제각각입니다. 이걸 어떻게 5분만에 다 봉합하죠? 하나도 다 끝내기 힘들 것 같은데요?”

다른 응시자들이 동의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진 과제 앞에 그들은 기가 질려 있는 듯 했다.

차마 모형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인데 그걸 다 봉합하라는 게 아니에요.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라는 겁니다.”

중앙에 있는 면접관이 안심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제야 응시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잠자코 있던 준후가 입을 열자 모두가 준후를 주목했다.

“이걸 5분 전에 다 봉합하면 가산점을 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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