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349화
제67장 메이유 클리닉(4)
드르르륵. 드르르륵.
한 청년이 낡은 빌라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그는 뒤로 돌아서서 한참동안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먼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빌라에서 보낸 추억을 가슴에 담아두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청년은 준후였다.
일단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준후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
메이유 클리닉 부스트 업 프로그램 테스트에 지원했고.
바로 어제 결과가 나왔다.
준후는 당당하게 수석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그 당시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태극기를 펄럭거리면서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을 지경이었다.
시험의 난이도와는 별개로 한국인 출신으로 미국 최고의 병원 시험에서 수석을 받은 건 자신이 처음일 테니까.
합격 소식을 전하자 주변에서 축하가 쏟아졌다.
부모님과 아영.
스승 재현과 신원대학교 동료들이 문자를 보내고 통화를 연결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특히 재현은 아는 기자를 통해 준후의 소식을 한국 뉴스에 내보내겠다는 뜻도 전했다.
부끄러워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모처럼 들뜬 스승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수락했다.
준후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중년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가자미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준후를 응시했다.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사내의 목소리가 준후를 붙잡았다.
“그쪽이 준후 서?”
“……저를 알아요?”
몸을 돌리며 질문하는 준후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준후는 명백하게 사내와 초면이었다.
“알다마다, 난 맥스라고 해. 사람들은 나를 하렘가 닥터라고 부르지.”
맥스가 싱긋 웃었다.
맥스는 짜리몽땅한 키에 푸짐한 뱃살을 자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워서 제가 대타를 뛰었던 거군요.”
준후가 어깨 총상 환자 마이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사실 나도 자네를 처음 보는데 어쩐지 의사일 것 같은 느낌이 팍 오더라고.”
“이 거리에 제 나이대의 동양인이 저 밖에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뭐, 그런 건 대충 넘어가자고.”
“마이클은 좀 어떻습니까?”
“덕분에 아주 건강하게 지내고 있지. 수술이 워낙 성공적이어서 다른 병원에 보낼 필요도 없었어. 나도 항생제 처방하고 소독만 해준 게 다야.”
맥스가 별일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혹시라도 집도 중 자신도 모르게 실수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회복 도중 문제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전부 기우였던 모양이다.
한 시름을 놓았다는 듯 준후가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그나저나 어디 가는 건가?”
“메이유 클리닉으로 갑니다. 부스트 업 프로그램에 합격해서요.”
“이야기는 들었어. 외과 세부 전공을 전부 1년 안에 수련시킨다는 세상 무식한 프로그램이라고 하던데. 자네 전공은 뭔가?”
“신경외과입니다.”
“허…… 신경외과면 어디 보자. 세부 전공이 뇌혈관 파트, 뇌종양 파트, 정위신경 파트…….”
맥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중얼거림이 멈췄을 때, 접혀 있는 맥스의 손가락은 7개였다.
“와우! 앞으로 7년이나 더 수련하는 건가?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서도?”
“네. 그런 셈이죠.”
“고생을 사서 하는 스타일이군. 굳이 세부 전공을 안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텐데.”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준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실 맥스가 했던 말을 신원대학교 동료들도 똑같이 했다.
그냥 한국에서 수련해라.
왜 굳이 신경외과 세부전공을 다 배우려고 하냐.
그것도 말도 잘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른 미국 땅에서.
그때 준후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은 그저 살기 위해서 살고 싶지 않다고.
신경외과의 형편은 갈수록 비참해지고 있었다.
수술 수가 낮아서 병원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고.
그 때문에 레지던트 지원자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렇다고 앞으로 사정이 나아질까?
결코 그럴 리 없다.
현상 유지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고질적인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만능 신경외과의가 될 필요가 있었다.
외상 환자도 보고.
사지 절단 환자도 보고.
회귀질환 환자도 보고 등등.
준후는 일종의 신경외과 계통의 만능열쇠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런 목표도 있었다.
외상의과의 이종국 교수.
지금은 비록 실무에서 은퇴했지만 그의 활약상과 곧은 정신에 대한민국은 한동안 뜨거웠다.
이종국 교수 신드롬이 일어났을 때.
잠시나마 외상외과 지원자들이 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준후도 스스로 별이 되어 미래의 의사 꿈나무들이 신경외과에 많이 지원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고 싶었다.
설령 준후가 만능 신경외과의가 된다고 한들.
한계는 명백했으니까.
한국에 있는 모든 신경외과 환자를 혼자서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 눈빛 부럽군. 나도 한때는 자네처럼 뜨거웠을 때가 있었는데.”
맥스의 눈동자에 얼핏 애틋함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식은 계기가 있습니까?”
“그건…… 말하기 부끄럽군. 떳떳한 일이었으면 하렘가에서 야매 의사 노릇 따위는 안 했을 테니까.”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맥스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혹시 앞으로도 하렘가 환자들을 치료해 볼 생각은 있나?”
“메이유에 들어가면 시간이 안 날 텐 데요?”
“외과의가 바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칼퇴근에 휴무도 보장되니까 말이야. 나 때도 할 만했는데 요즘 분위기라면 훨씬 느긋할걸?”
맥스의 말에 준후가 한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들어 본 적이 있는 정보였다.
미국 서전은 한국 서전처럼 병원 일에 갈려 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서전이 돈을 잘 벌고.
돈을 잘 벌어서 인력이 충분하니 그런 듯했다.
하긴 준후가 했던 총상 수술도 대학 병원에서 했으면 10억 급이라고 했으니 말 다했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앞길이 창창한 자네가 굳이 푼돈을 받아가며 하렘에서 치료를 할 이유가 없지.”
“아뇨. 할게요.”
“엥? 진짜?”
준후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허락하자 오히려 맥스가 크게 놀랐다.
치켜뜬 눈썹이 하늘에 닿을 듯했다.
“어째서?”
“남는 시간에 다양한 환자를 볼 수 있으면 그것도 경험치를 쌓는 일이잖아요.”
“난 돈 많이 못 주는데?”
“돈은 이미 충분히 벌고 있습니다. 당연히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죠.”
준후의 눈이 반달을 그리며 웃었다.
메이유 클리닉의 부스트 업 프로그램을 받는 것도 엄연한 의사 활동이었다.
현재 책정된 준후의 연봉은 무려 8억이었다.
물론 세전이긴 하지만.
거기에 뉴튜브 수익도 요즘 물이 올랐다.
[해외에서 의사생활]
이 컨셉에 호응이 좋아 구독자가 늘었고 영상 조회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튜브 수익도 연봉으로 환산하면 3억에 달했다.
근데 이렇게 많이 벌어도 마이클 총상 수술비용 한 방이면 끝장이잖아?
미국은 진짜 무서운 동네라니까.
준후는 새삼 미국의 살인적인 치료비에 혀를 내둘렀다.
의료 봉사를 한다는 느낌으로 하렘가 치료를 계속해도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나중에 한번 보자고. 아마 연락이 자주 가지는 않을 거야. 웬만한 선에서는 내가 치료하고 감당이 안 될 때만 자네를 부르지. 물론 스케줄 조절해서.”
“네. 알겠습니다.”
맥스와 연락처를 교환하고 악수까지 나눴다.
준후는 뒤뚱뒤뚱 멀어지는 맥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다.
풍덩 뛰어들어 헤엄이라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 * *
그 날 오후.
준후는 메이유 클리닉 내부를 거닐고 있었다.
시험을 보러 왔을 때.
또 시험이 끝났을 때.
병원 주변을 둘러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병원 내부는 크고 넓고 복잡했다.
본관을 제외하고 별관이 7개나 되었는데 별관은 죄다 10층이 넘는 규모로 으리으리했다.
심지어 클리닉 내부에는 내부인과 외부인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도서관도 존재했다.
현재 준후는 도서관 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도서관 방향에 있는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는 5층 건물이었는데 아래 2층을 여자 의사가 사용했고 위 2층을 남자 의사가 사용했다.
1층에는 구내식당과 매점이 있었다.
준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향했다.
배정 받은 기숙사는 510호실로 복도 끝에 위치했다.
띠리리리~
원무과에서 받은 카드키를 출입문에 갖다 대자 걸쇠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게 바로 돈 지랄인가?’
현관에 서자마자 준후는 입을 떡 벌렸다.
기숙사는 1인실이었고 신축 오피스텔처럼 깔끔하고 단정했다.
세탁기, 냉장고, 싱크대, TV, 책상 등등이 이미 구비되어 있었다.
오늘까지 머물렀던 낡은 빌라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런데 왜 일까.
분위기 좋은 기숙사에 들어섰음에도 가슴 한 편이 답답한 것은.
손톱만큼도 기쁘지 않은 것은.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준후는 짐을 푸는 것도 잊은 채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가까스로 답을 찾아냈다.
이 화려한 환경이 환자들의 눈물 젖은 돈에서 나왔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메이유의 핵심 가치가 ‘환자를 최우선’이라고 해도 치료비를 깎아주는 건 아닐 테다.
준후는 고개를 저어 무거운 마음을 떨쳐냈다.
그리고 별거 없는 짐을 재빨리 정리한 뒤 기숙사를 나왔다.
본격적인 수련은 내일부터였다.
후두엽을 자극해서 상상 수련을 하거나.
운기조식으로 마나 하트의 띠를 추가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모처럼 쉬기로 마음먹었다.
터벅. 터벅.
목적지 없이 걷던 준후의 발걸음이 운동장 근처에서 멈췄다.
농구대에서 농구를 하는 인원이 있었다. 3 대 3으로 반코트 플레이를 진행 중이었다.
텅!
백보드 모서리를 맞고 튕겨 나온 공이 쪼르르 준후 쪽으로 굴러왔다.
공을 가지러 온 한 청년이 준후 쪽으로 다가왔다.
청년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준후의 미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떡하니 준후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도 준후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야, 오랜만이다?”
아는 체를 하는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레이먼드였다.
준후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된통 혼나고 아혈까지 점혈당했던 그 망나니 말이다.
분명 말을 못하게 만들어놨는데.
어떻게 테스트에서 합격했지?
감독관 아니면 그 윗선에서 힘을 쓴 게 맞는 건가?
“뭐야? 왜 대답이 없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조금 의외다 싶어서 말이지. 말도 못하는데 잘도 시험에 통과했네.”
준후가 모르는 척 운을 띄웠다.
“아? 그거? 생각보다 별일 아니더라고. 사실 면접보다 실기가 더 중요했거든.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해서 봉합을 못하는 건 아니지.”
레이먼드가 바닥에 있던 농구공을 줍더니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미국인이니 어차피 의사소통에 하자는 없을 테고.
실기시험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둬서 합격을 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 사건의 여파가 긍정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혼쭐이 난 덕분인지.
준후에게 대놓고 옐로우 몽키라고 하거나 육탄전으로 시비를 걸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는 레이먼드였다.
“나도 좀 의외다 싶네?”
“어떤 점에서?”
“너 따위가 합격할 줄은 몰랐거든. 안 봐도 뻔하긴 해. 간신히 턱걸이나 했겠지.”
자신을 비웃는 레이먼드에게 준후도 똑같이 비웃음을 날렸다.
“이번 시험 수석이 난데?”
통. 통. 통.
레이먼드는 손에 들고 있던 농구공을 떨어뜨렸다.